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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6화 (16/150)

16화

여수정의 눈매가 다시 매서워졌고, 서진우가 쥐고 있던 주먹 위로 핏줄이 섰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여수정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조 과장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이쿠, 비밀 연애였나? 내가 몰라줘서 미안하네.”

그가 작은 눈을 실처럼 좁혔다. 안 그래도 쥐 같은 얼굴상에 눈까지 사라지자 조 과장은 지금까지 중 가장 비열해 보였다.

“어째 이상하더라니. 기획부에 있어야 할 서 대리가 갑자기 여수정 씨 일에 막 끼어드는 게 말이야. 아니, 자네도 원래 이런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지 않았나?”

조 과장이 실실 웃으며 여수정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나저나 서 대리도 참 취향 독특해. 여수정 씨 같은 목석같은 여자 어디가 좋다고―.”

이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선을 넘다 못해 브레이크까지 박살을 냈나.

“과장님은 여사원을 보면 성적인 생각만 하십니까?”

개 같아서 못 해 먹겠다. 이딴 더러운 회사, 퇴사하고 말지.

아까는 농담이었다면 지금은 진심이었다. 천만 원이 큰돈이긴 했지만 모욕까지 견뎌야 할 정도의 돈은 아니었다. 백 이사와 강 과장에게는 미안하지만 서진우는 이제 자잘한 굴욕을 참아 가며 버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뭐, 뭐?”

조 과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진우는 조 과장이 다시 언성을 높이기 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그렇잖습니까. 여수정 씨 업무 능력을 기대했다고 추천했다고 말씀드렸을 뿐인데, 사귄다는 결론이 왜 나옵니까?”

“―이, 이…….”

“아, 하긴. 그래서 예전에 강 과장님께 고백하셨던 건가.”

“!”

쫑긋, 사람들의 귀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야 흥미로운 일이겠지, 삼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조 과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봐, 서 대리. 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업무 시간에!”

“네? 아, 업무 시간에는 조 과장님께서 대리이시던 시절 후임이던 강 과장님께 일 층 로비에서 공개 고백을 했다가 차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되었던가요?”

“서, 서 대리!”

조 과장이 이제는 붉다 못해 검어진 얼굴로 빽 소리를 쳤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 과장은 씩씩대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진우는 문득 조 과장이 굉장히 마르고 볼품없는 생김새라고 생각했다.

‘항상 나보다 키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어리둥절해하던 서진우는 불현듯 자신이 허리를 펴고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항상 주눅이 들어 있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터라 모든 이들이 실제보다 커 보였던 것은 아닐까? 새삼스러운 깨달음 탓에 허탈한 웃음이 샜다.

“너 지금 웃어?”

모멸감과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을 바꿔 대던 조 과장이 욱 소리를 쳤다. 서진우는 재빨리 표정을 고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조 과장님의 오해와는 달리 저는 여수정 씨를 회사 동료로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수정 씨가 맡고 있는 중대한 업무 탓에 프로젝트 팀 합류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최종 인선 발표 전 강 과장님께 상황을 전달해야 하니 지금이라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지금 바로 전달이 어려우시면 목요일까지 메일로 공유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 중에는 결과를 올려야 해서요.”

등 뒤에서 여수정의 시선이 느껴졌다. 서진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조 과장만을 응시했다. 조 과장은 분함에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아무 대꾸도 못 하는 것을 보니 댈 핑계가 없는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마케팅부의 로봇 사원이라는 별명을 달고 사는 여수정이다. 성격이 무뚝뚝한 탓이기도 했지만, 그 별명이 붙은 진짜 이유는 그가 일을 허투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수정이 참여하는 메인 프로젝트가 없다는 건 누군가가 그를 고의로 업무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조 과장일 거고.’

역겨울 정도로 익숙한 패턴이었다. 자신보다 일을 잘하지만 제 마음에 들게는 행동하지 않는 이를 찍어 누르는 일과 그 방식조차도.

그도 김 부장으로부터 뻗어 나온 썩은 줄기 중 한 명인 것이다.

