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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2화 (12/150)

12화

강 과장이 서진우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덕에 뒷일이 수월해졌다. 서진우는 이메일로 강 과장에게 프로젝트 콘셉트 기획안을 공유하고 그 주 목요일, 사내 홈페이지에 프로젝트 팀 지원 공고문을 올렸다.

이사실에서의 일로 김 부장이 분명 가만있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백의현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의외로 잠잠하게 제자리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서진우에게 종종 향하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래서 서진우는 김 부장이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에 참견하려 나름대로 수를 쓰고 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래. 이런 방식으로.

“지원자 하성민…….”

이름을 보는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김 부장의 끄나풀이라는 티를 이렇게까지 낼 수도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김 부장과 하성민이 작당해 서진우의 기획안을 훔치려 했던 일은 결국 징계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소문으로는 시말서도 쓰지 않았다는 모양이었다. 다른 회사에 기획을 흘린 것도 아니고, 기획부 내에서 ‘실수로 생긴 사고’에 대단한 징계를 내리기가 어려웠다는데, 뭐. 어차피 서진우는 직접 결과를 전해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뒷공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알 수 없었으리라.

‘뒷공작까지도 필요하지 않은 사소한 사건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어차피 크게 기대 안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성민이 이 프로젝트에 대놓고 지원서를 넣는 건 좀 많이 뻔뻔하지 않나?

서진우는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하긴, 양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남의 기획서를 그대로 가져다 발표할 생각 같은 건 못 했겠지. 이런 놈을 그저 일 열심히 하는 후임 정도로 생각하고 귀애했다니, 과거의 그는 정말 눈에 콩깍지를 제대로 끼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서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음 지원 메일을 열었다.

백의현 전무이사가 직접 밀어주는 프로젝트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진 덕에 지원자가 제법 많았다. 관리부, 홍보부, 마케팅부 등등 다양한 부서에서 들어온 지원서는 그 양만큼이나 다채로웠다. 덕분에 지원서를 단순히 기준에 맞춰 선별하는 데만도 꽤 품이 들었다. 서진우는 한 손으로 제 목을 꺾어 가며 열심히 일에 집중했다.

“어?”

문득 낯익은 이름이 그의 눈에 띄었다. 여수정. 서진우가 눈여겨봤던 마케팅부 사원이었다. 서진우는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깜박였다. 여수정은 과거에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원이 아니라 차출이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지원서를 낸 모양이었다.

“미묘하게 바뀐 건지 안 바뀐 건지 모르겠네.”

서진우가 그의 지원서를 [추천] 폴더로 분류하며 중얼거렸다. 물론 지원자명 옆에 긍정적인 피드백 한 줄을 적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TF팀 구성 및 운영을 모두 강 과장에게 일임하기는 했지만, 강 과장은 팀장 보조로서 서진우의 의견도 함께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이 본사에서 일 년 가까이 떨어져 지낸 탓에 현 사원들 성향 파악도 잘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서진우가 기획안의 주인이니 자신만큼이나 그와도 더욱 잘 맞는 사람과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 기왕 이렇게 된 이상 프로젝트 한번 잘 살려 보고 싶은데.”

서진우가 기지개를 켜며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느새 기둥에 걸린 벽시계의 시침이 9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진우는 그 시계를 올려다보며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퇴사를 마음먹은 뒤부터는 절대 야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야근이라니.

“……내가 프로젝트만 끝나면 진짜 뒤도 안 돌아본다.”

서진우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서랍을 잠그고 막 가방을 챙겨 들었을 때 핸드폰이 짧게 울었다. 친구인 이해신에게서 온 문자였다.

[-죽었냐?]

액정 위로 떠오른 세 글자를 보며 서진우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와 집만 오가는 생활을 반년 넘게 했다. 그 탓에 친구들을 만난 지도 어느새 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진우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서며 답신을 보냈다.

[어떤 의미로는.]

[-ㅋㅋㅋ그게 뭐야 잘 사나 보네]

이해신에게서는 답변이 금방 돌아왔다. 그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진우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승강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야 끄트머리에 반질반질한 구두코가 보였다. 자신 말고도 아홉 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또 있다니, 역시 이 회사는 글러 먹었다. 서진우가 머릿속으로 가볍게 농담하며 다시 메시지에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애인입니까?”

