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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23화 (23/150)

23화

김기호는 오래 걸리지 않아 몇 가지 비정제 천연 당을 이용해 새로운 샘플을 제작해 왔다. 비정제당이 주는 특유의 독특한 맛을 잡고, 당도를 줄이는 대신 산도를 살린 식품은 특히 여성 팀원들에게 제법 호응을 얻었다. 그사이 강 과장과 서진우는 동남아 지사에 남아 있는 동료들에게 연락해 비정제당을 낮은 가격에 대량 유통할 수 있도록 협상을 진행했다. 지난 생과는 달리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다.

딱 하나, 김 부장에게 변경된 사안을 승인받는 일을 제외한다면.

“아니, 처음 기획안이랑 완전 다르잖아! 이딴 걸 어떻게 승인해 달란 말이야. 제정신이야?”

탕, 김 부장이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기획개발부를 뒤흔들었다. 강 과장 뒤에 선 서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암초 같은 새끼.

“시장에서의 포지셔닝을 생각하면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게다가 비정제당 같은 경우 태국과 캄보디아 협력사에서 이미 품질 개량에 성공해서 유통 중인…….”

“아니, 그러니까 멀쩡한 대체당 놔두고 왜 이렇게 돌아가냐고! 강 과장 너 이거, 괜히 동남아 지사 밀어주려고 수 쓰는 거 아니야?”

김 부장이 강 과장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쳤다. 서진우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서로 올리지 않았습니까. 자칫하다간 타사의 노이즈 마케팅에 휘말려 시작도 전에 부정적인 이미지만 안고 갈 확률이 높습니다.”

앞에 선 강 과장은 확실히 서진우가 존경하는 상사답게 아직까지 제 감정을 잘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 과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 부장 옆에 서 있던 조 과장이 코웃음을 쳤다.

“뭐, 그 인터넷 게시글? 이봐, 강 과장. 아무래도 해외에 너무 오래 나가 있다 보니 감이 많이 떨어졌나 본데, 이런 글 쪼가리는 하루에 몇백, 몇천 개씩 올라와. 반짝 이슈가 됐다가도 금방 꺼지는 게 네티즌들의 관심이라고. 그런데 고작 그 글 하나 때문에 성분을 갈아엎겠다고? 회사 예산이 장난이야?”

“고작 글 하나가 아니에요, 조 과장님. 원래 사이트에서만 10만 뷰가 나왔고, 지금은 포털 검색창에 대체당이라고 쓰기만 해도 자동 완성으로 저 글의 제목이 뜰 정도로 여기저기 퍼져 나갔다고요! 그런데도 이 글이 단순히 고작 글 하나로 보이시나요? 이런 이슈는 마케팅부가 더 민감하게 대처해야 하는 사안이 아닙니까?”

강 과장의 지적에 마케팅부 조 과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게 왜 강 과장에게 싸움을 건단 말인가. 서진우가 아는 한 조 과장은 한 번도 논리에서 강 과장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냥 강 과장님이 김 부장한테 깨지는 거 보고 싶어서 구경 온 주제에.’

서진우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조 과장을 한심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조 과장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막 대거리를 하려 입을 뗐을 때였다.

“아, 됐어! 강 과장, 너는 어떻게 한 마디를 지는 법이 없냐?”

김 부장이 강 과장을 향해 검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조 과장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구만. 막말로 마케팅부 과장은 강 과장이 아니라 여기 조 과장이잖아. 그런 조 과장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이슈인 것 같다고 말하는데도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서 심각한 척 부풀리고, 부풀리고. 그러니까 강 과장이 승진을 못 하는 거야!”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토해 내는 폭언의 수준이 그야말로 거지 같았다. 강 과장이 몰래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서진우는 강 과장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도 김 부장의 턱을 날려 버리는 상상을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씩 해 왔기 때문이다.

조 과장은 여전히 서진우를 불만족스럽게 흘기고 있었다. 하지만 강 과장이 김 부장에게 욕을 먹으니 불쾌한 흥분이 잘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그가 자신을 보며 얄밉게 눈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혀끝에 욕설이 고였다. 서진우는 얼굴을 굳히며 눈을 돌렸다.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그냥 기존 기획안대로 한번 밀고 가 볼까요?”