“따로 메일 주시는 게 없다면 여수정 씨는 다음 주부터 다른 업무를 받을 수도 있겠네요.”

서진우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어투로 말을 끝맺었다. 아직 결과 발표 전이기에 대놓고 여수정이 인선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힌트를 다 준 셈이었다.

“……여수정 씨, 그동안 맡았던 일 결과 보고서와 인수인계서 정리해서 이번 주 중으로 보내.”

끝내 책을 잡아내지 못한 조 과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매서운 시선은 여전히 서진우에게 고정한 채였다. 그러나 여수정이 특유의 무심한 어투로 “알겠습니다.” 하자 조 과장은 기어코 원한 어린 눈빛을 여수정에게도 쏘아 댔다.

“하……, 기획개발부 서진우 대리. 언제부터 이렇게 용감했는지 모르겠네.”

조 과장이 단어를 하나하나 짓씹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서진우는 대답 없이 조 과장을 마주 보았다. 조 과장은 무언가를 더 말하는 대신 천천히 서진우를 스치듯 가까이 다가가 섰다.

“백의현 이사를 등에 업으니 무서울 게 없는 모양이야.”

그가 서진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굴러 서진우를 향했다.

“자네는 그 인맥이 뭐 엄청나게 대단한 줄 착각하나 본데……백 이사 그 애송이 별거 아니야. 당장 다음 분기에도 갈아 치워질 수 있는 놈이라고.”

‘그 애송이’. 서진우는 자신의 뺨을 날카롭게 찌르는 번들거리는 시선을 느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조언 감사합니다. 이사님께 그 말씀 꼭 전해 드리죠.”

잇새로 절로 조소가 샜다. 조 과장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제 그의 표정은 구겨진 휴지 같았다. 서진우는 등 뒤로 화풀이하듯 쿵쿵대며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조 과장이 사무실을 나간 것일까, 고요했던 사무실이 어느새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서진우는 잠시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침착한 척했지만 긴장하고 있던 탓에 몸이 떨렸다.

‘일단은…… 돌아갈까.’

이렇게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굴어 본 적은 처음이라 그런지 영 현실감이 없었다. 서진우가 뒤늦게 걸음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서진우 대리님.”

무뚝뚝하면서도 명료한 음성이 서진우를 불러 세웠다. 서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아, 여수정 씨.”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여수정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서진우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뭐지,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은데…….

“왜 그랬어요?”

앞서 걷는 내내 아무 말 없던 여수정은 비상구 계단 중앙에 올라서서야 겨우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서진우는 잔뜩 굳은 채 몇 계단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수정을 얼떨떨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랬냐고요.”

“……혹시 화났어요?”

서진우의 말에 여수정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두꺼운 안경이 찌푸린 눈썹과 굳어진 입가까지 가려 주지는 못한 까닭에, 서진우는 여수정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주제넘게 나섰다면 미안합니다.”

주눅이 든 서진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상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여수정의 신세가 과거의 자신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이 일에 끼어든 이유는 여수정을 향한 선의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 나는 부서가 다른데, 수정 씨의 상사와 큰소리 내며 싸우기까지 했으니…….’

충분히 여수정 씨가 화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꾸만 목이 움츠러들었다.

시무룩해진 서진우를 응시하던 여수정이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제 안경을 벗었다.

“그냥 한 대 맞고 그 개새끼 고소하려고 했는데.”

“……예?”

거친 욕설에 놀란 서진우가 입을 멍청히 벌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수정은 어느새 주머니에서 안경 닦이를 꺼내 안경알을 닦고 있었다. 도수가 높은 탓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는 눈이 크고 동그란 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표정이 험악해 보이는 까닭은 잔뜩 찡그린 눈썹 때문이었다.

“조 과장, 그 새끼는 사회에 있으면 안 돼요. 하여튼 여자만 보면 열등감에 미쳐 가지고, 조 과장이 저 지랄을 하는 건 하도 예사라서. 이번 기회에 아예 잘리는 꼴 좀 보려고 했는데.”

