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 죽일 놈의 저질 체력, 고작 복도 좀 뛰다시피 했다고 약간 숨이 찼다. 서진우는 헐떡거리지 않으려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색하게 백의현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고맙다는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아무리 마음가짐을 바꿨다 한들 김 부장의 폭언이 혹독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 돌파구를 찾았음에도 거대한 벽에 꽉 막혀 답답하고 막막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등장한 백의현을 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보고서를 통과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프로젝트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서진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 시야 하단에 걸리는 손가락이 머쓱했다.
그간은 백의현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무리 개혁을 하니 어쩌니 칼을 휘두르고 다닌들 이사 타이틀을 달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사내였다. 그 때문에 백의현의 이름에 붙은 꼬리표가 얼마나 많았던가. 회장이 숨겨 둔 아들이다, 부사장이 몰래 꽂아 넣은 낙하산이다……. 게다가 서진우에게는 특히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창 괴롭힘을 당해 주눅 들어 있던 자신을 향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실망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사람에게 어떻게 호감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어쩌면.
‘나는 일에 있어 순진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신중한 것 같으면서도 할 말은 참지 않고.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일 잘하는 사람을 더 지지해 주고. 회사에서 그런 사람 찾기 쉽지 않잖습니까.’
서진우는 지난 회식 때 백의현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했던 그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제 입지를 잡으려 애쓰기보다는, 정말로 일에 진심인 사람들을 밀어주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임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백의현이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
서진우는 고개를 들어 올려 웃었다. 백의현이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다. 놀란 얼굴이라니, 항상 여유롭고 건조한 사내에게는 퍽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서진우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눈을 굴렸다.
“솔직히 저는 일개 사원이고……. 아무리 제가 기획한 아이템이라지만 프로젝트팀 내에서도 인터넷 게시글 때문에 중요한 성분을 바꾸자고 하는 건 좀 과하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만일 백 이사님께서 지지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솔직히 이번 변경안을 통과시키는 건 어려웠을 겁니다. 저희는 결국 결과가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기존 안대로 진행해야 했을 거고요.”
많은 프로젝트가 그런 식으로 타협을 보고, 애매해지기를 반복한다. 게다가 미래를 알고 있는 서진우로서는 이미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프로젝트의 결과를 다시 맥없이 지켜봐야 했을 터였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주셔서,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쑥스러울지라도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서진우는 달아오르는 귓불을 매만졌다. 어쩐지 눈을 들 수가 없었다.
“……대놓고 꼬드길 땐 도망만 쳤으면서.”
머리 위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떨어져 내렸다.
“네?”
백의현의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한 서진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의현이 한 손으로 제 입가를 매만지며 서진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착각일까? 서진우는 그 검은 눈동자 너머, 희미한 일렁임을 본 것 같았다.
서진우가 민망해질 때까지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던 백의현이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퇴사하고 싶습니까?”
백의현의 질문은 뜬금없었다. 괜스레 아픈 부분을 찔린 서진우가 어깨를 움츠리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하…….”
프로젝트가 끝나면 퇴사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가며 상품을 만들던 최근 며칠간은 솔직히 즐거웠다. 문득 서진우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퇴사라는 단어조차 떠올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진우의 상념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백의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서진우 대리.”
백의현이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서진우는 백의현의 미소를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이가 아릴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서진우가 알고 있던 백의현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이미 말한 바 있죠, 서진우 대리가 마음에 든다고.”
백의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서진우는 어쩐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회사에서 오래도록 일하게 만들려면 그만한 지원을 해야 마땅하겠죠.”
한 발짝, 더 거리가 가까워졌다. 서진우는 이제 백의현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조금 더 들어야 했다.
“그러니 내가 한 행동은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의 거리가 조금 심히, 많이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백의현이 서진우의 어깨에 크고 커다란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청량하면서도 깊은, 맡아 본 적 있는 향이 서진우의 코끝을 스쳤다.
“나는 서진우 대리가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툭, 툭. 일 잘하는 부하 직원을 격려하는 듯한 몇 번의 다독임. 그 가벼운 접촉에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서진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백의현이 목을 빼고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그 때문에 내가 필요하다면 마음껏 활용하세요.”
낮고 나긋한 음성이 귓가에 은밀하게 파고들었다.
“언제든, 어느 때든. 서진우 씨가 필요로 한다면 나는 항상 곁에 있을 겁니다.”
“…….”
등줄기로 전기 충격 같은 짜릿한 소름이 내달렸다. 서진우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귓가에서 멀어진 백의현이 웃으며 서진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럼 즐거운 점심시간 보내길.”
“……어, 아, 네…….”
고장 난 서진우가 삐걱대는 동안 걸음을 돌린 백의현이 이윽고 엘리베이터 너머로 사라졌다. 서진우는 높아지는 엘리베이터 표시판의 숫자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서진우 씨라니, 미친……. 갑자기 직급 떼고 부르는 건 반칙이지!’
심장이 십 킬로미터 마라톤을 방금 마친 사람처럼 뛰고 있었다. 급기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서진우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를 쓰며 힘겹게 프로젝트팀 사무실로 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백의현의 화법은 질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
“이제 퇴근하고 싶다…….”
지나친 흥분의 여파 탓에 지칠 대로 지친 서진우가 터덜터덜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진우는 상상 속에서 백 이사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조퇴한다고 말하고 짐을 싸는 상상을 하며 사무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현실은 이제 겨우 점심시간이니 퇴근하려면 네 시간은 더 일해야 하지만…….
“……아, 서 대리님이시구나.”
“왔어?”
별생각 없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던 서진우가 자리에 멈춰 섰다. 어쩐지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서진우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점심시간임에도 자리를 지키고 앉은 팀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진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다들 점심 안 가고 왜…….”