강 과장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서진우와 여수정은 강 과장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강 과장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가 김 부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기존대로 진행해서 손해가 발생했을 때, 기획안 변경을 통과시키지 않은 사람이 부장님이라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이번에 놀란 이는 김 부장이었다. 그의 얼굴이 일순 뻣뻣해졌다. 그야 당연했다. 안 좋은 일은 무조건 회피하려는 사람이니 강 과장의 말이 퍽 오싹하게 들렸으리라. 강 과장은 김 부장의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차분하게,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품질이 보장된 비정제당의 단가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부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미 보고서를 통해 말씀드렸다시피 동남아 협력사를 통해 교섭하면 유통 단가를 충분히 적정선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해외 파견 기간에 제가 한 일이 좋은 협력사와 교섭하고 품질을 국내에서 요구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지속적으로 단가 이야기만 하시며 반대하시는 건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강 과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키야, 역시 강 과장님. 서진우는 속으로 박수갈채를 쏟아 냈다. 그리고 강 과장과 정반대로 생각했을 김 부장은 빠득 이를 악물었다.

“이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아니, 비정제당 쓴다고 맛이 개선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인지도도 훨씬 더 떨어지는 성분을 왜 굳이 쓰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거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대체 동남아에서 무슨 품질을…….”

“인지도 문제라면 마케팅 단계에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김 부장의 고함을 용감하게 끊고 들어온 이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서진우는 불쑥 손을 들고 끼어든 여수정을 조금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여수정 씨!”

조 과장이 홱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여수정은 조 과장에게는 곁눈질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김 부장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시선을 무시하지 못한 김 부장이 마뜩잖아하며 물었다.

“그쪽은…….”

“마케팅부 여수정입니다.”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여수정이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현재 문제는 대체당의 이미지가 급속도로 안 좋아질 위험성이 생겼다는 거죠. 심지어는 경쟁사에서 일으킨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일 가능성도 있고요. 만일 저희 예상이 맞는다면 대체당 때리기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겁니다. 하지만 비정제당은 대체당도 아니고, 정제당도 아니죠. 이 경우 대체당이 얻어맞는 상황이 오더라도 ‘천연 건강 성분’이라는 이미지를 충분히 챙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메리트가 될 수 있는 상황인 겁니다.”

감정이 거의 없는 말투는 설득을 한다기보다는 사실을 나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기이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여수정이 한 손을 펼쳐 보였다.

“운이 좋다면 경쟁사의 노이즈 마케팅 흐름에 편승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비정제당은 화학 대체당이 아니다, 정제당보다 식이 섬유가 많고 당 분해가 느리니까 건강도 챙길 수 있다.’ 한편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만일 이 글이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집니다. 대중에게 비정제당을 소개하고 새로운 이미지까지 심어 줄 수 있으니까요. 어떤 방향으로 가든 브랜드 이미지에는 긍정적인 변화를 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안 바꿀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여수정이 가볍게 주먹을 쥐며 말을 끝맺었다. 조리 있는 설명에 할 말을 잃은 김 부장은 진작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서진우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여수정의 옆모습을 흘끔, 돌아보았다.

“여수정 씨, 낄 데 안 낄 데 구분이 안 가?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물론 조 과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내는 조 과장을 여수정이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회사에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와, 진짜 강하다. 서진우는 남몰래 감명 깊은 탄성을 토했다. 역시 추천하길 잘했다. 강 과장과 여수정만 있어도 프로젝트가 크게 틀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조 과장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래서 지금 과장급 이상이 이야기하는데 일개 사원이 입 연 게 잘한 일이다? 너 직속 누구야, 아주 팀 단위로 망신을 줘야 정신을…….”

조 과장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서며 이를 드러냈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여수정을 제 등 뒤로 숨겼다. 지난번 조 과장이 손을 들어 올렸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탓이었다. 손을 등 뒤로 뻗어 여수정의 팔을 붙들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진우는 여차하면 제가 대신 맞을 요량으로 조 과장에게 대들려 입을 열었다.

“조 과장님.”

그러나 먼저 말을 끊은 이는 강 과장이었다.

“지금 여수정 씨는 프로젝트 팀의 일원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수정 씨의 직속 상사는 제가 되겠군요.”

“…….”

“그러니 질책할 일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강 과장이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조 과장이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서진우는 여수정의 팔을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잠시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몇몇 사원들의 타자 소리만이 팽팽해진 분위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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