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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5화 (15/150)

15화

드르륵, 쿵. 회의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홀로 남은 하성민의 표정이 언제 다채로웠냐는 듯 무표정해졌다.

“하, 씨발…….”

잠시 자리에 멈춰 서 있던 그가 회의실 테이블에 기댄 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욕설을 뇌까렸다. 손샅 너머로 보이는 시선이 차가웠다.

서진우는 부지런하고 착한 선임이었다. 처음 부사수로 배정을 받고 인사를 나눴을 때부터 하성민은 서진우가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호구 잡기 딱 좋은 게이 새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힘없고 왜소한 사내는 보통 잘난 외모를 가진 남자를 마주하면 열등감 때문에 비뚤어지기 마련인데, 서진우는 제게 열등감을 갖지도 않았다. 이런 사내는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상대가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집이 부유한 경우이고,

또 하나는 동성애자인 경우였다.

하성민은 천부적으로 타인의 호감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진우처럼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하성민은 돈도 배알도 없는 데다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서진우를 능숙하게 조종해 가며 김석환 부장이라는 적절한 끈까지 찾아냈다. 이제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적당히 남의 비위만 잘 맞추면 됐다. 실적은 일 잘하는 호구가 얼마든지 올려 주었고, 그 공은 김 부장이 모두 하성민에게 돌려주었으므로.

회사 생활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일이 이렇게 틀어졌을까.

김 부장이 처음 서진우의 프로젝트를 가져다주었을 때까지만 해도 하성민은 상황을 낙관했다. 그가 상상한 서진우의 반응은, 회의실에서 놀라 어버버하다가 자신이 어르고 달래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공격적이고 냉랭한 반격은 김 부장도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부장 놈도 좀 적당히 할 것이지.”

하성민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정작 그 기획서를 자신이 얼마나 희희낙락 받아 들었는지는 잊은 지 오래였다.

기획 회의 이후 요 몇 주간 하성민의 회사 생활은 가시밭길 같았다. 자신이 삼 년간 착실히 쌓아 올린 성실하고 능력 좋은 유망주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개박살이 났다. 하성민은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기획개발부 직원들의 은근히 냉랭해진 반응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사장과 절친하다고 장담했던 김 부장 또한 새로 부임해 온 아들뻘 전무이사에게 쪽도 못 쓰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 전무이사가 서진우의 프로젝트를 마음에 들어 해 손수 인센티브를, 그것도 제법 큰 금액을 약속했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해.”

까득, 엄지손톱을 씹는 소리가 섬뜩했다.

“어떻게 쌓아 온 이미지인데.”

하성민의 음성에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김석환 부장, 그 돼지 새끼를 따라 접대를 다니며 얼굴 도장도 열심히 찍었다. 잠깐의 실수 때문에 휘청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큰 프로젝트에 합류해 열심히 하는 모습을 잘 연출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반은 다시 단단해질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프로젝트에서 날 배제할 수는 없을 거야.’

하성민이 팔짱을 낀 채 회의실을 서성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김 부장이 왕좌에 앉아 있는 기획개발부이니 서진우의 윽박지름은 그저 블러핑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뒷골이 싸했다. 하성민은 서진우가 떠나고 굳게 닫혀 버린 회의실 문을 노려보았다.

“영원히 날 냉대할 수는 없을 거야, 서진우 씨.”

하성민이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서진우의 관심을 다시 제게로 돌려놓을 자신이 있었다.

***

아 진짜 짜증나는 새끼. 얻다 대고 협박질이야.

‘잘못했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서진우는 조금 전 자신을 내려다보던 하성민의 눈빛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그 태도가 어찌나 고압적이던지 소름이 끼치고 등줄기가 다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그건 분명 서진우를 찍어 누르려던 행동이었다.

‘미친놈…….’

서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뇌까렸다. 아무리 같은 대리 직급이 되었다 한들 선임이고 사수인 쪽은 서진우였다. 그런데 조금 전 하성민이 보인 모습은 서열을 재정립하려는 기 싸움과 진배없었다. 여기가 무슨 남중 남고도 아니고, 회사에서 일만 잘하면 되지 서열 싸움이 다 무어란 말인가.

