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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7화 (17/150)

17화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툭, 툭. 길고도 굵직한 검지가 느리게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불규칙한 탁음이 음악을 연주하듯 리드미컬했다. 비서 송재희는 서류철을 양손으로 들고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프로젝트 팀 인원 선정 관계로 불거진 이슈인지라 당분간은 그 여파가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말다툼 과정에서 마케팅부 조윤기 과장이 서진우 대리에게 사생활로 모욕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군요.”

송재희의 말에 백의현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생활 뭐. 강원채 과장한테 장미꽃 들고 고백했다가 거하게 차인 이야기?”

그 일은 비밀조차 아닐 정도로 공공연히 회자되는 사건이었다. 그런 걸로 사생활 모욕이라니, 새삼스레 우습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백의현이야 삼 년 전에는 회사에 없었으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기획부와 개발부가 분리된 부서이던 시절, 기획부 소속이던 조윤기 대리는 후임인 강원채에게 빠져 그를 일방적으로 졸졸 쫓아다니다 못해 공개 고백을 기획했다. 그는 과감하게도 퇴근 시간에 전 사원이 볼 수 있는 일 층 로비에서 강원채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큰 소리로 저와 사귀어 달라고 외쳤다. 그 사건은 여전히 사내 사건 사고 베스트를 꼽으라면 항상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그때 강원채의 말이 가관이었다지. ‘그간의 행태를 사내 성희롱으로 인사팀에 고발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했다나? 그날 이후로 조 과장은 강 과장을 노골적으로 피해 다녔다고 들었다. 김 부장에게 강원채를 동남아 발령시켜 달라고 조른 게 그놈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니, 알 만도 했다.

백의현이 낮게 조소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조정 위원회까지 갈 일은 없겠군.”

“네. 다행히 그쪽도 상황을 대충 무마시키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아직 정신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다면, 조윤기 과장도 이 일을 키우는 게 오히려 제 이미지만 깎아 먹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네. 다만…….”

송재희가 잠시 고민하듯 말끝을 흐렸다. 백의현은 눈동자를 굴려 제 곁에 선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을 고르려던 양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이내 한숨이 섞인 보고를 이었다.

“아무래도 서진우 대리가 미친 게 아니냐는 말이…… 돌더군요.”

“뭐? 왜?”

백의현의 입에서 다시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표정에 선명한 몰이해가 담겨 있다. 송재희는 다시금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서로 자주 협업한다 하더라도 엄연히 타 부서 소속인 대리가 과장을 들이받는 일이 제정신으로 할 만한 짓이 아니라는 걸 눈앞의 상사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그게, 서 대리가 얼마 전까지는 조용히 일만 하는 이미지였다 보니.”

아니, 애초에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할까. 만일 송재희가 곧이곧대로 설명한다면 백의현은 그게 뭐가 문제냐 되묻겠지. 그럼 할 말도 참고 살란 말이냐, 어쩌고 하며. 그래서 송재희는 다른 방향으로 설명을 우회했다.

“하긴, 그런 일을 겪었으니 참다 참다 터지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경우는 선을 넘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백의현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사원이지만 사내 평가까지 얼버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송재희가 어렵사리 말을 끝맺자,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도 멎었다.

“남의 기획서를 가로채서 뻔뻔하게 자기 것처럼 발표한 후임도 아무 징계 없이 넘어갔는데 사내에서 말다툼 좀 했다고 미쳤다는 말까지 듣는다고.”

백의현이 허공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진우 대리 입지도 알 만하군.”

차가운 음성이 칼처럼 날카로웠다. 백의현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 무표정했다.

“―저, 그리고 보고드릴 일이 또 있습니다만.”

송재희가 속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상사는 젊었지만 날카롭고 묵직했다. 그가 이토록 냉랭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송재희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백의현에게는 사내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보다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 분명한 내용이었다.

“신규 공장 부지가 정읍으로 최종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예. 며칠 전 황치택 사장 부부가 한국당 김혁운 의원과 청담동에서 약 두어 시간가량 저녁 식사를 했다는 보고도 접수했습니다.”

“그렇군. 정읍이라…….”

백의현이 여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일자로 굳어 있던 눈썹이 슬쩍 위로 솟았다. 송재희는 백의현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관찰했다. 정읍에는 황치택의 배우자이자 신정제당 회장의 딸인 김수정이 차명으로 소유 중인 천여 평의 대지가 있었다.

“이제 아주 노골적으로 처가에 금고를 뚫어 두겠다는 속셈인가 보군.”

그가 다시금 검지로 팔걸이를 느리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하나뿐인 아들자식에게 후계자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야.”

