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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28화 (28/150)

28화

도무지 하성민을 이해할 수가 없다.

회사 정문 앞에 조성된 작은 정원 벤치에 앉아 서진우는 멍하니 회사를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서 풀잎이 서로 맞부딪히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이제는 밤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서진우는 차마 사무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옥상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도 하성민이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것 같아 그대로 1층으로 내려와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과 캔 커피를 샀다. 혹시 몰라 다 먹고 사무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성민과 다시 평온하게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서진우는 차마 포장된 김밥 봉투는 열어 보지도 못한 채 어깨를 늘어뜨렸다. 배가 고팠지만 영 입맛이 돌지를 않았다. 서진우는 제 기분이 갑자기 바닥으로 고꾸라진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성민과의 대화로 인해, 한동안 잊고 살았던 죽음 전 삶의 한 조각이 수면 위로 떠오른 까닭이었다.

사내에 서진우가 게이라는 소문이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계절이 막 초겨울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몸을 돌리다 실수로 다른 사람과 몸을 부딪친 적이 있었다. 서진우는 눈을 들어 올리다 상대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고 움찔했다.

‘…….’

남자는 같은 기획개발부 소속 팀원이었다. 그는 대꾸 없이 가늘게 뜬 눈으로 서진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명백히 호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 스캔하듯 머리부터 발끝을 감정했다. 이윽고 그가 먼저 홱 몸을 돌렸다.

‘……재수 없게.’

문을 열고 나서는 동료의 혼잣말을, 서진우는 불운하게도 똑똑히 듣고 말았다. 채 마르지 않은 손이 떨렸다. 서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해졌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정확히는 지난달, 서진우가 도저히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던 회식 다음 날부터였다. 아마 또 그 없는 자리에서 그가 모르는 험담이 오고 간 모양이었다. 의기소침해지기는 했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우울하게 홀로 탕비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김 부장이 이번에는 또 어떻게 화를 낼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문서를 찾으러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렀다 왔다고 해도, 김 부장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서진우를 깎아내릴 터였다. 안 그래도 이미 평판이 바닥난 상황이었다. 욕먹지 않아도 될 일로 괜히 남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두 시간만 더 버티면 돼.’

서진우는 중얼거리며 자신을 독려했다. 그새 두 발이 멎어 있었다. 서진우는 채찍질당하는 지친 말처럼 억지로 발을 움직였다. 출력을 걸어 둔 문서만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없냐? 진짜…….’

탕비실에 가까워졌을 무렵, 문 너머에서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우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대인 공포증으로 인한 난처함이 고개를 들었다. 서류를 찾아야 일을 이어서 할 수 있을 텐데. 입안이 마르고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서진우는 눈을 감고 오른손을 펴 제 가슴을 꾹 짓눌렀다.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회사에서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떨림을 진정시킨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아, 알코올로 소독했는데도 찝찝해.’

‘뭘 그렇게까지.’

누군가의 투덜거림 뒤, 웃음기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둘 다 서진우가 아는 목소리였다.

‘아니, 넌 기분도 안 나쁘냐? 호모 새끼가 너 좋아 죽겠다는데.’

‘하하.’

‘비실비실하고 비쩍 마른 게 딱 봐도 병 있을 것 같잖아, 씨발.’

덜컥, 무언가를 걷어찼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혼자 회식 빠지고 어딜 가나 했더니만, 게이 짓 하러 클럽 다니는 거였어. 더럽게…….’

‘뭐, 좀 그렇긴 하지. 그래도 말조심해. 지금이야 우리끼리 있으니까 괜찮다지만…… 게다가 클럽 이야기 같은 건 아무래도 좀 위험하지 않나.’

‘어이구, 성자 나셨네, 성자 나셨어. 하 대리님, 그러니까 서 대리 같은 호모 새끼한테 찍혀서 개고생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뭐 없는 말 했어? 그 새끼가 게이인 건 맞잖아.’

험악한 욕설이 심장을 난폭하게 난도질했다. 서진우는 하성민이 난처하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언뜻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곤욕스럽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하성민이 정말로 착한 사람이라면, 어째서 이토록 노골적인 폭언을 부정하지 않는 것일까.

‘하여튼 진짜 눈치가 없어요. 다들 자기 피하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솔직히 뻔히 다 알면서 꾸역꾸역 회사에 붙어 있는 거 다 티 나는데 말이야.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진작 퇴사했다.’

‘너무 그러지 마. 얼마나 안됐어? 여기 아니면 갈 곳 없어서 버티는 중일 텐데.’

‘하긴……. 누가 저런 새끼를 써 주겠어.’

킬킬거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서진우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문고리가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서진우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탕비실에서 멀어졌다.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막혔다. 누군가가 목울대를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발소리가 들릴까 숨죽여 빠르게 움직이던 걸음은 점차 뜀박질이 되었다. 서진우는 도망치듯 비상구 문을 열어젖히고 몇 층의 계단을 쉼 없이 뛰어 내려갔다.

‘헉, 헉, 허억…….’

