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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10화 (10/150)

10화

“……서진우 대리.”

이번에는 그 표정을 마주한 백의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막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기획개발부 김석환 부장이 도착했습니다.”

똑똑,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들여보내요.”

백의현이 서진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서진우는 그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

잔뜩 상기된 채 이사실 문을 열었던 김 부장은 서진우를 발견한 뒤로부터 내내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의현은 왼쪽에는 김 부장, 오른쪽에는 서진우를 앉혀 둔 채 유리 탁상 위에 서진우의 기획서를 펼쳐 보였다.

“하반기 프로젝트는 이걸로 진행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TF팀 구성하고, 팀장은 여기 있는 서진우 대리가 맡습니다.”

백의현이 덤덤한 목소리로 지시한 내용에 서진우와 김 부장이 동시에 눈을 둥글게 떴다.

“배, 백 이사님. 그 안건은 재고를 해 보심이…….”

“왜요, 김 부장님 눈에는 이보다 더 괜찮은 기안이 있었습니까?”

백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김 부장의 말을 잘랐다. 언제 서진우에게 나긋하게 굴었냐는 양 찬바람이 쌩쌩 부는 칼날 같은 어투에 김 부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니. 제 말씀은, 프로젝트는 이걸로 진행하시는 거 저도 물론 찬성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

김 부장의 불만 섞인 눈동자가 서진우를 향했다. 어지간히도 서진우가 감투를 쓰는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서진우도 지금만큼은 김 부장 편이었다.

‘김 부장 새끼 화이팅! 빨리 대신 말해 줘요, 나 퇴사한다고!’

두 사람의 시선에서 선명한 불꽃이 튀었다. 평소와는 달리 기민하게 서진우가 보낸 텔레파시를 수신한 김 부장이 퍼뜩 고개를 돌려 외쳤다.

“서, 서진우 대리는 곧 퇴사할 예정이라 팀장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옳소! 서진우가 내심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퇴사?”

백의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날 선 시선이 느릿하게 서진우를 향했다. 서진우가 당황해 성급하게 입을 벌렸다.

“그, 어, 사정이…….”

“무슨 사정?”

“거, 건강이 안 좋습니다!”

“건강이 안 좋습니까?”

백의현이 미간을 좁히며 서진우의 말을 따라 했다. 서진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요즘, 쿨럭, 출근이 힘들어서, 쿨럭 쿨럭.”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 겁니까?”

서진우가 손을 모으고 과장되게 기침을 하자 백의현의 음성에 신중한 기색이 섞였다. 갑자기 심각해진 표정을 마주한 서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자세히? 솔직히 말해 퇴사하는 데에 거창한 이유까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생각해 둔 변명이 없었다. 서진우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낮게 한숨을 쉰 백의현이 이번에는 김 부장을 돌아보았다.

“퇴직 상담 직접 했습니까?”

“예? 아, 예.”

다시 칼날 끄트머리를 마주한 김 부장이 울상을 짓지 않으려 애를 쓰며 자세를 공손하게 고쳤다. 백의현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알겠군요. 서진우 대리 어디가 문제입니까? 의사 소견서는 읽어 보았겠지요?”

“……소, 견서요?”

김 부장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얼버무리려는 태도를 놓치지 않은 백의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안 받았습니까?”

“…….”

김 부장이 관자놀이에 식은땀을 매단 채 시선을 내렸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김석환 부장님.”

백의현의 목소리에 싸늘한 냉기가 서렸다. 김 부장과 서진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망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한탄이 지나갔다.

“아프다는 말만 믿고 퇴직원을 받았습니까? 처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개인 사유라고 임의로 결재해 올린 겁니까?”

“……그, 그게 아직 결재 안 올렸…….”

“설마 아프다고 하니까 먼저 나가라고 종용했습니까?”

백의현의 목소리가 이 이상 낮아질 수 없을 것처럼 가라앉았다. 김 부장이 당황해 홱 고개를 쳐들었다.

“아,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이사님. 저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닙니다. 전 그저 정말 서 대리의 말을 믿고…….”

