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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1화 (11/150)

11화

“팀 단위가 아닌, 서진우 대리 개인에 대한 오퍼입니다. 프로젝트가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따라 팀 단위 인센티브도 별도로 책정될 거고요.”

백의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려 빛났다. 서진우는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그의 단정한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적은 금액은 아닐 텐데, 어떻습니까?”

정중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귓가에 고였다. 서진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적을 리가. 말이 안 되는 제안이라 그렇지.

“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데요……?”

서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심이 섞인 질문에 백의현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만큼 서진우 대리의 발표가 매력적이었으니까요. 나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서진우는 회사를 다니는 사 년 내내 누구에게도 이런 신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기획이 괜찮다,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다 정도의 이야기는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지만 그뿐이었다. ‘성공할 거라고 확신’한다니. 중역이라 이런 장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달렸다. 서진우는 팔뚝 위로 희미한 흥분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럼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인센티브는 얼마 정도 보장하실 겁니까?”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넋을 놓고 있던 김 부장이 뒤늦게 흥분해 발을 구르며 끼어들었다. 꿀꿀대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 덕분일까, 치밀었던 쾌감과 닮은 감각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서진우의 눈빛이 다시 식은 것을 확인한 백의현이 짜증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돌려 김 부장을 노려보았다.

“누가 얼마나 프로젝트에 기여할 줄 알고 그걸 미리 책정합니까.”

“하지만 개인에게 천만 원이라니, 이건 너무…….”

“예산을 집행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김석환 부장.”

불쾌함이 어린 음성에 김 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연배를 고려해 꼬박꼬박 붙여 주던 ‘님’ 자가 떨어지자 그제야 위기감이 엄습한 모양이었다. 백의현이 중지로 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짜증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자꾸 기어오르지 말고 입 다물어요. 주제 파악도 좀 하고.”

“……죄송, 합니다.”

김 부장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덜미가 다시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백의현은 부들부들 떠는 김 부장을 차가운 눈으로 일별한 뒤 다시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서진우 대리의 의사입니다.”

“…….”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확고한 시선이 서진우를 관통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서진우는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자리에서 퇴사를 고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프로젝트를 잘할 필요도 없이, 완수만 해도 인센티브를 천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서진우에게는 거의 퇴직금과 맞먹는 돈이었다.

연말까지 딱 팔 개월만 눈 딱 감고 버티면 경력과 돈이 함께 생기는 것이다.

서진우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릴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흘러나온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서진우는 다시 눈을 떠 여전히 그를 응시하고 있는 백의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저 대신 강원채 과장님을 팀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프로젝트 팀 구성도 강 과장님께 부탁드리려 하고요.”

“뭐?!”

백의현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오르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 부장이 꽥 소리를 내질렀다. 서진우는 김 부장을 돌아보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 부장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자리에도 없는 강 과장을 여기서 왜 찾아! 차라리 이 과장이면 모를까. 해외 지사에 있는 사람한테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넘기겠다고?”

“강 과장님 곧 돌아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 부장의 고함에 서진우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김 부장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강원채 과장.

기획개발부에 몇 없는 여성 사원이자 유일한 여성 관리자로 서진우의 첫 상사이기도 한 그는 입사 때부터 유능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리를 달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로젝트 하나를 성공시켰고, 삼 년 차부터는 끊임없이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기획을 선보이며 회사에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 정치싸움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던 그는 김 부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지금은 일 년째 캄보디아에서 장기 출장 근무를 하고 있었다.

서진우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강 과장은 가을이 되기 전 한국으로 돌아온다.

프로젝트가 강 과장의 귀국보다 먼저 시작되었던 탓에 강 과장은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옥 같은 나날을 견디던 과거의 서진우는 때때로 프로젝트를 하성민이 아닌 강 과장이 맡아 주었다면 어떻게 굴러갔을지 상상해 보고는 했다. 자신은 어차피 김 부장에게 짓눌려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끌기는커녕 무산시켜 버렸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 과장님이 맡아 주었더라면.’

적어도 김 부장의 간섭에 휩쓸리지는 않았으리라.

“그거면 됩니까?”