화가 나서 잔뜩 쏘아붙인 덕에 속은 시원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싸했다. 역시 저 새끼는 최대한 빨리 손절하고 없는 사람처럼 대해야겠어. 서진우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무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퇴근 시간이었다. 남은 일도 얼마 없으니 오늘은 간만에 칼퇴할 수 있으리라. 손목시계를 흘끔대며 막 사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코너 복도를 돌았을 때였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복도 반대쪽에서 울리는 쩌렁쩌렁한 고함이 고막을 흔들었다.

“상사한테 보고도 안 하고 멋대로 기획부 TF팀에 지원서를 넣어?!”

기획부 TF팀. 서진우는 귀에 박혀 오는 단어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일이지? 절로 돌아선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케팅부 현판이 걸린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에어컨 냉기가 줄줄 새어 나오는 사무실 앞에 선 순간 서진우는 내부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원들이 모두 앉거나 선 채로 입을 다문 채 한곳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서진우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기둥 너머 안쪽 중앙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서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스레 상황을 살폈다. 잔뜩 화난 얼굴을 한 이는 마케팅부 조 과장이었고, 맞은편에서 혼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의 얼굴은 기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누가 조 과장 몰래 프로젝트 팀에 지원서를 냈다는 거지? 궁금해하며 마케팅부 지원자들을 한 명씩 머리에 떠올려 보던 서 대리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드렸으면 방해하셨을 거잖아요.”

‘여수정 씨?’

서진우가 놀라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나 그가 기실 놀란 까닭은 목소리의 주인 때문이 아닌, 그 내용 때문이었다. 서진우는 슬쩍 목을 빼서 기둥 뒤 가려져 있던 여수정을 발견해 냈다.

조 과장은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여수정은 그보다도 머리 반 개쯤 더 작았다. 그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서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전혀 공손하지 못했다. 방해라는 단어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조 과장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파티션 모서리에 탕! 소리 나게 내리쳤다.

“방해?! 자네 지금 나와 장난하나?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

“제게 할당된 일은 지난주 토요일에 전부 끝내서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혹시 몰라서 오늘 오전에 메신저로도 보고드렸는데 못 보셨나요?”

여수정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서진우의 눈에는 어쩐지 조 과장이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다른 직원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조 과장에 반해 여수정은 무척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의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조 과장의 목에 핏대가 섰다.

“일을 다 했으면, 뭐, 그걸로 끝이야? 다른 일을 찾아서라도 해야 했을 거 아니야!”

“다른 분들께는 이미 제가 도울 일이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디자인 조정 같은 단순한 업무 외에 큰일은 없다던데요.”

“뭐? 나한테는 안 물어봤잖아!”

“오전에 메신저로 보고드렸을 때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지 않습니까. 물론 그 뒤에 들어올 다른 일이 있다면 그것도 당연히 문제없이 할 거구요.”

여수정은 조 과장이 내지르는 노성에 움찔대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군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곧게 선 채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진우는 어쩐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여수정의 눈매가 무척 날카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와, 독하다. 끝까지 안 지네.”

사원 한 명이 기가 질린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진우는 그 사원을 돌아보았다. 그는 서진우가 선 자리 옆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아마도 바지런한 손가락은 상황을 누군가에게 중계 중이리라.

서진우는 사원의 말에 반만 동의했다. 여수정의 태도는 독한 게 아니라 대단한 거였다. 저건 훈계나 비판이 아니라 윽박지름이고 모욕이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시되기까지 해야 하다니, 보통은 남자들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여수정은 고작 눈 몇 번 깜박거린 것이 전부였다.

“이게 끝까지 따박따박…….”

조 과장이 서류철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누가 보아도 폭력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보고 있던 누군가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여수정은 외려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 올렸다. 안경 너머로 안광이 빛나는 듯했다. 서진우는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조 과장님!”

팽팽해진 공기를 가르는 명료한 외침에 조 과장과 여수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진정하세요.”

“―서 대리? 자네가 뭔데 끼어들어!”

일순 당황했던 조 과장이 왈칵 화를 냈다. 서진우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지금 여수정 씨를 때릴 생각이세요?”

“…….”

그제야 조 과장은 눈을 돌려 자신이 들어 올린 손을 발견했다. 조 과장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시선이 마주친 몇몇 직원들이 황급히 모니터 너머로 얼굴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조 과장이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제 손을 내렸다.