스윽, 스윽. 안경알을 깨끗하게 닦은 여수정이 안경을 고쳐 쓰고 새침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급작스러운 욕설 폭탄에 서진우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 그랬다가 여수정 씨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으면요.”

“그럼 그냥 퇴사하는 거죠, 뭐.”

여수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굴렸다.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서진우는 불현듯 과거에 여수정이 김 부장에게 핏대까지 세워 가며 소리를 지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과연, 얌전하고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던 여수정이 어떻게 그토록 과감하게 상사를 들이받을 수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수정 씨는.”

진심이 담긴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만일 이곳이 비상계단이 아닌 객석이었다면 서진우는 아낌없이 기립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수정은 과거에 서진우가 그토록 되고 싶어 하던 이상향이었다. 불의를 참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자존감이 높기까지 한 사람.

서진우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다면 그날 죽지 않아도 되었을까.

“무슨 말이에요. 조 과장을 시원하게 흠씬 두들겨 준 사람이.”

여수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다지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서진우는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그냥……. 수정 씨가 남 같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여수정이 왜 조 과장의 핍박에도 부서에서 겉돌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진우에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싸늘한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부당한 대우를 전시당하는 여수정의 처지가 도무지 남 같지 않았다.

정작 여수정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왜인지 눈을 들 수가 없었다. 서진우는 괜스레 계단 난간을 만지작댔다. 햇살이 들지 않는 탓인지 철제 난간이 싸늘했다.

“……누군가는 저와 서 대리님 관계를 오해할지도 몰라요.”

잠시 침묵하던 여수정이 중얼거렸다. 서진우는 눈을 들었다. 여수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진우가 난간에 어정쩡하게 기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미안합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고마워요.”

불쑥 여수정이 건넨 인사에 서진우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꼼짝없이 사과해야 한다고만 생각했기에, 기대조차 않았던 인사가 되돌아오자 머리가 멍해졌다.

“조 과장이 저 지랄을 하는 동안 대놓고 도와준 사람은 대리님뿐이었어요.”

여수정이 찬찬히 말을 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불안해 보이기도, 쑥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움직임이었다.

“저야 그런 말에 상처 같은 거 안 받고, 다른 사람들도 찍히면 곤란할 거 아니까 아무도 안 나서 줘도 괜찮았어요.”

“…….”

“……그렇다고 지금까지는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여수정이 눈을 들어 올렸다. 서진우는 여수정이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누군가 나서 주니 기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서 대리님.”

여수정이 웃고 있었다. 만면에 가득 번진 웃음은 아니었지만, 쑥스러운 듯 솟은 입꼬리는 명백한 미소였다. 서진우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벌린 사이, 계단을 내려온 여수정이 그의 앞에 섰다.

“만약에 소문이 잘못 나면 제가 책임지고 잠재울게요.”

그렇게 말하며 손등으로 툭, 서진우의 어깨를 두드린 여수정이 이내 걱정스럽다는 듯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그런데 아까 조 과장이 뭐라고 한 소리 하는 것 같던데, 대리님은 괜찮겠어요? 괜히 저 때문에…….”

“아, 뭐 그건 괜찮아요. 제가 같은 팀도 아닌걸요.”

서진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여수정을 따라 걸음을 돌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덕분일까 기분이 퍽 괜찮았다. 서진우는 비상계단 문을 열며 여수정을 향해 씩 웃었다.

“그리고 정 견디기 힘들면 그냥 퇴사하면 되죠, 뭐.”

서진우의 농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여수정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서 대리님 이런 분인 줄 몰랐네요. 예전에는 좀 더…….”

“소심해 보였죠?”

웃으며 말하던 여수정이 아차, 하고 입을 다물자 서진우가 미소 지으며 말꼬리를 이어 받았다. 여수정이 눈치를 보며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죄송해요.”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뭐.”

서진우가 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삶의 선택지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 그 사실을 새삼 자각하니 고양감이 일었다. 여수정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서진우는 오래간만에 회사 생활이 정말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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