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9월
9월 2일 목요일.
강 과장이 돌아오는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과장님.”
“어머, 무슨 꽃다발을 다 준비했어.”
제 명패가 걸린 데스크에 가방을 내려놓던 강 과장이 환히 웃으며 서진우가 건넨 작은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서진우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빈손으로 인사드리긴 좀 뭐해서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에서 급하게 사 온 거예요.”
“그랬어? 어쩐지 크기가 작더라. 하긴, 큰 거였으면 사람들이 오해할 뻔했다. 그치?”
강 과장이 타박을 놓으면서도 기분 좋은 얼굴로 꽃다발을 파티션 앞에 조심스럽게 세워 두었다.
“다른 팀원들은?”
“사 번 회의실에 이미 모여 있어요.”
“그래? 다들 기합이 제대로 들어갔나 보네. 나도 빨리 부장님께 인사만 드리고 가 봐야겠다.”
“부장님 지금 안 계세요. 점심시간에 최 이사님 모시고 거래처에 다녀온다고 하시던데요.”
서진우가 과장의 뒤를 따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일 최 이사를 ‘모시고’ 어디 접대를 하러 간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대던 김 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대낮부터 어디 술집에서 떵떵대고 있지 않을까. 추잡한 짓거리나 안 하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서진우의 말에 강 과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알 만하다.”
“하하.”
서진우가 눈을 굴리며 웃었다. 강 과장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래도 그 얼굴 먼저 안 봐서 다행이긴 하네. 우리도 가자, 회의실.”
역시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서진우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 보이자, 강 과장이 자신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멋쩍어했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출근하는 거 안 힘드세요? 이번 주는 좀 쉬셔도 괜찮았을 텐데. 연차도 거의 안 쓰셨잖아요.”
다들 업무에 들어간 탓인지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진우는 강 과장과 나란히 걸어 회의실로 이동했다. 강 과장은 새벽 내내 비행기를 탄 사람답지 않게 씩씩했다.
“됐어. 연차, 그거도 다 돈이야. 결혼 자금 메우려면 한 푼도 아까운 법이다? 오전 반차도 얼마나 아까웠는데.”
“회사도 너무해요. 어차피 출근길인데 오전 정도는 업무 시간으로 처리해 주지. 남편분은 서운해하지 않으세요?”
“이만큼 커도 아직 껌 파는 마인드인 회사에 큰 기대 없다. 남편이야 뭐, 어제 인천 공항 떨어지자마자 저녁 먹고 드라이브했으니 됐어.”
강 과장이 흘러내린 잔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러나 무뚝뚝한 말투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서진우는 강 과장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곧장 출장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서진우의 안쓰러워하는 시선을 발견한 강 과장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어차피 집에 있어 봐야 남편도 회사 출근해서 혼자 시간이나 죽였을 텐데, 뭐 하러 그래. 괜히 일이나 밀리지. ……그리고 서 대리가 한국으로 불러 준 덕분에 이제라도 못다 한 신혼 생활 할 수 있게 됐잖아. 난 그거면 정말 만족해.”
“……과장님.”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알지?”
강 과장이 가볍게 손등으로 서진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진우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일을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언제든 도망갈 곳을 만들어 두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는데도 여러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게 어쩐지 열없었다.
“아, 여기지? 사 번 회의실.”
서진우의 민망해하는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구경하던 상사가 회의실 앞에 걸린 대여 카드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강 과장과 서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하성민과 여수정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 과장이 손을 내저으며 상석으로 향했다.
“뭘 일어서고 그래. 다들 앉아요. 점심은 맛있는 거 들었어요?”
서진우는 인사를 나누는 강 과장의 옆, 빈자리에 앉았다. 오전부터 회의실에 붙박여 일을 하고 있었던 터라 커버가 열린 노트북이 이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강 과장은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밝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기획개발부에서 과장직을 맡고 있는 강원채라고 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내 얼굴을 처음 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내가 어제까지 캄보디아에서 일 년간 장기 출장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아는 얼굴도 제법 있네요. 다들 일어나서 인사 한 번씩 할까요?”
강 과장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둘러앉은 이들을 면면이 둘러보았다. 서진우는 하성민이 강 과장을 향해 매력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속으로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
“안녕하세요, 연구부 소속 김기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케팅부 여수정입니다.”
커다란 몸집과는 달리 순해 보이는 연구부 김기호, 작지만 엄격해 보이는 여수정, 하성민과 막내 사원 임상하까지 인사를 마치자 서진우의 차례가 왔다. 서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였다.
“기획개발부 서진우 대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기획 총괄 보조를 맡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일하면서 서로서로 안면은 다 튼 사이인데 새삼스레 포부라든가 하는 거창한 말을 덧붙이는 것도 어색했다. 서진우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강 과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이미 아시다시피, 이 프로젝트 기획안은 이 자리에 있는 서진우 대리의 아이디어입니다.”
갑작스럽게 덧붙인 설명에 서진우가 놀라 강 과장을 돌아보았다. 강 과장은 웃으며 다른 이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 역할은 팀장으로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것이지만, 제품 관련 궁금한 점이나 의견이 있다면 반드시 서 대리와도 공유하도록 하세요. 내가 부재할 경우 서 대리가 나를 대신해서 여러분을 도울 겁니다.”