백의현이 여러 그래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송재희는 백의현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듣기엔 즐거워 보이는 음성이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수고했어, 송 실장. 이만 나가 봐도 좋아. 아, 그리고 황상준이 최근 어디 주식 건드리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고.”

잠시 고요에 잠겨 있던 백의현이 컴퓨터 가까이로 의자를 당기며 말했다. 송재희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백의현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도 한참 팔걸이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뿌리가 건실한 나무라 한들 썩은 기둥이 받치고 있는 한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나무가 계속 살기 위해서는 기둥이 완전히 부스러지기 전 썩은 부위를 제거하고 새로운 바람을 들여야 한다.

“무능함 때문에 썩어 들어간 자리에 새로운 무능력자가 들어와 봤자지.”

심지어는 자신이 들어앉기 위해 멀쩡한 뿌리를 잘라 냈다면 더더욱 뽑아내야 한다. 백의현은 문득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처음 전무이사로 발령받았을 때, 황치택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더랬다. 그 정도 기억력으로 사장은 무슨 사장. 절로 비웃음이 샜다. 백의현은 습관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전면 창 너머 맑은 하늘이 쏟아지듯 백의현을 감쌌다.

누군가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푸른 하늘. 그러나 그 넓은 하늘을 품에 안은 채 올려다보는 백의현의 표정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숨이 막히는군…….”

탄식 같은 혼잣말이 잇새로 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바다를 닮은 탓에 백의현은 제 사무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한쪽 벽면이 썩어 들어가는 낡은 오두막 한구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검고 푸른 빛무리와 코끝을 찌르는 역겨운 냄새.

이 모든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복수가 필요했다.

백의현은 황 회장이 왜 돌아보지도 않던 자신을 굳이 이 자리까지 끌어올렸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정통 후계자를 위해 대신 방패막이가 되어 썩어 빠진 기둥을 도려내는 것. 그 의무를 다하고 나면 백의현도 결국은 자신을 붙드는 기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끌어내려야 해.’

백의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안타깝게도 그 모든 일은 혼자서는 해낼 수가 없었다.

경영에서든, 실무에서든 이미 깊이 자리해 버린 썩은 부위를 잘라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면의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회사의 괜찮은 인재들은 이미 모두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중얼거린 백의현이 입가에 희미한 호를 그렸다. 멍하니 앉아 하늘만 올려다보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표정을 가라앉힌 채, 그러나 눈빛만은 분노로 형형했던 젊은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따위 썩어 빠진 집단에 절대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양 도전적이던 시선. 그 순간 청년은 주변의 어떤 이들보다도 크고 단단한 나무처럼 보였다.

“―꼭 내 편으로 끌어 오고 싶은데.”

붉고 두툼한 혀가 마른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백의현이 입맛을 다시며 눈을 접었다. 그의 손이 데스크 한 귀퉁이에 놓여 있던 접힌 서류로 향했다. 각을 맞춰 두 번 접은, 흰 봉투 속에 가지런히 들어 있었을 그 문서는 김 부장에게서 손수 빼앗아 온 서진우의 사직서였다.

그래, 문제는 이것이다. 괜찮은 인재들은 이미 썩어 빠진 회사를 견디지 못하고 떠날 준비를 한다는 점.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을 요청합니다. ―서진우.

사직서에는 무척 고리타분한 문장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묻어난 부분 없는 깔끔한 문서. 그럼에도 왜인지, 백의현은 서진우가 이를 악물고 글자 한 자 한 자에 힘을 실어 타자를 치는 모습을 쉬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기획서를 제출해 놓고 퇴사를 하려 한단 말이지…….”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점차 사그라졌다. 백의현은 입가를 매만지며 사직서를 내려다보았다. 사직서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손안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서 대리가 얼마 전까지는 조용히 일만 하는 이미지였다 보니.’

송재희가 전해 온 서진우에 대한 사내 평가가 새삼 마음에 걸렸다. 백의현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일만 하는 서진우가 어느 시절을 의미하는지 백의현도 잘 알고 있었다. 잔뜩 주눅 들어 사람과 눈도 잘 못 마주치던,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컴퓨터 앞만 지키고 앉아 있던 무능력한 대리.

그러나 백의현이 알던 서진우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알던 서진우는 할 말은 참지 않는, 제 의견을 내는 데에 당당했던 지금 모습과 더욱 가까웠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 큰 선배들 사이에서도 지지 않고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적극적으로 논쟁에 참여하던 열정적인 신입생.

그랬던 구 년 전의 서진우가 어쩌다 이런 평가를 받는 사회인이 되었을까.

“무슨 일이 제대로 있긴 있었나 보군.”

백의현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손에 든 사직서가 어쩐지 돌처럼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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