“대리님, 큰일 났어요! 수정 씨가…….”
임상하가 성급하게 외쳤다. 서진우의 시선이 절로 임상하에게 향했다. 임상하는 올려 묶은 머리를 토끼 귀처럼 흔들며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정 씨? 여수정 씨가 왜?”
그러고 보니 여수정이 사무실에 없었다. 서진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서진우를 보며 강 과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십 분 전쯤에 조 과장이 찾아와서 데리고 갔어.”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서진우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김기호가 어색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굴렸다.
“그게, 조 과장님 엄청 화난 것 같아 보이시더라고요. 거의 수정 씨 손목을 잡아끌다시피 하셨는데……. 제가 말려 보려고 했더니, 마케팅부 일이니까 타 부서 사람은 끼지 말라고 소리치시고……. 수정 씨도 그냥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셔서…….”
“……아.”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런 분위기였다면 분명 보고서 관련으로 화풀이를 하러 왔을 것이 뻔했다. 서진우는 얼굴을 굳혔다. 생각해 보면 여수정이 보고서 관련으로 의견을 말했을 때도 일개 사원이 어쩌고 하며 길길이 화를 냈었지. 조 과장 성격에 보복하려고 들 것이 당연했는데.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우리끼리 점심 가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기다리는 중인데 안 돌아오네. 혹시 오면서 못 봤어?”
강 과장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서진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못 봤습니다.”
“역시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강 과장이 자책 어린 한숨을 토했다. 서진우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조 과장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손을 들어 올렸던 장면이 새삼스레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 정말 회사에서 직원을 때리진 않겠지. 상식인이라면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불안했다.
“…….”
서진우는 문득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서진우만큼 극단적인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여수정이 불려 가는 걸 직접 목격했을 팀원들도 모두 걱정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후까지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판단을 마친 서진우가 의자를 당겨 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식사 먼저 다녀오세요. 수정 씨는 제가 연락해 볼게요.”
“네? 하지만 대리님도 점심…….”
“저도 방금 돌아온 터라,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요. 잔업 정리하면서 기다리다가 수정 씨 오면 같이 먹죠, 뭐.”
서진우가 컴퓨터의 잠금 화면을 풀며 웃어 보였다. 임상하가 눈썹을 아래로 휘었다.
“하지만…….”
“수정 씨 기다리느라 다 같이 점심 밀리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걱정 마세요, 수정 씨 찾아서 제가 꼭 같이 밥 먹고 올 테니까.”
서진우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반론을 차단했다. 김기호와 임상하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강 과장 또한 쉬이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쩐다. 서진우는 쓴 입맛을 다시며 하성민에게로 눈을 돌렸다. 분위기를 맞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하성민이 서진우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 대리님 말씀대로 해요, 우리. 이렇게 기다리면 수정 씨가 돌아왔을 때 괜히 미안해할지도 모르잖아요?”
과연 인성이 글러 먹었지만 사회성만큼은 장착한 하성민다운 발언이었다. 하성민의 말에 강 과장도 고민을 마친 듯 미간을 긁적였다.
“그것도 그렇긴 하네. ……그래, 그럼 서 대리. 수정 씨 돌아오면 연락 한 번만 줘.”
“맡겨 두세요.”
마침내 강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팀원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 뒤를 따랐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사무실을 나서는 팀원들 한 명 한 명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마침내 마지막 주자인 하성민이 밖으로 나서며 사무실 문을 닫았다.
달칵. 문 너머로 팀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주위가 완전히 고요해진 것을 확인한 서진우는 그제야 억지로 키보드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멈추었다.
‘……여수정 씨,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
아무래도 불안했다. 마케팅부에서 여수정의 입지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기에, 그가 불합리하게 욕을 먹더라도 편들어 줄 이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조 과장이 만일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여수정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가기라도 했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서진우는 핸드폰을 꺼내 여수정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신호음이 일여 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수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진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역시 직접 찾으러 가야겠어.’
불안한 상상만 하며 기다리느니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든 서진우가 비장한 심정으로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
너무도 결의 넘치게 문을 열어젖힌 탓에 하마터면 문 앞에 선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굳힌 서진우가 곧 상대를 확인하고 놀라 입을 벌렸다.
“여수정 씨.”
“대리님?”
여수정이 바로 앞에 서서 서진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또한 퍽 놀랐는지 안경 너머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였다. 서진우는 눈을 깜박이다가 화들짝 놀라 두어 걸음 뒷걸음질했다. 그제야 여수정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서진우는 뒤늦게 자신이 그를 찾으러 가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 괜찮아요? 조 과장님한테 불려 가셨다고 들어서…….”
“아, 네. 제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여수정이 어색하게 눈을 내리깔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높낮이가 거의 없는 무감한 목소리였다. 정말 괜찮은 건가, 생각하며 안색을 살피던 서진우는 문득 여수정의 소매 너머로 보이는 손목에 찍힌 붉은 손자국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그, 손목…….”
“……아.”
서진우가 쳐다보는 곳이 어딘지 잠시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던 여수정이 짧은 탄성을 토하며 손을 내렸다.
“별거 아니에요.”
여수정이 비어 있던 다른 손으로 소매를 잡아당겨 손목을 감추었다. 서진우는 묘하게 제 시선을 피하는 여수정을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조 과장이 여수정의 손목을 잡아끌었다던 김기호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우악스럽게 당겼으면 피부에 손자국이 난단 말인가.
“서 대리님.”
화가 치밀어 올라 속이 답답해지려는 찰나, 여수정의 목소리가 서진우의 상념을 끊어 냈다. 여수정이 여상한 눈으로 서진우를 마주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한 대 안 피우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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