마침내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야 간신히 걸음이 멈추었다. 서진우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 내며 계단 난간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제 목을 조르던 거대한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처럼 호흡이 트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의 기분을 무어라 형용하면 좋을까. 비참함? 수치? 자신도 모르게 당한 아웃팅에 대한 당혹감과 모멸감? 동료의 말대로 뻔히 다 알면서도 비굴하게 회사에 붙어 있는 나약한 저 자신에 대한 경멸?

모르겠다. 그 기분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서진우는 다만 계단에 쪼그려 앉아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끓어오르는 그 모든 감각을 홀로 삭여야 했을 뿐이었다. 자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주변 소음이 희미하게 멀어졌다 커지기를 반복해 대는 탓에,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진우는 창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 때까지 계단 한구석에 몸을 옹송그린 채 숨어 있었다.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저 자신을 원망하면서.

“…….”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음에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서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오직 서진우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수많은 사그라진 시간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때 탕비실에서 모욕적인 말로 서진우를 매도했던 동료는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서진우 또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마주 인사했다. 누군가는 어떻게 그런 말을 듣고서도 인사를 하고 지낼 수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진우는 동료에 대해서 별다른 증오심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데다, 본디 그 동료는 서진우가 게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무던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편협한 인간이 수도 없이 많았고, 그 또한 그 편협한 포비아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마음을 준 적 없으니 크게 잃지도 않았다. 그러니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사서 척질 필요 또한 없었다.

하지만 하성민은?

‘뭘 또 그런 눈으로 봐요? 기분 나쁘니까 눈 깔아요.’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서진우에게만 들릴 정도의 욕설만으로도 마음을 손쉽게 짓이겨 놓았던 이가 하성민이었다. 끝까지 남들에게는 성실한 척, 마음이 넓은 척 굴며 오직 서진우에게만 몰래 잔인한 짓을 해 대던 남자.

그런데 왜 지금은 저토록 이상하리만큼 살가운 척을 하는 걸까.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굴면서.

마치 집착하는 것처럼…….

전신에 한기가 일었다. 서진우는 황급히 제 양 팔뚝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러 소름을 털어 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원래 미친 새끼는 이해할 수가 없는 법이다. 서진우는 죽음으로써 체득한 진리를 새삼 되뇌며 진저리를 쳤다. 빨리 김밥 먹고 올라가서 일이나 해야지. 아무리 일머리가 부족한 하성민이라도 시간을 이쯤 줬으면 진작 퇴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서진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검은 봉투에서 나무젓가락과 김밥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고작 십여 분 지났을 뿐인데 김밥은 그새 식어 있었다.

“이 시간에 혼자 밖에서 뭐 합니까?”

별안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서진우가 막 김밥 꽁다리를 입안에 씩씩하게 욱여넣었을 때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서진우가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백의현이 정문 돌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서진우는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안에 든 것을 씹어 삼켰다.

“저, 이사님.”

“야근 중입니까?”

보폭이 커서 빠르지만 다급해 보이지 않는 걸음으로, 백의현이 성큼 가까이 다가와 섰다. 퇴근길이었는지 그는 한쪽 팔에 재킷을 걸친 채였다. 서진우는 추레한 제 꼴을 맥없이 내려다보았다. 비뚤어진 넥타이와 구겨진 셔츠 위에 재킷을 간신히 걸친 자신과는 달리, 백의현은 재킷을 입지 않았음에도 빈틈없이 버튼을 잠근 베스트 때문인지 퍽 우아해 보였다.

‘누군 노숙자 같은데 누구는 무슨 모델 같네.’

같은 직장인인데도 이렇게 태가 차이 난다니. 서진우는 속으로 쓴 입맛을 다시며 멍청이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분석할 자료가 아직 좀 남아서…….”

“벌써 9시가 넘었습니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퇴근하시죠.”

백의현이 왼팔을 가볍게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서진우는 눈을 굴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녁입니까?”

팔을 내리던 백의현이 문득 서진우의 무릎 위로 눈길을 내렸다. 서진우는 백의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무릎 위에 덩그러니 놓아두었던 김밥이 잊힌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 네.”

얼굴이 홧홧해졌다.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민망함에 정수리를 내보인 서진우를 내려다보며 백의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강 과장도 사람 다루는 게 제법 거칠군요.”

“제, 제가 김밥을 좋아합니다. 맛있잖아요.”

혹여나 저 때문에 강 과장에게 나쁜 이미지가 박히는 건 사양이었다. 서진우가 황급히 김밥을 떼어 입안에 쑤셔 넣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적우적 열심히 턱을 움직이며 자신의 기호를 어필하는 서진우를 보던 백의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도 좋지만 건강이 먼저입니다.”

“이사님도 지금 퇴근하시잖아요…….”

서진우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우물우물 항변했다. 백의현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난 임원이잖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일을 말한다는 어투였다. 서진우는 입가를 가린 손을 내리고 백의현을 생경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는 간혹 남들은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서진우가 아는 임원 중 백의현처럼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례로, (임원은 아니지만)김 부장은 야근 거리가 생기면 무조건 부하 직원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퇴근하고는 했다. 자신은 관리직이니 야근은 실무를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멍해진 서진우의 시선을 마주한 백의현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서진우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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