이제는 귀에 익은, 차가우면서도 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서진우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글러 먹은 회사의 전무이사, 백의현이 뒷짐을 진 채 서진우의 손을 어깨너머로 장난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사님.”

당황한 서진우가 급하게 자세를 고쳐 섰다. 백의현이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진우 대리는 앞을 잘 보고 걷는 게 좋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도통 앞을 보지 않네요. 그거 위험합니다.”

서진우는 민망함에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백의현은 지난번 복도에서 부딪혔을 때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할 것까지야 없습니다. 몇 층 갑니까?”

“아, 일 층…… 제가 누르겠습니다.”

“됐습니다. 뭐 버튼 정도로.”

백의현이 우아하게 검지로 버튼을 터치하자 1이라는 숫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그가 서진우를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지금 퇴근합니까?”

“네? 아, 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습니다.”

백의현의 치하에 서진우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웃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혼자 남아서 야근을 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프로젝트를 밀어주겠다고 말한 상사 앞에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새삼 어색해진 서진우가 핸드폰을 제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허리를 세워 섰다. 백의현이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서진우를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정말 여자 친구입니까?”

“네?”

“메시지 상대 말입니다.”

대화 맥락을 따라가지 못해 잠시 얼이 빠졌던 서진우가 백의현의 대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친구예요.”

“흠. 그냥 친구랑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싱글벙글 웃었다니, 어지간히도 친한 사람인가 보군요.”

백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서진우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언제 싱글벙글 웃었단 말인가. 그냥 오랜만에 닿은 친구와의 연락이 반가웠을 뿐인데.

“그럼 서진우 씨는 여자 친구 없어요?”

그러나 백의현은 서진우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인 듯싶었다. 이어진 그의 질문에 서진우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네……, 일 때문에 바빠서 아무래도요.”

바쁘지 않다고 해도 만들 생각 없지만. 회사 상사에게 할 수 없는 뒷말은 목 너머로 슬쩍 삼켰다. 서진우는 여자를 성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질문을 받는 일이 퍽 난처했다.

“이, 이사님은 많으실 것 같네요. 하하, 하…….”

서진우가 어설픈 농담을 던지며 뻣뻣하게 웃었다. 그 헛소리에 기분이 상한 것일까, 옆에 선 백의현이 조용해졌다.

“…….”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짧은 정적이 느릿하게 흘렀다. 서진우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엘리베이터 상단 표시등을 초조하게 노려보았다. 아니, 언제부터 팔 층에서 일 층이 이렇게 멀었던 걸까. 왜 아직도 삼 층인 걸까…….

“애인이 많아 보인다니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 거겠지만.”

억겁만큼이나 길었던 몇 초 뒤 비로소 백의현이 입을 열었다. 그 탓에 마침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음에도 서진우는 꼼짝할 수 없었다. 백의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서진우를 관찰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말처럼 들리지 않는군요.”

“……왜요……?”

서진우가 어색하게 되물었다. 백의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자 만나느라 회사 일에 소홀하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아.”

서진우는 정말 하늘에 맹세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손목을 걸 수도 있었다. 일순 당황해 사색이 된 서진우를 무표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백의현이 불현듯 싱긋 웃었다.

“농담입니다.”

“……아……, 농담이시구나. 하하…….”

서진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백의현이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어 주었다.

“밤도 깊었는데 어서 퇴근하세요.”

“예에.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사님도…… 들어가십쇼.”

서진우는 속으로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황급히 백의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백의현의 표정은 언제 냉담했냐는 듯 평소와 같이 태연했다. 서진우가 도망치듯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그리고 혹시나 계속 오해할까 봐 말해 주는데,”

백의현의 낮은 목소리가 서진우의 귓등에 닿았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닫히는 문 너머로 눈매를 접어 웃는 백의현의 얼굴이 보였다.

“나도 없습니다, 여자 친구.”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승강기 문이 닫혔다. 서진우는 벽처럼 굳게 선 문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안 궁금한데.’

아무래도 일 안 한다는 이미지로 박히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잠시 멀거니 서 있던 서진우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돌렸다. 이딴 이상한 회사는 빨리 퇴사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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