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마침내 최종 샘플이 나왔다. 팀 내 의견에 따라 두어 번의 수정을 더 거친 끝에 만들어진 샘플은 별도의 패키지 디자인 없이도 꽤 맛있어 보였다. 백의현 또한 비주얼만 보면 이대로 출시하는 것도 무난히 가능해 보인다는 호평을 해 주었을 정도였다.
프로젝트팀은 해당 샘플 제작 식품을 토대로 사내 테스트를 진행했다. 사흘간 이 층 구내식당에서 진행된, 본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는 다양한 연령층의 의견을 이끌어 냈다. 안 그래도 동남아풍 그린 푸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젊은 직원들이 특히나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다양한 피드백을 전달해 주었는데, 이는 팀에게는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벅찬 일이기도 했다. 여러 채널을 이용한 피드백 양이 많다는 뜻은, 정리하고 분석해야 하는 데이터 또한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 오늘 집에 가긴 글렀다…….”
서진우는 일곱 시를 가리키는 시침을 맥없이 올려다보다 데스크에 머리를 박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이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강 과장은 내부 테스트 데이터 분석을 서진우에게 일임하고, 하성민에게 보조를 맡겼다. 사실 보고서 제출 기한은 목요일 회의 전까지로, 조금 빠듯하기는 했지만 마감을 못 지킬 정도의 기간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서진우에게 쏟아진 일감이 테스트 분석만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주말도 하루를 반납해 가며 회사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일주일이 찰나처럼 지나갔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요일 저녁, 모두가 퇴근하는 시간이 되고야 만 것이다.
‘쉬엄쉬엄하라고 하고 싶지만……. 분석 결과가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니까. ……보조할 인원을 좀 더 붙여 줄까?’
퇴근 전 안타까워하며 묻던 강 과장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때 염치 불고하고 붙여 달라고 할걸. 서진우는 섣불리 금방 끝날 것 같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데이터 정리만도 한나절이 넘게 걸리는 마당에 대체 이걸 어떻게 혼자서 마무리 짓는단 말인가.
“기운 내세요, 선배. 저도 남았잖아요.”
아, 차라리 혼자인 게 낫겠다.
서진우는 기운 없이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똑같이 열 시간째 근무 중임에도 하성민은 얄미울 정도로 번듯한 모습으로 앉아 서진우를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서진우는 제 꼴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구겨진 셔츠, 비뚤어진 넥타이. 아마 하도 헤집어 댄 탓에 머리도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을 게 뻔했다. 서진우는 자신을 보며 방긋대는 하성민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너도 가라고 하고 싶긴 한데…….”
“에이, 제가 서 선배 부사수잖아요. 이거 오늘 안에 혼자 다 못 하실 거 알아요.”
하성민이 자신과 서진우 사이에 쌓인 피드백 뭉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서진우도 기가 질린 눈으로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하성민 말대로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분류만 한다 쳐도 최소 두 시간은 걸릴 작업이었다. 혼자서 했다가는 정말로 회사에서 날밤을 새우게 생겼다.
서진우는 입술을 앙다문 채 못 미더운 눈으로 하성민을 곁눈질했다. 하성민은 씩씩하게 제 몫의 데이터 원본을 챙겨 분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김 부장 끄나풀이래도 단순 작업으로 분탕질 치진 못하겠지.’
서진우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하성민이 싫다지만 여긴 회사고 이건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 하성민의 행보는 정말로 프로젝트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팀 사람들과 적절히 어울리고, 강 과장이 시킨 일은 모두 제때 해내는가 하면 비록 보조로 붙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자진해서 야근까지 감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이것도 좀 부탁해. 모르겠다 싶은 게 있으면 바로바로 확인하고.”
“네엡.”
하성민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서진우는 껄끄러운 느낌을 뒤로하고 제 일에 집중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는가. 정 불안하면 서진우가 하성민이 작업 중인 공유 문서에 동시 접속해서 감시하면서 일하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퇴근하고 보자.’
서진우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모니터를 향해 눈을 빛냈다. 두 사람만 남은 사무실에 한동안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이어졌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둘이 진행한 덕에 생각보다 데이터 정리가 빨리 끝을 보였다. 이제 이걸 분류한 대로 산출해서 일차 분석하고 발표 자료와 보고서만 만들면…….
‘……막차 끊기기 전에는 집에 가겠는데.’
