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꼭 도망치는 것 같네. 백의현은 새롭게 빼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멀어지는 서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한 어떤 말이 또 그를 건드렸기에. 백의현은 잠시 눈썹을 찡그린 채 미간을 긁적이다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말실수로 서진우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서진우는 물렁한 것 같아도 경계심이 많고 타인에게 틈을 잘 내어주지 않았다. 조금 전 건넨 사과는 물론 진심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좋은 인상을 남겨 제 편으로 끌어오고자 하는 욕망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래도 서진우가 민망해할 때까지는 나름대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냈던 것 같은데……. 대체 마지막에 보인 그 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구슬릴 때마다 저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백의현은 담배를 맥없이 빨아들였다. 서진우는 평소에는 뿌리가 단단한 나무 같은데, 가끔 종잡을 수 없는 순간 모래성이 되어 허물어지고는 했다.
성가시네.
하다못해 자신이 대체 무슨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라도 알면 좋은데, 백의현으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이 서진우를 건드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백의현은 잠시 짜증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 같은 연기를 뱉으며 담뱃재를 털어 냈다.
뭐, 좋아. 첫술에 배부를 요량으로 다가간 것도 아니었다. 기반을 다지고 상한 뿌리를 잘라 내기 위함이라지만, 그 의도를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이상 좋은 인재를 제 밑에 두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특히 이런 썩어 빠진 회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소수의 인재란 서진우나 강 과장처럼 라인이라고는 질색을 하는 이들뿐이었으니까. 결국 백의현이 의지하고 신뢰해도 좋은 리더임을 증명하는 것은 이번에도 그 자신의 몫이었다.
‘―그래도 매번 상처받은 얼굴을 마주하는 건 나도 좀 곤란한데.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라도 알 수 있다면…….’
짙은 밤하늘 아래 선 백의현이 어쩔 도리 없이 막연한 생각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저벅, 저벅.
조심스러운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백의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배를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느릿한 발걸음의 주인은 썩 달갑지 않은 이일 게 뻔했다.
“……저어, 백 이사님.”
거봐라. 쥐새끼 맞지.
백의현은 일부러 그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백의현이 돌아보지도 않고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만 있노라니, 어둠 속에서 눈치를 보듯 쭈뼛대던 이가 기어코 그림자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 이사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입니까, 하 대리.”
백의현은 눈동자만 굴려 하성민을 곁눈질했다. 생각보다 더 차가운 태도였던 모양인지 움찔한 하성민이 이내 얼굴에 비굴하면서도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한가득 피워 올렸다.
“여기 계신 줄 모르고 왔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린 건데…….”
퍽이나 우연이겠다. 서진우가 돌아오는 걸 보고 부리나케 달려 나왔을 모습이 안 봐도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혹은 먼발치에서 서진우가 떠나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을 터였다.
살가운 인사에도 백의현이 아무 반응이 없자 하성민의 어깨가 점차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안다니 다행이네요.”
백의현은 후, 하고 허공을 향해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하성민의 얼굴이 굳은 것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쥐새끼는 철면피였다. 금세 정신을 추스르고 배알도 없이 해죽 웃은 하성민이 두 손을 모으며 알랑거렸다.
“이렇게 좋은 고기도 사 주셨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드린 게 좀 그래서요.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이사님.”
“그런 인사라면 좋은 기획안을 준비한 서진우 대리에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백의현이 무뚝뚝하게 하성민의 말을 끊었다. 새삼 지난 기획 회의 시간이 떠올랐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홀로 무표정하게 하성민을 쏘아보고 있던 서진우의 독기 어린 얼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퍽 내 마음에 들었거든요.”
“아…….”
일부러 꺼낸 기획 이야기에 하성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도 자신처럼 기획 회의 시간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자신과 달리 하성민에게 그날은 치욕으로 얼룩진 잊고 싶은 기억이겠지만. 하기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부러 면박을 준 건 백의현 자신이었다. 그러니 생각이 안 날 수 없겠지. 백의현은 어쩔 줄 몰라 손가락을 꿈질대면서도 꿋꿋하게 곁을 지키고 선 하성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키가 제법 크고 이목구비도 남자치고는 곱상하다. 확실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상이었다. 기획개발부 내에서의 평가도 제법 괜찮은 편인 젊은 대리, 하성민.
그러나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해도 천성이 게으르고 야비한 놈은 반드시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탐욕으로 번드르르한 얼굴을 보며 빠르게 판단을 마친 백의현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이사님께서 저에 대해 오인하고 계시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그 기획안은…….”
그사이 무슨 변명을 준비했는지 하성민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구부러뜨렸다.