백의현이 가벼운 목소리로 김 부장과 서진우 사이에 흐르던 날카로운 분위기를 흐트러뜨렸다. 막 대거리를 하려 검지를 들어 올리던 김 부장이 움찔, 몸을 굳혔다. 서진우는 김 부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

“아니, 백 이사님. 강 과장이 돌아오는 데 이 주는 더 걸립니다. 그걸 기다려 주었다가 프로젝트에 대해 파악할 시간도 또 따로 주고, 사람 모집하고, 이러면 못해도 구월은 될 텐데. 사분기 프로젝트를 삼분기 다 지나서 시작하시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백의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반문했다.

“강 과장이 휴직 중인 것도 아닌데, 인터넷 뒀다 뭐 합니까?”

“……!”

허를 찔린 김 부장이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백의현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김 부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앉으세요.”

“……예.”

마지막 한마디에 힘이 빠진 김 부장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백의현은 김 부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서진우를 향해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다.

“서진우 대리의 뜻이 확고하다면 좋습니다. 다만 내가 강원채 과장에 대한 건 서류로만 접해서, 실적은 익히 알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백의현의 말인즉, 강 과장이 믿을 만한 사람이냐는 질문이었다. 서진우는 그 말에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강직한 분입니다.”

“좋아요.”

단단한 음성에 백의현의 입꼬리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가 등받이에 제 상체를 편안하게 기댔다.

“강원채 과장을 설득하는 건 서진우 대리에게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만일 강원채 과장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백의현의 동공 위로 백열등 불빛이 고여 반짝였다.

“그때는 서진우 대리가 프로젝트를 책임지세요.”

그가 단호하게 지시했다. 서진우는 한숨을 삼키며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쯤 양보를 받았다면 더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맡겨 주세요.”

서진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백의현이 만족한 포식자처럼 씩 웃었다.

“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 백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업무용 데스크로 걸음을 옮기며 낭랑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럼 서진우 대리는 우선 내려가서 강 과장에게 컨택하세요. 그리고 결과 보고는 김 부장이 아닌 내게 직접 합니다.”

“네.”

“아니, 꼭 과장급이 필요한 거면 이 과장이나 조 과장도 있…….”

“김석환 부장님, 자꾸 눈치 없이 끼어들 겁니까?”

용기를 내서 다시 반항을 시도하던 김 부장이 가벼운 면박에 다시 허리를 옹송그렸다. 서진우는 이렇게 작아진 김 부장은 난생처음 보았는데, 으스대는 꼴보다는 이런 모습이 백배 더 잘 어울렸다.

“그럼 면담은 여기까지. 다들 나가 보세요.”

백의현이 업무용 의자로 되돌아감과 동시에 대화는 끝을 맺었다. 서진우와 김 부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으, 또 한바탕 지랄을 하겠네.’

뺨을 때리는 서슬 퍼런 시선이 벌써부터 지겨웠다. 서진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내내 이어질 김 부장의 화풀이를 벌써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왜 강 과장 이야기를 꺼냈냐, 퇴사 한다고 했던 말은 장난이었냐, 상사가 우습냐, 나 무시하냐 등등…….

김 부장이 다른 소리 못 하게 눈앞에서 쐐기를 박아 준 건 고마웠지만 이어질 시간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냥 예전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어차피 삼십 분 뒤면 퇴근 시간이다.’

서진우가 질끈 눈을 감고 제 볼 안쪽을 짓씹었다. 미리 머릿속에서 재생할 플레이리스트를 빠르게 선정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모니터를 응시하던 백의현이 짧은 탄성을 토했다.

“아, 김석환 부장님.”

“예, 예?”

서진우의 뒤통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던 김 부장이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백의현이 무표정한 얼굴을 돌려 김 부장을 응시했다.

“부장님은 잠깐 남으시죠. 인사 관련으로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가 사소한 일을 깜박했다는 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김 부장이 당황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예, 예? 아, 아니 저도 남은 업무가…….”

“제가 더 바쁠까요, 부장님이 더 바쁠까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백의현이 무뚝뚝하게 김 부장의 하소연을 차단했다. 서진우는 김 부장이 빠득, 이를 가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늘어뜨린 김 부장이 힘없이 백의현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서진우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도망치듯 먼저 이사실에서 내뺐다. 말 한마디로 저 탐욕스러운 돼지의 멱살을 붙잡을 수 있다니. 정말 권력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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