강 과장의 말은 사실 적시에 가까웠지만 서진우에게는 낯선 공치사이기도 했다. 모든 팀원의 시선이 제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서진우는 귓불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생을 거슬러 돌아온 이래 싫어하는 상대에게는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었는데, 어째서 자신을 높이는 이야기는 이토록 부끄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서진우가 어색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어영부영 자리에 앉자 강 과장이 싱긋 웃었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하죠. 샘플은 어떻게 준비 중인가요?”
비록 캄보디아에 있을 때부터 화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현장감이란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여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테마, 타깃 등에 관해 토론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일단 미팅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샘플이 나오면 다시 모입시다. 그 전까지 김기호 씨는 샘플별 원료 시트에 정리해서 보내 주고, 하성민 씨는―.”
강 과장이 제 앞자리에 어지러이 널린 서류들을 모아 정리하며 마무리 지시를 내릴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 어머.”
고개를 든 강 과장이 말끝을 흐리며 입을 벌렸다. 언제 온 건지, 슈트 차림의 훤칠한 사내가 문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백 이사님?”
서진우가 놀라 눈을 둥글게 떴다. 백의현이 눈가를 접어 웃어 보였다.
“제가 회의를 방해했습니까?”
“아뇨, 막 끝났습니다. ……김 부장님도 오셨네요.”
서진우의 말로 백의현을 알아본 강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다 멈칫했다. 김 부장이 헛기침하며 백의현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으흠, 거 다들 일 잘하고 있는지 보러 왔네. 강 과장, 오랜만이야.”
김 부장이 뒷짐을 지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나 멀쑥한 백의현의 옆에 선 채 가슴을 부풀린 김 부장은 학 옆에서 다리를 뽐내는 닭처럼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김 부장님이 회의실에 가 본다고 하셔서 저도 따라왔습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백의현이 자연스럽게 강 과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사람을 관찰하거나 계산하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가 부드러운 웃음에 녹아 사라져, 그는 무척 친절한 상사처럼 보였다. 서진우는 강 과장과 악수를 하는 백의현을 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천차만별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래도 백의현의 방문은 퍽 반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부장을 따라왔다는데 누가 싫다고 할까. 서진우는 오히려 내심 백의현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마음껏 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된 김 부장은 잔뜩 심통이 난 것 같았지만.
“아닙니다, 이사님께서 오고 싶으시면 언제든 편히 오실 수 있죠. 프로젝트도 시원시원하게 밀어주시는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강원채 과장님, 맞으시죠? 서진우 대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백의현 이사님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웠는데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려요.”
강 과장과 백의현이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김 부장은 좀팽이처럼 입술을 두껍게 부풀린 채 젊은 임원을 흘겨보기에 바빴다. 서진우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견제에만 바쁜 김 부장을 한심해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았다. 만일 김 부장 혼자 왔다면 사무실에는 에어컨 없이도 냉기가 흘렀을 텐데, 본인만 그걸 몰랐다.
“흠흠, 백 이사님. 이제 곧 퇴근 시간이니 슬슬 올라가심이…….”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순서를 기다리다 지친 김 부장이 백의현을 내보내기 위해 공손한 척 끼어들었다. 그제야 손목시계를 확인한 백의현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진우는 입술 속 연한 살을 깨물었다. 이제 백 이사가 떠나가면 김 부장이 무슨 개소리를 할까. 팀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다들 저녁에 일정 없으시면 강 과장님 귀국 기념으로 회식이라도 합시다. 마침 목요일이니, 날도 좋군요.”
별안간 백의현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갑자기 회식이요? 강 과장에 김 부장까지 놀라 백의현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백의현이 쐐기를 박듯 말을 덧붙였다.
“뭐든 비싼 거로, 제가 사겠습니다.”
뭐・든・비・싼・거?
파격적인 제안에 젊은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차피 해야 할 회식이라면 호화로운 회식이 좋은 게 당연했다.
서진우는 백의현의 등 뒤에서 분노와 당혹으로 빨개졌다가 파래지길 반복하는 김 부장의 얼굴색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안 되지, 안 돼. 여기서 괜히 웃어서 김 부장에게 화풀이할 빌미를 줄 수는 없었다. 애써 입술을 깨물고 눈을 돌린 서진우는 언제부턴가 그를 보고 있던 백의현과 눈이 마주쳤다.
“소고기 좋아합니까, 서진우 대리?”
서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백의현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고여 있었다. 마치 네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미소에 서진우도 어쩔 수 없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럼 오늘 저녁 회식 메뉴는 소고기네.”
강 과장이 호쾌하게 말하며 가방을 챙겨 들자 팀원들이 환호하며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백의현이 빙긋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사무실 본인 자리 정리하고 플로어에서 모이는 거로 하죠.”
“넵,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
갑작스레 축제 분위기가 된 까닭에 결국 김 부장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래 봐야 딱히 할 말도 없이 거드름이나 피웠을 텐데, 그걸 가로막혔다고 붉으락푸르락하는 꼴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제 가방을 챙겨 회의실을 나서던 서진우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강 과장과 눈을 마주치고 슬며시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김 부장이 엿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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