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하지만 이런 상황은 확실히 즐겁지 않았다.
“편히 드시죠.”
“……예.”
서진우는 제 맞은편에 앉아 싱긋 웃는 백의현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눈앞에서는 마블링이 살아 있는 생고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익어 가고 있었지만 도통 입맛이 돌질 않았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사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말없이 서서 전문적인 손길로 고기를 구워 준 직원이 물러나자, 옆 테이블에 앉은 팀원들이 요란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서진우는 저들끼리 즐겁게 떠드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좋겠다……. 나도 끼워 줘…….’
사비로는 절대 엄두도 못 내는 비싼 고깃집에서 먹는 밥인데도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서진우는 눈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백의현과 시선을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결국 즐겁지 않은 이유는 자리 문제였다.
‘왜 하필 내 앞에 앉냐고!’
일부러 제일 먼저 들어와서 구석 자리를 골랐는데 이러기냐?! 서진우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부담스러워서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았다.
“어디 안 좋아요?”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진우는 눈을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여수정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서진우가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니, 괜찮아요. 안 좋긴요.”
“그런데 왜 못 먹어요.”
“맞아. 고기 진짜 맛있는데. 지금 안 먹어 두면 한동안 구경도 못 한다.”
걱정하는 여수정의 말에 강 과장도 한마디를 보탰다. 서진우는 억지로 해맑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와아, 잘 먹겠습니다…….”
한입에 들어갈 만큼 적당한 크기로 잘린 고기가 접시 위에 정갈히 놓여 있었다. 내키지 않는 손길로 한 점을 집어 든 서진우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진짜 개맛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맛이었다. 백의현이 차마 말조차 하지 못하고 열심히 고기를 음미하는 서진우를 향해 물었다.
“괜찮죠?”
“네, 진짜 맛있네요…….”
“법인 카드 털어먹기 좋은 식당이죠.”
급기야는 경계하는 것조차 잊은 서진우를 보며 백의현이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하지만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지 않으냐고 하면 서진우도 반박할 말이 있었다. 소고기가 진짜 너무 맛있었던 것이다.
‘이건 최소 투 플러스다……!’
혀끝에서부터 깨어난 오감이 들끓어 오르는 서민의 피에 부채질을 해 댔다. 법인 카드라고 했지. 게다가 전무이사 소유의 법인 카드다. 서진우는 소매를 걷으며 회사 기둥을 파먹을 기세로 전투적인 식사에 임했다. 물론 그렇게 행동한 인물이 서진우 한 명만은 아니었다.
“이사님, 꽃등심 추가로 시켜도 돼요?!”
“채끝도 주문 가능합니까?!”
“마음껏 드세요, 편히 더 시키셔도 괜찮습니다. 술도 모자라면 말씀하시죠.”
백의현이 사원들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직원을 부르는 손이 번쩍번쩍 들렸다. 서진우는 잘 구워진 소고기를 음미하며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고기 진짜 맛있다…….”
“말했지? 팍팍 먹어 두라니까. 가격 보면 턱 떨어진다.”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강 과장이 낄낄 웃었다. 서진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제대로 삥 뜯어야겠습니다.”
서진우의 선언에 강 과장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회사 삥 뜯는대. 너무 웃기다, 그쵸.”
강 과장이 옆자리에 앉은 백의현에게 말하며 다시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삥 뜯기는 주체인 백의현이 눈가를 접어 미소 지었다.
“제 연봉은 넘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어머, 이사님. 벌써 약한 말씀 하시는 거예요? 하하.”
젊은 전무이사의 너스레가 반갑다는 듯 강 과장이 눈을 반짝였다. 서진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점차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백의현이 껄끄럽고 멀게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죽기 전부터 품고 있던 괜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서진우가 내심 제 비굴함에 멋쩍어하고 있을 때였다.
“두 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백의현이 강 과장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우며 불쑥 말했다.
“아, 네. 이 녀석이 제 부사수였거든요.”
이사님도 한 잔 받으시죠. 강 과장이 자연스럽게 백의현에게서 술병을 받아 들었다. 서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님께 많이 배웠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습니다.”
“나야말로 성실한 부사수 만나서 꿀 좀 빨았지.”
강 과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쑥스러워진 서진우는 괜스레 여수정에게 집게를 빼앗아 들고 부산스럽게 빈 불판 위에 새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하고 지글거리며 군침이 도는 소리가 났다. 백의현이 소주잔을 홀짝였다.
