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팔 월 마지막 주 화요일, 강 과장과 화상 미팅이 잡혔다.
―명단 잘 받았어, 서 대리.
오랜만에 듣는 강 과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료하고 단단했다. 비록 조악한 화질이기는 했지만 화면 너머로 그리운 얼굴을 마주하니 서진우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인물들이 아주 쟁쟁하던데. 회사에서 이 프로젝트 제대로 밀어주는 모양인가 봐.
“아……네. 뭐, 일단 소문은 그렇게 났죠.”
―부정적인 소문보다야 긍정적인 게 백배는 낫지. 보내 준 지원서와 피드백 참고해서 최종 인원 선정해서 오늘 중에 답신 보낼 테니 서 대리가 대신 공지해 줘.
“그 많은 명단을 벌써 다 검토하신 거예요? 프로젝트 숙지하실 시간도 빠듯하셨을 텐데.”
서진우가 놀라 눈을 둥글게 떴다. 강 과장이 모니터 너머에서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타지에서 주말에 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 여행 다니는 것도 일 년이면 질린다, 얘.
“그럼 주말에도 내내 일하신 거예요?”
서진우가 눈썹을 아래로 휘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러라고 나한테 팀장 맡긴 거 아니야?
강 과장이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농담을 던졌다. 하기야,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서진우는 내심 찔끔해 헤헤 웃어 보였다. 그런 서진우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던 강 과장이 문득 미간을 좁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말이야, 서 대리. 혹시 프로젝트 관련해서 김 부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네?”
마우스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카메라로 반사적인 반응이 잡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서진우는 아직 강 과장에게 기획 회의 때 있었던 일을 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부장이 말이야. 지난주 금요일에 따로 메시지를 보냈더라고.
“뭐라고 하던가요?”
서진우가 너무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물었다. 콧잔등을 한껏 찡그린 채 망설이던 강 과장이 조심스레 눈을 들어 올려 카메라를 통해 시선을 마주쳤다.
―이번 프로젝트에 하성민 씨를 꼭 넣으라던걸.
“아.”
내심 긴장하고 있던 서진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맥없이 웃었다. 이번에는 그 반응을 제대로 읽어 낸 강 과장이 얼굴을 굳혔다.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야? 하성민 씨, 서 대리 부사수였지? 설마 그 사람이 김 부장 라인을 탔어?
강 과장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서진우는 잠시 고민했다. 지나간 이야기를 굳이 타지에 있는 상사한테 전하는 게 꼭 뒷담 같아서 껄끄러웠다. 하지만 하성민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김 부장이 적극적으로 발을 담그려 하는 시점에서는 책임자인 강 과장이 사건을 모르게 놔두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서진우는 간단하게 축약해서 그간 있던 일을 전달했다. 김 부장이 기획서를 빼돌리고 하성민이 그 기획서를 그대로 발표했다가 망신을 당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 과장이 잔뜩 화가 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김 부장 그 새끼는 진짜 사람이 변하질 않네. 후임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뺏으려던 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정치질로 분탕을 놓으려고……!
“과장님.”
분통을 터뜨리려는 강 과장을 만류하며 서진우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하성민 대리, 넣죠. 프로젝트에.”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뭐? 왜? 거절해야지. 그런 짓을 했는데. 내 선에서 거절할 거니 걱정하지 마.
강 과장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서진우는 뭉클한 기분으로 강 과장을 마주 보았다. 김 부장의 개인적인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는 강 과장이 서진우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프로젝트 성공 사례를 몇 건이나 보유 중임에도 해외 지사에서 일 년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그런데도 잘못된 관행을 눈감고 그냥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강 과장이었다. 제 부하 직원이 당할 뻔한 불합리한 일에 제 일처럼 분노해 주면서.
‘역시 강 과장님께 부탁드리길 잘했어.’
서진우는 단단한 강 과장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괜찮아요, 그냥 넣으세요. 하 대리를 빼면 김 부장이 다른 방식으로 참견해 올 게 분명해요. 차라리 우리가 누가 김 부장 끄나풀인지 미리 알고 있는 게 백배 낫죠.”
게다가 서진우는 이미 하성민이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망쳤는지 방식까지도 안다. 그러니 하성민이 하려는 일을 잘 저지하기만 해도 프로젝트가 원만하게 굴러가리라. 서진우에게도 최소한 그 정도의 자신은 있었다.
서진우의 말에 침묵하던 강 과장이 미간을 좁히며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 대리, 정말 괜찮겠어?
“네? 제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서 대리 기획서를 뺏은 장본인이잖아. 내가 보기엔 한두 번 그랬을 것 같지도 않고.
고작 담백한 설명 몇 마디로도 강 과장은 대강 서진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들키다니. 서진우가 머쓱해하며 제 미간을 긁적였다. 강 과장이 서진우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하튼 서 대리 말뜻은 이해했어. 일단 가안 보내고, 더할 사람 더하고 뺄 사람 빼서 최종 명단은 내일까지 공유할게.
“넵, 감사합니다. 과장님도 몸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서진우가 카메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다정하게 인사를 덧붙였다. 걱정 말라며 웃은 강 과장이 이내 화상 미팅을 종료시켰다.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 최종 인선 인원 가안을 담은 메일이 도착했다.
“……후우.”
문서 내 목록을 확인한 서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맨 끄트머리에 하성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 과장이 마지막까지 넣을지 말지 고심했던 인원이 그였던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강 과장에게 추가 인원으로 여수정을 추천하는 글을 짧게 넣어 답신을 보냈다.
김 부장의 마음가짐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오랜 시간 몸으로 겪어 봐서 잘 알았다. 그러니 적어도 마음먹은 짓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도록 서진우가 방패를 둘러야 했다. 다행히도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서진우의 마음가짐이 달랐다.
