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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3화 (13/150)

13화

서진우가 죽었다 깨어난 뒤 했던 몇 가지 결심 중 하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었다. 퇴사를 하든 이직을 하든 다시는 업무에 삶을 잡아먹히지 않겠노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취미 생활도 하고, 사람들과의 인연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노라고.

이러한 다짐을 지키기 위해 무려 과거로 돌아온 지 삼 주 만에 처음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약속 당일 주말 저녁, 간신히 바깥으로 기어 나온 서진우는 생각했다.

워라밸 지키며 살기…… 쉽지 않구나.

“뭐야, 왜 이렇게 죽상이야. 잠 설쳤냐?”

“어? 아니, 낮잠 푹 잤어.”

서진우가 웃으며 초점을 되돌렸다. 맞은편에 앉아 고기를 굽던 친구 이해신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왜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야. 우리 일 년 만에 보는 거거든? 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반갑지도 않냐?”

“아, 반갑지. 완전 반가워.”

반가움과 피로도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괜히 사족을 덧붙였다간 간만에 보는 친구의 기분만 상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해신이 오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미안해질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서진우는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이해신과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나란히 채웠다. 이해신이 그런 서진우를 보며 어이없어하다 이내 표정을 풀고 픽 웃었다.

“노력했으니까 봐준다. 일단 마셔.”

서진우와 이해신이 각자의 잔을 들어 올렸다. 엄지만 한 작은 유리잔이 맞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서진우는 소주를 입안으로 단숨에 털어 넣은 뒤 빈 잔을 내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잔을 내려놓은 이해신이 곧 다 구운 고기를 부산스레 접시 위에 집어 올렸다.

“만성 피로 그거, 다 못 자고 안 먹고 해서 생기는 병이야. 잘 먹고 많이 움직여야 체력도 붙는다.”

“어어, 고마워.”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곱창 몇 점이 부추와 함께 서진우 앞에 놓였다. 서진우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곱창을 맛보았다. 적당히 느끼하고 고소한 풍미가 소주와 퍽 잘 어울렸다.

“이 집 맛있네.”

서진우의 칭찬에 이해신의 광대가 위로 솟았다. 그가 한껏 뿌듯해하는 얼굴로 손에 든 집게를 휘둘렀다.

“그치? 이 집 뚫을 때까지 고생 좀 했다. 우리 직원들이 입맛이 엄청 까다롭거든. 그래서 회식으로 고기 뷔페 이런 데는 절대 못 가게 해. 그런데 와중에 회식 한번 하면 아주 돼지 놈들이 따로 없다니까. 어후……. 그래서 고기 질도 좋고 가격도 괜찮은 곳 찾느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 다행히 회사 근처에 딱, 이 집이 있지 뭐냐.”

이해신이 과장되게 투덜거렸다. 서진우는 두 팔을 테이블에 기대고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넌 진짜 좋은 사장님이야.”

“―아니, 그렇다고 밥 굶기면서 일 시킬 수는 없잖냐.”

갑작스러운 진지한 칭찬에 이해신이 눈을 굴리며 쑥스러워했다. 서진우는 헛기침하는 친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괜히 하는 빈말이 아니라, 서진우는 이해신이 정말로 좋은 사장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은 이해신을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직원들은 이해신을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동시에 상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대기업을 다니며 익히 보아 왔던 아첨 따위가 아닌, 진심 어린 존경을 담은 태도를 보며 서진우가 얼마나 놀랐던가. 아무리 소규모 스타트업 회사라지만 사장이 그런 신뢰를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부럽다. 나도 너희 회사 꽂아 줘.”

서진우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농담 섞인 푸념을 했다. 이해신이 불판에 새로운 고기를 얹으며 대꾸했다.

“퍽이나 부럽겠다. 대기업 대리님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구멍가게로 기어들어 오겠다는 거야.”

“아, 나 퇴사하려고.”

“뭐?!”

서진우의 태평한 대꾸에 이해신이 퍼뜩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주변 사람들이 테이블을 돌아볼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식당 홀을 울렸다. 서진우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눈치를 보며 직원에게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인 이해신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웬 퇴사?”

“그냥, 일도 상사도 야근도 이제 다 지겨워서.”

서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가장하며 대답했다. 잠시 망설이듯 입을 다물었던 이해신이 이내 상체를 서진우에게로 가까이 했다.

“혹시…… 너 그……, 그 친구랑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친구? 무슨 친구.”

“왜 그…… 호감 있다던 후배 있었잖냐.”

“―아.”

무심하게 움직이던 젓가락이 허공을 짚고 멈추었다. 서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이해신에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하성민이 막 입사해 서진우의 부사수로 배정받았을 무렵 즈음이었던가.

서진우와 이해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창으로,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진학한 것을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져 지금에 와서는 서로가 각자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그렇기에 이해신은 서진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헤테로 친구이기도 했다.

“이제 안 좋아해.”

서진우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곱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조금 전까지 맛있게 느껴졌던 고기가 지금은 고무처럼 질겼다. 맥없이 고기를 질겅거리는 서진우를 마주하며 이해신이 눈썹을 찡그렸다.

“왜, 무슨 일인데. 설명 좀 해 줘라.”

“아. 그 새끼가 김 부장이랑 짜고 내 기획서 훔쳤거든.”

서진우가 무심코 대꾸했다. 이해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서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안 뺏기고 제대로 갚아 줬으니까. 그냥……, 그러고 나니까 이제 별로더라고.”