“부럽네요. 두 분 관계. 저는 친한 동료들이 다 미국 지사에 있어서.”
“그러고 보니 이사님도 해외 지사 출신이셨죠.”
“예. 강 과장님은 해외 지사 출신은 아니지만, 일 년간 동남아시아 지사 쪽에 계셨으니 이해하시겠죠.”
백의현이 부드럽게 강 과장을 돌아보았다. 강 과장이 백의현을 따라 제 몫의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무래도 본사가 좋다고는 하지만 해외 지사도 열심히 일하는 사원들이 많으니까요. 본사로 끌고 오고 싶은 친구들도 있고,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그렇죠.”
“동남아시아 지사는 생긴 지 이제 이 년 차던가요. 그쪽 분위기는 좀 어떻습니까? 저도 원료 수급 관련으로 한 번 방문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좀 어수선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시다시피 지금은 꽤 좋아졌어요. 베트남이나 태국과도 새로운 거래를 많이 텄고요. 처음에야 좌천된 사람들의 무덤 같은 취급이었지만, 사실 거기 모인 사람들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강 과장이 비워 낸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조소했다.
“―아,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서진우는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빈 잔을 채워 주며 강 과장의 눈치를 보았다. 기실 전무이사인 백의현이나 타 부서의 일원인 여수정 앞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 과장도 내심 제가 겪어야 했던 일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호선을 그리는 입매와는 달리 강 과장의 눈은 웃음기 없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머리가 썩으면 아무리 손발이 발버둥을 쳐도 몸통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이죠.”
백의현이 심상하게 대꾸했다. 직원의 과감한 빈정거림에도 놀란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더한 폭탄 발언을 던진 그는 주변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양 술잔을 들어 올려 훌쩍 들이켰다.
“…….”
테이블 위로 짧은 침묵이 일었다. 그사이 손목을 가볍게 꺾어 퍽 우아하게 술잔을 비워 낸 백의현이 소리 없이 잔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서진우는 입을 다문 채 놀란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아무리 회식이라지만 임원과 직원 사이인데 나누는 대화에 허물이 좀…… 지나치게 없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수정 또한 이 분위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굳은 모습이었다. 두 팀원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문 사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응시하며 침묵하던 강 과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어딘가에 휩쓸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거죠. 성실함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감정이 서려 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사무적이면서도 정중한 말투였다. 백의현이 눈을 들어 올렸다. 서진우는 다시 자신을 향한 시선을 마주하고 움찔, 어깨를 굳혔다. 백의현은 서진우를 보며 눈매를 희미하게 좁혔다.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으시군요. 강 과장님도.”
비웃는 듯한 얼굴.
서진우는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강 과장은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진우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술잔을 더듬었다. 옆에서 초조해하는 여수정의 기색이 보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졌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모두 긴장 중이었다. 대화 중인 단 두 명만 제외한다면.
백의현은 이제 더는 서진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홀로 느긋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강 과장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서진우는 불현듯 울컥했다. 무의미하고 피곤하기만 한 정치 싸움에 끼지 않고 묵묵히 일만 열심히 한 건 강 과장이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회사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천천히 강 과장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진우는 강 과장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 과장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상사라 한들 언어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는 순진한 면이 있어야 버틸 수 있거든요.”
그러나 강 과장은 의외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분한 대답에 백의현이 조금 놀란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서진우는 그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길쭉한 검지 끝에 맺힌 듯 자리한 손톱이 불빛을 받아 희었다.
저런 우아한 몸짓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을 비웃다니.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어머, 서 대리. 고기 탄다, 타!”
불현듯 강 과장이 소리쳤다. 서진우는 화들짝 놀라 눈을 내렸다. 화로에 놓여 있던 고기가 지글거림을 멈추고 소리 없이 익어 가고 있었다. 서진우는 당황해 눈앞에 놓여 있던 고기를 접시 위로 건져 냈지만 이미 늦었다.
“죄송합니다.”
“에이, 새로 시키면 되지. 그래도 되죠, 이사님?”
“물론입니다.”
풀이 죽은 서진우를 위로하며 강 과장이 백의현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분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수더분한 태도였다. 서진우는 마찬가지로 여상히 대꾸하는 백의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까맣게 탄 고기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불타올랐던 식욕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요.”
“어어, 그래. 여기요, 판 좀 갈아 주세요.”
서진우는 고기를 더 주문하려 손을 드는 강 과장과 여수정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맥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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