“그 기획안은 저와 서 선배- 아니, 서진우 대리님이 함께 준비했던 안건이었어요. 대표로 제가 발표하기로 부장님과도 이야기를 끝내 놓았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하성민의 음성에는 절절함과 서러움이 적절히 뒤섞여 있었다. 백의현은 터져 나올 뻔한 헛웃음을 내리눌렀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이를 상실한 탓에 안면 근육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함께 기획했다고요.”
백의현이 담뱃재를 힘 있게 툭, 털어 내며 되물었다. 어느새 길었던 담배가 반 토막이 나 있었다. 하성민의 낯빛에 희미한 화색이 돌았다. 제 말이 먹히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백의현은 하성민이 짧은 순간 내보인 자신감을 재빨리 갈무리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언제 밝았냐는 듯 하성민의 얼굴 위로 극적인 비참함이 떠올랐다.
“차마 사수를 그 자리에서 망신시킬 수 없어 제가 한발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이사님도 보셨잖습니까, 제가 먼저 발표했던 거.”
하성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제 양손을 초조하게 맞잡았다.
“서 대리님 지분이 아예 없었다고 말씀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 그렇게 남의 기획서 통째로 훔칠 만큼 나쁜 놈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지금 이 프로젝트 팀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서 대리님이 추천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는데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시면……제 말이 맞죠?”
하성민이 흘끗 눈을 들어 백의현의 안색을 살폈다. 이놈은 회사원이 아니라 배우를 하는 게 나았겠는걸. 백의현은 하성민을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백의현이 회사에 부임한 이후 훑어본 문건은 당연히 서진우의 기획서만이 아니었다. 회사는 기획개발부에서 통과하고 반려한 기획안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의현은 하성민의 기획서 또한 모두 보았고, 잘 알고 있었다.
‘전부 다 베낀 거였지.’
김 부장이 통과시킨 하성민의 기획안은 반려당한 서진우의 기획서를 응용하거나 대놓고 참고한 것들이었다. 이 뻔뻔한 쥐새끼도 설마 그 모든 기획을 서진우와 팀으로 준비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지.
상상해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와 백의현은 눈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여튼 이런 기생충 같은 놈들은 말만 번지르르하다.
느릿하고 단조로운 긍정에 하성민이 슬픈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이해해 주셨다니 기쁘…….”
“서진우 대리도 이 자리에 불러서 삼자대면해 봅시다. 때마침 모여 있으니.”
단호하게 말을 마친 백의현은 방금 전 자신이 한 말이 하성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구경했다. 단숨에 핏기가 가신 하성민의 얼굴이 새하얬다. 백의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왜 이런 머저리들은 꼭 어디서 찍어 만든 것처럼 똑같을까?
‘생각이 짧고 멍청한 주제에 자신이 똑똑한 줄 알지.’
간단한 검증만으로도 쉽게 들킬 거짓말을 스스로 모면할 수 있다고 믿는 점까지, 그야말로 황 사장 판박이였다. 백의현은 들고 있던 꽁초를 쓰레기통 안으로 가볍게 내던졌다.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제대로 소명하고 제 몫을 챙겨 가야죠.”
“……그, 그건…….”
하성민이 주춤거렸다. 백의현은 천천히 눈을 돌렸다.
“아니면 설마, 본인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 볼 얄팍한 거짓말로 나를 속여 보려고 한 겁니까?”
경멸하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자 하성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이제 양손을 깍지 끼워 기도하듯 쥐고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오해…….”
“하성민 대리.”
무거운 목소리로 변명을 가로막자 하성민이 헛숨을 들이켰다. 손등을 짓누른 열 손톱이 긴장으로 희게 질린 것이 보였다. 백의현은 조명 아래로 드러난 하성민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은 뭐 하러 합니까?”
“…….”
“그 기획안이 서진우 대리의 단독 아이디어였다는 건 업무 기록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뚜벅, 백의현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하성민의 얼굴은 이제 얼음물을 끼얹은 듯 희다 붉다 했다. 누가 보면 어마어마한 폭언이라도 들은 줄 알겠네. 백의현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리고 그쪽을 추천한 사람은 서진우 대리가 아닌 김석환 부장입니다. 설마 모르고 말한 건 아니겠지만.”
하성민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어떻게 네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냐는 듯한 그 표정을 마주하며 백의현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냥 살던 대로 살아요. 이미 끝장난 평가 더 악화시키지 말고.”
백의현은 나름대로 해 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 물론 하성민이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으나.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백의현은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버린 하성민을 뒤로하고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쓰레기와 말을 섞은 탓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알코올로 소독해 버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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