“……때리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가 이를 갈며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서진우는 타인에게 모욕을 주고 있었으면서, 되레 자신이 모욕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 과장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둘이 혈연도 아닌데, 그는 참 김 부장과 닮은 데가 많았다.

‘하기야, 그 새끼 밑에서 오래 살아남아 승진까지 했으니 당연한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조 과장은 기획부 소속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서진우의 눈빛이 절로 냉랭해졌다.

“여하튼 타 부서 소속인 서 대리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니 물러가지 그래.”

조 과장이 귀찮은 파리를 쫓듯 손을 흔들었다. 서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기획개발부 신규 프로젝트 이야기라면 제가 끼어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조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진우는 혓바닥 위로 심장의 맥동을 느끼며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너무 빠르지 않게, 떨지도 말고, 침착하게. 그가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여수정 씨, 제가 추천했습니다.”

“뭐?”

조 과장이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여수정도 놀란 눈이었다. 서진우는 여수정을 흘긋 곁눈질한 후 다시 조 과장을 돌아보았다.

“여수정 씨를 프로젝트 팀에 추천한 사람, 저라고요.”

서진우의 말이 끝나자 사무실에 정적이 일었다. 사람들이 저들끼리 눈을 굴리는 모습을 서진우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하, 이봐, 서 대리.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해.”

잠시 얼어붙어 있던 조 과장이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진우는 웃지 않았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야, 두 사람이 친한 것도 아니고, 여수정 씨가 그럴 만한 실적이 있는 것도…….”

“본인 이름을 건 프로젝트가 없는 건 아직 직급이 없어서일 뿐입니다. 여수정 씨도 최소 조건은 충족하는 데다, 저도 협업을 해 본 적 있어서 실력은 잘 압니다.”

서진우의 말에 조 과장이 웃음을 멈추었다. 서진우는 제 뺨을 찌르는 여수정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업무 추천에 왜 친한지, 친하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두시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

“전 여수정 씨가 이 프로젝트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조 과장님께서도 이미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프로젝트 콘셉트 기획안이 제 거거든요. 그래서 강원채 과장님도 제게 우선적으로 추천권을 주셨습니다.”

강 과장의 이름을 꺼내자 조 과장의 얼굴이 홱 일그러졌다. 서진우는 그가 동기인 강 과장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메일 보여 드릴까요?”

서진우가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잔뜩 얼굴을 구긴 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던 조 과장이 여수정을 돌아보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런 거였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다시금 여수정에게로 화살이 되돌아갔다. 서진우는 그러나 그 촉이 여수정을 향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미리 말씀을 못 드린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의현 이사님께서 친히, 관심을, 가진 프로젝트이니, 최대한 끌어 올 수 있는 인재는 부서 상관없이 모두 끌어 오라고 하셨거든요.”

서진우는 일부러 백의현을 강조하기 위해 말끝마다 강세를 주었다. 물론 백의현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알 게 무언가. 백 이사가 이번 프로젝트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들어 보니 여수정 씨가 특별히 맡고 있는 ‘중대한 업무’는 없는 듯한데, 그럼 TF팀 지원 관련 보고를 누락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면박을 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서진우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노랗게 된 조 과장에게 친히 ‘조언’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이쯤 되면 서진우가 월권을 하고 있는 것이 맞았지만, 알 바인가.

‘수틀리면 프로젝트 약속이고 뭐고 퇴사하면 되지. 그러려고 강 과장님까지 끌어들였는데.’

한 번 죽어 봤더니 배짱 하나만큼은 두둑해진 게 분명했다. 서진우는 예전에는 차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다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조 과장을 마주 보았다.

조 과장은 서진우의 말이 끝난 뒤에도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덕분에 사무실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였다. 이제는 타자 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무 심했나. 슬슬 사과하고 기획개발부 사무실로 돌아갈까. 서진우의 내면에 자리한 소심함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별안간 조 과장이 비식,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가 이상한 비웃음을 매단 채 대뜸 팔짱을 끼고는 서진우와 여수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조롱이 섞인 음성이 여수정과 서진우를 향했다.

“말을 하지 그랬나,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아니 씨발 이게 무슨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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