눈을 굴려 컴퓨터 시계를 확인한 서진우가 의자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대었다. 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던 탓에 눈가가 뜨끈하고 뻑뻑했다. 조금만 쉬고 다시 해야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막연히 많게만 느껴졌던 일이 어느 정도 가닥을 보이자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아…… 배고파.’
긴장이 조금 풀린 탓에 갑자기 허기가 밀려들었다. 데이터 정리가 끝나면 간단하게 뭐라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진우가 눈가에 올려 두었던 손을 막 거두었을 때쯤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백 이사님이랑.”
있던 의욕도 떨어지는 질문이 들려왔다.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피곤한 탓에 맥이 다 빠졌다.
“친해지다니, 무슨 소리야.”
“그냥요. 그쪽에서 선배를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타닥, 타닥. 여전히 성실하게 타자를 치며 하성민이 대꾸했다. 서진우는 하성민을 곁눈으로 흘겼다. 그는 해가 지고 창 너머가 어두컴컴해진 이 시간에도 여전히 곧은 자세로 모니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여튼 재수가 없다, 재수가. 서진우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차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기획안이 마음에 드셨다잖아.”
탁. 타자 소리가 멎었다. 하성민의 셔츠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 것치고는 선배한테 사심 있는 것 같던데.”
웃음기가 섞인 음성이 귀에 꽂혔다. 서진우는 저도 모르게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지난번 회식 때, 그 어두운 구석에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은밀하게 하셨어요?”
하성민은 한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친 채 완전히 서진우를 향해 상체를 돌린 채였다. 그의 안광이 기이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서진우의 뺨이 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경계심이 짙게 깔린 질문에 하성민의 입가가 희미하게 위로 솟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가 아닌, 어딘가 뒤틀려 보이는 오싹한 웃음이었다. 서진우는 등줄기를 내달리는 오싹한 소름을 느끼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냥 어쩌다 같이 담배 피우게 돼서, 인사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서진우가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리며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곧장 빈정거리는 듯, 웃음기 섞인 음성이 되돌아왔다.
“아, 그냥 인사 몇 마디.”
하성민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느껴진다면 너무 과잉 반응일까. 서진우는 들키지 않게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폈다. 프로젝트용으로 임시 대여해서 사용 중인 사무실은 기획개발부 사무실 크기에 비하면 단칸방 수준이었지만, 하성민과 단둘만 남은 지금은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넓어 보였다. 서진우는 제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며 냉담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이상한 소리 할 시간에 일이나 해. 데이터 정리 끝났어?”
“거의 끝나 가요. 몇 개 안 남았어요.”
언제 묘한 분위기를 풍겼냐는 듯 하성민이 태연하게 자세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서진우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곁눈질하다 공유 파일을 켰다.
“…….”
서진우는 몇백 열쯤 되는 데이터를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내렸다. 다행히 데이터를 잘못 입력하거나 왜곡한 부분은 없는 듯했다. 서진우는 자꾸만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끄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털어 내려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정리 끝나면 퇴근해.”
“어, 선배 어디 가세요?”
“잠깐 담배 피우러.”
서진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성민이 따라 나오려는 듯 몸을 돌렸다. 서진우는 성급히 손을 뒤로 내저었다.
“난 어차피 아직 퇴근하려면 멀었으니까 네 일 끝나면 가라고.”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 혼자 해도 충분해.”
그러니까 제발 가라는, 서진우의 완곡한 거절에 하성민이 의자 팔걸이를 잡은 채 엉거주춤 자리에 멈춰 섰다. 서진우는 그사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하성민과 고작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아.”
달칵, 사무실 문이 닫히고, 뛰다시피 걷는 서진우의 발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하성민은 엉거주춤하게 앉지도, 서지도 않은 자세로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풀썩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한테 가라고 했으면서, 도망은 본인이 치네.”
문득 중얼거린 하성민이 작게 웃었다. 언제 호인의 형상을 했냐는 양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비틀어진 상태였다.
“얼마나 급했기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하성민의 시선이 마무리 짓지 못한 데이터 서류를 지나 옆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서진우의 모니터로 향했다. 그의 눈매가 달처럼 휘었다.
“화면도 안 잠그고 가면 어떡해요. 서진우 선배.”
중얼거림 말미에 콧노래 같은 음률이 서렸다. 드르륵, 의자가 바퀴 구르는 소리를 내며 옆자리로 매끄럽게 이동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