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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26화 (26/150)

26화

그래도 9월이라고 가을이 오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날은 아직 후텁지근했지만 하늘은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아진 하늘을 보며 서진우는 후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차양 그림자에 몸을 숨긴 여수정이 서진우를 따라 숨을 뱉었다.

점심시간이 한창인지라 옥상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십여 분 뒤면 곧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후식 겸 흡연을 즐기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 테지만, 아직은 한가하게 여유를 만끽할 시간이 있었다.

서진우는 말없이 담배를 태우는 여수정을 곁눈질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굴던 여수정은 불을 붙이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없애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조 과장 새끼가 저더러 언제까지 프로젝트팀에 숨어 있을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더라고요.”

연초 하나를 필터 끝자락까지 태운 후 곧장 두 개비째를 꺼내 문 여수정이 불쑥 침묵을 깼다. 담뱃재를 털던 서진우가 홱 고개를 돌렸다. 여수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프로젝트 끝나면 다시 마케팅부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때 눈치 보여서 회사 어떻게 다니려고 이렇게 건방지게 구냐고요.”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진우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여수정이 서진우를 곁눈질하고는 피식 웃었다.

“웃기죠? 저도 웃기더라고요. 그래서 웃으려고 했는데, 웃음이 안 나왔어요.”

여수정이 긴 숨을 토해 냈다. 뿌옇게 피어오른 흰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입맛이 가신 서진우는 담배를 꺼트렸다. 여수정이 말한 기분을 서진우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스운데 전혀 우습지 않고, 오히려 비참한 기분. 별것도 아닌 폭언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결국에는 지고 마는 자신이 더욱 경멸스러워지는 느낌. 타인의 폭언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은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상황과 비슷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올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두려움을 감내하며 자존감이 내팽개쳐지는 것을 지켜볼 뿐.

불현듯 여수정이 눈썹을 비틀며 쓰게 웃었다.

“전 정말 맹세코 안 웃었어요. 그냥 서 있기만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또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조 과장이 욕을 하더라고요. 표정이 그게 뭐냐고, 똥 씹은 것 같다고. 지랄도 아주 그런 지랄을……. 참 나, 지 말이 똥 같은지는 알고 그랬나.”

여수정의 음성에 조소가 깃들었다. 서진우는 여수정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한 분노를 감지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조 과장님이 때린 건…….”

“네? 아, 설마요.”

서진우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되레 여수정이 놀란 듯 그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여수정이 고개를 흔들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날 조 과장이 손 들어 올렸던 거 떠올리신 거죠? 그래서 걱정하신 거구나. 아까도 저 숨겨 주시려고 하고.”

여수정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제 코를 매만지며 눈을 굴렸다. 여수정이 하하, 웃으며 담뱃재를 털어 냈다.

“괜찮아요. 조 과장 그 새끼, 세상 다 휘두르는 척, 온갖 센 척 다해도 진짜 문제 될 만한 일은 또 못 하는 좀팽이거든요. 그날도 만약 제가 진짜 맞았으면 조 과장 놈, 퇴근 시간 전에 저 불러내서 무릎 꿇고 빌었을걸요?”

등신 새끼, 작게 욕설을 읊조린 여수정이 재차 담배를 입가로 가져갔다. 서진우는 불씨가 빛을 내며 연초를 파먹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그렇게 물은 까닭은 여수정의 옆얼굴이 지쳐 보이기 때문이었다. 여수정은 서진우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여수정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허공에 나부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담배를 피우던 여수정이 문득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괜찮죠. 다친 것도 아니고, 고작 말 몇 마디 들은 게 다인걸요.”

허공을 배회하던 여수정의 시선이 펜스 앞 화단에 핀 꽃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런데 그냥……. 그딴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도 부하 직원이라서 가만히 들어 주고 있어야 한다는 게 좀 어이없고……. 꼴랑 한 시간 좀 못 되는 점심시간 빼앗겨 가면서 욕먹는 상황도 짜증이 나고.”

아직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가 재떨이로 직행했다. 답지 않게 조금 신경질적으로 불을 꺼트린 여수정이 꽁초를 쓰레기통 안으로 내던졌다.

“그래서 프로젝트 끝나면 회사 그만두려고요.”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폭탄선언을 했다.

“네?”

서진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서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여수정이 고개를 돌려 장난스레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지금 당장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닌데.”

끄응,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켠 여수정이 차양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저도 잘 마치고 싶어요. 일도 재밌고, 사람들도 좋고. 무엇보다도 제 이름 들어가는 기획이잖아요. 정말 제대로 해내고 싶어요.”

여수정이 눈을 두어 번 느리게 깜박였다.

“하지만 회사가 좋냐고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그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할 말이 사라진 서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조 과장이 버티고 있는 이상 이 회사는 제게 아무 메리트도 없어요. 게다가 오늘 보아하니 뭐, 조 과장만 없어진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여수정이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리님은 이해하시죠?”

“…….”

서진우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닫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서진우 또한 같은 이유로 퇴사를 결심했으니까. 서진우는 여수정을 생경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지난달에도 느꼈지만, 여수정은 정말 명석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가 기어코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후에야 비로소 이 회사가 뿌리부터 썩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련한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저 때문에 신경 쓰고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전 어차피 떠날 거니까요.”

여수정이 한쪽 무릎을 굽혀 구두코로 바닥을 콕콕 두드렸다. 멀리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점심시간도 중반을 넘어간 모양이었다. 이윽고 벽에서 몸을 일으켜 선 여수정이 서진우를 온전히 마주 보았다.

“그리고 서 대리님도 불합리하게 찍혀서 괴롭힘당하는 거 이제 지겹지 않으세요?”

단호하고도 명료한 목소리가 폐부를 찔렀다. 서진우는 놀라 입을 벌렸다.

“……알고, 계셨…….”

“저도 귀가 있거든요.”

여수정이 검지로 제 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하 대리님한테 기획서 뺏길 뻔했다는 이야기, 저희 부서에서도 소문이 자자해요. 아마 다른 부서 사람들도 웬만하면 다 알고 있을걸요? 김 주임님처럼 곰 같은 분이 아니라면.”

“…….”

서진우는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수정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자원한 거예요. 서 대리님과 함께 일해 보고 싶어서. 본인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엿을 먹여 주다니, 진짜 마음에 들었거든요.”

“……제가 좀 막무가내이긴 했죠.”

“에이, 자기 밥그릇 안 뺏기고 지켜 낸 건 대단한 거죠. 자, 가요. 이야기 들어 주신 보답으로 편의점에서 김밥이라도 사 드릴게요.”

여수정이 유쾌하게 떠들며 걸음을 옮겼다. 서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수정의 뒤를 따랐다. 쑥스럽고 머쓱한데도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합리한 상황을 참아 넘기지 않은 결과, 서진우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죽음을 겪기 전의 서진우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 덕분에.

그 사실이 기묘하면서도 기꺼웠다.

어쩐지 뺨 안쪽이 간지러워서 서진우는 입가를 매만지며 여수정을 따라 옥상을 벗어났다. 어느새 조금 시원해진 바람이 기분 좋게 공터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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