“아니, 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냐? 처음 이야기 들을 때부터 어쩐지 감이 싸하더라니!”

이해신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가 집게를 무기처럼 움켜쥔 채 불을 뿜을 기세로 열변을 토했다.

“네가 좋아한다니까 내가 말은 안 했지만, 그 새끼 좀 수상했다니까? 아니, 멀쩡하게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놈이 보고서도 제대로 못 써서 매번 사수한테 대신 써 달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 그런데도 실무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이상했지. 맞아.”

“내가 보기엔 그 새끼는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이해신이 서진우의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으며 투덜거렸다. 서진우는 잔을 집어 들며 그저 웃었다. 이해신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하성민이 정말 유능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기본적인 업무를 못했을 리 없었다.

직접 지켜보지 않은 사람도 파악할 수 있는 진실을 서진우만 알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뒤집어쓴 채 사람을 본다는 건 그런 거였다. 장막에 가려진 채 상대를 멋대로 미화해 버리는 것.

그러한 시각이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뭐, 괜찮아. 퇴사할 거니까. 자리 만들어 달라는 말 진심이니까 나 잊으면 안 돼.”

서진우가 부러 쾌활하게 말을 던졌다. 씩씩대며 열을 내던 이해신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물론이지 인마. 너 온다고 하면 없는 자리도 만든다, 내가.”

“뭐래, 같이 일해 본 적도 없으면서. 친구라고 검증도 없이 막 뽑으면 큰일 난다, 너.”

함부로 호언장담을 하는 이해신을 젓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서진우가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해신이 눈을 둥글게 떴다.

“뭔 소리야. 이력서만 들고 와도 무조건 합격이지. 너 대학 다닐 때 공부도 존나 잘했잖아. 일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열심히 하겠냐?”

누가 보면 벌써 감투라도 생긴 줄 알 기세였다. 서진우는 술잔을 홀짝이며 열정적으로 회사를 어필하는 이해신을 구경했다.

이해신과 서진우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종이었다. 결석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모범생 서진우와는 달리, 이해신은 과가 체질에 안 맞는다며 수업을 빠지고 대학 시절을 화려하게 놀며 보내다 급기야는 삼 학년이 되기 전 돌연 자퇴를 했다. 그리고는 곧장 작은 물류회사에 취업해 일을 하는가 싶더니 몇 년 전 불쑥 사업을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신의 충동적인 성향이 결국 그를 망칠 것이라 함부로 수군댔지만,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지금 이해신의 사업은 순탄대로를 걸으며 상승세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충동적이라고 혀를 찼던 성격이 사실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해신은 누가 봐도 성공한 사업가였고, 직원들에게 사랑받는 한 회사의 대표였다. 그래서 서진우는 항상 이해신을 존경했다. 자신처럼 내면에서 곪을 필요 없이 당당하고 밝게 살아가는 친구가 부러웠다.

“……하여튼 이직 걱정은 하지 말고 퇴사하면 일단 좀 쉬어라. 퇴직금 넉넉하게 나올 거 아니야? 바로 취업할 생각 말고 숨 좀 돌리고 살아. 연애도 좀 하고, 인마.”

서진우를 격려하는 건지,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건지 모를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이해신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진우가 놀라 눈을 끔벅였다. 이해신이 가는 눈을 뜨고 서진우를 탐색하듯 쏘아보았다.

“너 마지막 연애가 언제냐? 거 뭐야, 군대 가기 전에 만났던 형이 마지막 아니냐?”

“잘 아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서진우는 침착하게 대처했다. 이해신이 무심한 표정으로 술잔을 채우는 서진우를 흘겨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못마땅한 기색에 서진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너야말로 남의 연애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생각 말고 네 이야기나 좀 해 봐. 여자 친구는 잘 만나고 있어?”

“아아, 지우? 그렇지 뭐. 벌써 칠 년째다. 그러고 보니 지우 최근에 중학교로 이동해서 담임 맡았어.”

이해신의 얼굴이 풀어졌다. 오래 사귄 연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안정적인 관계에 서진우가 부러움을 느낄 찰나, 아차 하고 말을 멈춘 이해신이 슬쩍 상체를 숙였다.

“그, 있잖아. 내가 오랜만에 만나자고 해 놓고 말하기 뭐하지만 절대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하는 말이니까 오해 말고 들어라.”

음성이 갑작스레 은근해진 것을 보니 이해신이 드디어 오늘 만남의 목적을 상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서진우는 아직 이해신의 소식을 몰라야 했다.

“무슨 의도?”

서진우는 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연기하며 되물었다. 이해신이 수줍게 어깨를 좁혔다.

“그게……. 나 시월에 결혼한다.”

“진짜? 뭐야, 엄청 큰일이잖아. 축하해!”

이번에는 서진우가 음성을 높일 차례였다. 호들갑스러운 축하에 이해신이 쑥스러워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아직 청첩장은 안 나왔지만, 올해 초부터 슬슬 식 올리자는 이야기를 했었거든. 그러다 이번에 드디어 제대로…… 그렇게 됐어. 너 바쁜 거 알지만……, 결혼식 와 줄 거지?”

“물론이지.”

서진우가 이해신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쳐 건배하며 진심으로 대답했다. 과거에는 회사 일에 치여 소중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관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서진우의 말에 이해신이 청첩장 나오는 날 밥을 사겠다며 환히 웃었다. 서진우는 친구의 경사에 기뻐하며 오랫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간만에 보내는 마음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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