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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24화 (24/150)

24화

“하여튼 이놈이고 저년이고 지랄을…….”

불현듯 김 부장이 헛웃음을 토했다. 그가 보란 듯이 짝, 짝. 손뼉을 쳤다.

“이야……. 강 과장, 서 대리. 사내에서 진짜 너희 같은 애들로만 잘도 모아 놨구나. 회사 생활 아주 살맛 나겠어. 어? 위에서 프로젝트팀 하나 꾸려 줬다고 이제 막 내가 우습지? 막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오를 수 있을 것 같고, 만만하고 그러지? 이것들이 상사가 말하는데 아주 순서도 없이 끼어들고, 대들고 난리가 났네. 너희가 그렇게 잘났어? 어?!”

김 부장의 목소리에 점차 분노가 섞였다. 뭐가 그리도 화가 나는 건지 그는 이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씩씩대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주 화병으로 쓰러질 기세였다. 서진우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또 무슨 폭언이 얼마나 쏟아질까. 자신은, 강 과장은, 여수정은 회의 보고서 하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 시간을 또 얼마나 버텨야 할까. 다가올 폭력에 정신이 아득해지던 차였다.

“무슨 일입니까?”

낮게 가라앉은,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로질러 다섯 사람에게 닿았다. 서진우는 저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백의현이 기획개발부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사원들마저 행동을 멈춘 탓에 사무실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일었다.

뚜벅, 뚜벅.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의 사무실에 묵직하고 느린 구두 소리가 울렸다. 백의현은 고요한 사무실을 아무렇지 않게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왔다. 파티션 너머로 상황을 관망하던 사원들의 시선이 백의현의 움직임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김 부장의 자리까지 도달한 백의현이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채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배……, 백 이사님.”

김 부장의 안면근육이 뻣뻣해졌다. 백의현은 굳어 버린 김 부장과 당황한 조 과장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김석환 부장님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리더군요. 그런데 무슨 일인가 해서 와 봤더니, 마케팅부 조윤기 과장은 왜 여기 와 있습니까?”

백의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조 과장이 언제 핏대를 세웠냐는 듯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 그게, 보고드릴 일이…….”

“마케팅부는 장혁수 부장이 총괄하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기획개발부에 직접 보고할 만한 사안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일단 그것보다는.”

백의현의 시선이 강 과장과 서진우, 그리고 서진우가 등 뒤에 감추다시피 한 여수정에게 차례로 느리게 닿았다 떨어졌다. 서진우는 백의현의 미간이 슬쩍 좁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서진우 대리.”

“―네?”

언제 안면을 찌푸렸냐는 양 무표정으로 되돌아온 백의현이 불쑥 이름을 불렀다. 방심하고 있던 서진우가 놀라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백의현이 김 부장이 선 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상황 설명하세요.”

에?

서진우는 하마터면 멍청한 소리를 낼 뻔했다. 아니……. 이 자리에 김 부장도 있고 강 과장도 있고, 하다못해 조 과장도 있는데 왜 애먼 제게 상황을 묻는단 말인가? 서진우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지만, 백의현은 여전히 서진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동 중이었다. 서진우는 어쩔 수 없이 자세를 고쳐 바로 섰다.

“……그, 프로젝트 관련……. 개발 중인 식품의 성분 변경 승인을 받으려 보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성이 높아진 이유는?”

백의현이 고저 없는 어조로 되물었다. 서진우는 백의현의 뒤에서 제게 부단히 눈치를 주려 애쓰는 김 부장을 곁눈질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변경 사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반려하겠다고 하셔서…….”

“아니, 서 대리. 그렇게만 설명하면 내가 뭐가 돼.”

참지 못한 김 부장이 성급히 서진우의 말을 잘랐다. 백의현이 천천히 김 부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김석환 부장님.”

“예, 예에. 이사님. 제가 다시 설명을…….”

“제가 발언권을 드렸습니까?”

“예?”

김 부장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의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 상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순서도 없이 끼어듭니까?”

“…….”

그 순간의 김 부장을 묘사하자면, 그야말로 사우나를 기대하고 문을 열었다가 시베리아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심장 마비가 온 사람 같았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김 부장의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하지만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란 건 서진우도 매한가지였다.

‘밖에서 들렸다더니, 정말 다 들었나 보네…….’

서진우는 피해자 입장임에도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말을 인용한 장본인인 백의현은 남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이번에는 정말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이 프로젝트 신경 많이 쓰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래서 주의해서 검토하는 중이었습니다…….”

김 부장이 억울해하며 소심하게 항변했다. 백의현은 김 부장의 대꾸를 무시했다. 그가 강 과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손에 든 그게 서진우 대리가 말한 내용과 관련된 보고서입니까?”

“네? 아, 네.”

멍하니 백의현과 김 부장의 공방을 보고 있던 강 과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백의현이 손을 내밀었다.