‘정 안 되면 퇴사하지 뭐.’
고작 퇴사를 선택지에 놓았을 뿐인데 자존감까지 높아진 느낌이었다. 서진우가 제 변화에 내심 웃으며 막 노트북을 종료하고 덮었을 때였다.
드르륵, 회의실 문이 열렸다.
“어, 여기 계셨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서진우는 질린 기분으로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어. 세 시까지 내가 예약했는데.”
“아, 그러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미처 몰랐어요.”
하성민이 민망한 듯 제 목덜미를 긁적이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몰랐을 리가 없지. 카드에 대여 시간과 이름을 기입해서 회의실 문패에 꽂아 두었는데.
어설픈 변명을 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허락도 않았는데 멋대로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한다. 하성민을 보며 서진우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하성민은 눈치 없는 새끼처럼 굴며 뻔뻔하게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왜 혼자서 회의실까지 잡으셨어요?”
“강 과장님이랑 화상 미팅 있어서.”
“아~. 그냥 자리에서 하셔도 됐는데.”
“지원자 옆자리에서 인선 회의를? 그건 안 되지.”
서진우가 익숙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자 하성민이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다.
“프로젝트 팀 선정 회의가 벌써 끝났어요?”
“응, 이제 막. 최종 결정은 강 과장님이 내리겠지만.”
당연히 이게 목적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성민은 한발 늦었다. 하기야, 조금 일찍 왔어도 서진우가 리스트를 보여 주는 일은 없었겠지만.
잠시 짜증이 난 듯 눈썹을 꿈틀거리던 하성민이 이내 표정을 고치고 서진우의 곁에 섰다.
“자리로 돌아가시는 거죠? 제가 짐 좀 들어 드릴게요.”
“괜찮아.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
무덤덤하게 하성민의 호의를 거절한 서진우가 서류와 노트북을 넣은 가방 지퍼를 잠그고 어깨에 둘러멨다. 하성민에게는 제 것을 하나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돌려받지 못하면 서진우의 손해일 뿐이었다.
냉담하게 몸을 돌리는 서진우를 본 하성민의 눈이 뾰족해졌다.
“……선배, 요즘 변했어요.”
그가 표정과는 달리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진우가 황당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하성민의 표정은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시무룩해진 사람처럼 눈썹을 휜 채 입술을 내밀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진우는 칭얼대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헛웃음을 토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헛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서진우의 말에 하성민이 어울리지도 않게 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차가워지셨잖아요. 숨기는 일도 많고. 예전이라면 회의도 구경시켜 주셨을 텐데…….”
되도 않는 앙탈을 부리느라 눈을 내리깔고 있던 탓에 하성민은 맞은편에 선 제 선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서진우는 이제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리 일 년 차가 할 말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걸까, 이 새끼는?
“내가 이런 중요한 정보를 너한테 보여 줬을 거라고?”
목소리가 절로 싸늘해졌다. 그제야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하성민이 흠칫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진우가 딱딱해진 얼굴을 풀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가 섰다.
“착각하지 마. 네가 내게 일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사원일 때 이야기고. 회의에 참여하라고 했던 건 네 업무에 도움이 되니까였고.”
서진우의 싸늘한 기색에 당황한 하성민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는 하성민과 발끝이 닿기 전 자리에 멈춰 섰다. 하성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지만, 고작 올려다보는 게 무서웠던 과거의 서진우는 죽었다.
“애초부터 난 네게 일을 하는 요령을 알려 주려 했지, 일을 떠다 먹여 주려고 한 적 없어. 삼 년간 가르쳤는데도 아직도 어떤 정보가 중요한지 아닌지 구분 못하는 건 네 역량 부족이야.”
“…….”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고.”
서진우가 하성민을 쏘아보았다. 당혹으로 평정을 잃은 하성민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떨렸다. 서진우는 흔들리는 하성민에게 쐐기를 박았다.
“변한 게 아니라 깨달은 것뿐이야. 그러니 너도 정신 좀 차려.”
하성민의 표정이 구겨졌다. 좋은 동료, 귀여운 후배의 가면을 벗은 그의 민낯이 우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허탈했다. 이런 놈에게 끝의 끝까지 속아서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한심해서, 허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회의실 다 썼으니 너 할 일 해라.”
서진우는 가방을 고쳐 메며 뒤로 물러섰다. 할 일이 많아 이런 곳에서 감정 소모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선배.”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서려는 서진우를 붙든 것은 하성민의 손이었다.
“잘못했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이를 악문 듯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하성민에게 붙잡힌 팔뚝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피어올랐다. 서진우는 손을 뿌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자신이 다시 그의 손을 질색하며 뿌리친다면 지금까지의 충고가 하성민에게는 그저 감정적인 화풀이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침착해야 해.’
서진우는 혀끝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뭐 어쩌라고.”
그럼에도 찌푸린 눈썹을 펴는 것까지는 어려웠다. 짜증 섞인 서진우의 표정을 마주한 하성민이 화난 듯 굳혔던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선배가 냉담하게 대하시니까 저 힘들어요…….”
이번에는 대단한 괴롭힘을 당하기라도 한 양 피해자의 가면을 쓴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서진우는 찡그린 와중에도 잘생긴 얼굴을 보며 짧게 웃었다.
“왜, 이러면 내가 또 미안하다고 간이고 쓸개고 떼서 줄 것 같아서?”
“……서 선배.”
“쓸데없는 정치질에 열 올리지 말고 본인 일부터 잘하세요, 하성민 대리님. 프로젝트 팀 합류하고 싶으면 실적부터 증명하고.”
어차피 김 부장의 입김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서진우는 하성민과 시선을 마주친 채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하성민은 이번에는 회의실을 떠나는 서진우를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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