“봅시다.”

강 과장은 얌전히 양손으로 보고서를 내밀었다. 문서를 받아 든 백의현이 신중히 내용을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팔락, 팔락. 고요한 사무실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길지 않았기에 금방 내용을 훑은 백의현이 이내 문서를 맨 앞 페이지로 되돌렸다.

“이 글이 라이벌 기업의 노이즈 마케팅일 거라 예상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종이를 튕겼다.

“아, 여기 있는 서진우 대리입니다.”

강 과장이 재빨리 몸을 돌려 서진우를 가리켰다. 백의현이 눈을 돌려 서진우를 마주했다. 서진우는 자신을 곧장 응시하는 백의현의 시선을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조금 전과는 달리 동공 위로 이채가 돌았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백의현이 자세를 고쳐 섰다.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 서진우는 당황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회의 시간에 세웠던 가설을 설명했다. 백의현은 서진우의 설명을 듣는 내내 눈을 내리깐 채 보고서를 들춰 보았다.

“……그래서 설영기업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했습니다.”

“흠.”

서진우의 말이 끝나자 백의현이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엄지로 턱을 매만지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좋군요.”

백의현의 입가가 호선으로 휘어졌다.

“금일 오전, 임원 회의에서도 이 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CS 쪽도 아침부터 상당한 민원으로 고생을 하는 중이라더군요.”

“아…….”

임원 회의라는 말에 김 부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러나 백의현은 김 부장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보고서를 넘겨 보며 말을 이었다.

“전략팀에서도 서진우 대리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설영기업 쪽에서 노골적인 노이즈 마케팅을 시작하려는 것 같다고요. 그 회사가 이런 식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말입니다. 안 그래도 대응책을 모색 중이었는데…….”

탁, 굵은 손가락이 보고서를 덮었다. 백의현이 웃는 얼굴을 들어 올려 강 과장과 서진우, 여수정을 둘러보았다.

“비정제당을 떠올린 건 강 과장 경력 덕분이겠군요. 좋습니다.”

뜻밖의 칭찬에 서진우는 얼떨떨해졌다. 백의현이 강 과장에게 보고서를 돌려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이 보고서는 메일로도 한 번 보내 주십시오. 위에서 다시 한번 읽어 보고, 필요하면 회신으로 피드백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태도가 부드러웠냐는 듯 말끝에 섬뜩한 냉기가 서렸다. 백의현이 딱딱한 얼굴로 김 부장과 조 과장을 돌아보았다. 김 부장과 조 과장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할 정도로 기가 죽어 서 있었다.

“앞으로 강원채 과장 프로젝트 건은 김석환 부장님이 검수할 필요 없습니다.”

“아, 아니. 저, 이사님.”

김 부장이 당황해 말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간 백의현의 목소리가 김 부장의 항변을 깔아뭉갰다.

“불필요한 공방전으로 업무 시간 소모하지 말고, 강원채 과장님 선에서 합당한 의견이라고 판단되면 곧장 제게 보고서 올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강 과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조적으로 김 부장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조 과장은 새파래졌다. 꼭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에 서진우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가 애써 입술을 깨물고 참는 동안 용건을 마쳤다는 듯 백의현이 걸음을 돌렸다. 사원들의 고개가 멀어지는 백의현을 따라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뭣들 해, 다들 일 안 하고! 구경났어?!”

백의현이 완전히 사라진 뒤 씩씩대던 김 부장이 빽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요했던 사무실에 부리나케 생활 소음이 들어찼다.

“서 대리, 수정 씨. 우리도 어서 돌아가자.”

미적대다 괜히 붙들려 김 부장에게 쓸데없이 괴롭힘당하는 일은 사절이었다. 서 대리와 강 과장, 여수정은 도망치듯 후다닥 기획개발부 사무실을 벗어났다. 등 뒤에서는 김 부장이 벌써 누군가를 붙잡고 갈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휴, 난리 났다.”

“그래도 진짜 대박이에요. 이대로 통과 못 할 줄 알았는데.”

“백 이사님이 적절한 타이밍에 와 주셔서 다행이었지.”

여수정과 강 과장이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서진우는 문득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 백의현을 발견했다. 그는 긴 복도를 여유롭게 홀로 걷고 있었다.

불쑥 충동이 일었다. 서진우는 강 과장과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죄송한데 들러야 할 곳이 생각나서요, 먼저 돌아가시면 금방 따라갈게요.”

서진우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저를 보내 주는 동료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빠른 걸음으로 백의현의 뒤를 쫓았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따라잡을 생각이었지만, 천천히 걷는 듯해 보이던 백의현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서진우는 그가 막 코너를 돌아 사라지기 직전 입을 벌렸다.

“―백 이사님!”

서진우의 외침에 백의현의 걸음이 멎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서진우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진우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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