그렇게 못된 사람인 김 부장이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백의현이 온기 없는 시선으로 벌게진 김 부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또 남 탓을 먼저 하는군요.”

“…….”

김 부장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백의현이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그가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항상 그렇게 일했습니까? 본인 마음 내키는 대로, 절차 같은 건 무시하고.”

“……아니, 저는…….”

“남이 쓴 기획안을 함부로 빼돌려 밀어주고 싶은 사원한테 쥐여 주고, 눈엣가시인 사람은 조용히 치워 가면서 그렇게 회사 돈 받고 살았습니까?”

“…….”

김 부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상사에게 당하는 모욕이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김 부장을 곁눈질하며 한숨을 삼켰다. 그야 김 부장도 억울한 부분이 있을 터다. 어떤 회사가 건강 사유로 퇴사하겠다는 사원에게 의사 소견서까지 받아 내려 하겠는가. 물론 사규가 그렇다 쳐도, 보통은 적당히 개인 사정으로 얼버무려 쉽게 처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변명할 말이 없겠지. 김 부장이 기획개발부를 이때껏 제 왕국인 양 휘둘러 왔다는 사실은 서진우가 제일 잘 알았다. 솔직히 서진우로서는 백의현의 말이 그렇게 얼굴색을 바꿀 정도로 모욕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평소 김 부장이 해 대는 언어폭력에 비하면 백의현의 말은 그저 사실 적시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김 부장이 차마 임원을 앞에 두고 성질대로 굴지 못해 속을 끓이는 동안, 그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거둔 백의현이 서진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 대리. 소견서 받아 올 수 있겠습니까?”

“네, 네?”

“건강이 안 좋다면 더더욱 퇴사는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할 생각입니까. 차라리 휴직을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백의현이 덤덤한 목소리로 서진우를 설득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굴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었다. 서진우가 정말 아픈 상태였다면.

“……사실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닙니다.”

결국 그럴싸한 핑계를 떠올려 내지 못한 서진우가 실토를 했다. 백의현이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럼 왜 퇴사를 하려는 겁니까?”

“……그게, 그냥…….”

서진우가 김 부장을 곁눈질하며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냥? 무슨 심각한 사유가 있는 게 아닙니까?”

“네에…….”

자포자기한 서진우가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던 사람이 별안간 아무 이유 없이 퇴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임원 입장에서는 한심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진우는 속으로 푹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떻게 솔직히 말하겠는가.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의 악행을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프로젝트를 떠넘기고 퇴사를 해야 하는 마당에 굳이 인사 문제로 지지부진하게 얽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백의현 전무이사가 화려한 직위만큼 대단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서진우는 귀티 나는 상사의 얼굴을 마주한 채 냉정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어제 그 많은 중역들 앞에서 프로젝트를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그런데도 다음 날 멀쩡하게 출근해 피해자인 서진우를 일대일로 호출할 수 있었던 김 부장이다. 그런 그가 고작 발령받은 지 일 년도 안 된 젊은 이사 탓에 잘려 나갈 리 없었다.

‘애초에 사장 라인을 잡고 십 년 넘게 버틴 놈을 어떻게 이겨.’

서진우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김 부장이 사장을 믿고 패악질을 부린다는 걸 모르는 기획개발부 사원은 한 명도 없었다.

서진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랫동안 표정을 굳히고 있던 백의현이 이내 흠, 하고 목울대를 울리며 도리어 빙긋 웃었다.

“그 말인즉 꼭 지금 당장 퇴사해야 할 만큼 급한 사정이 없다는 뜻이군요.”

불길할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에 김 부장과 서진우의 얼굴이 동시에 멍해졌다. 백의현이 날카로운 눈매를 휘며 삐딱하게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대었다.

“그럼 프로젝트 끝나고 하시죠, 퇴사.”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진우와 김 부장이 동시에 되물었다. 백의현이 오묘한 미소를 드리운 채 느긋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퇴사가 조금 미뤄지기야 하겠지만, 계속 기획 일을 할 생각이라면 서진우 대리에게도 성공한 프로젝트 경력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 틀리진 않았는데. 백번 맞는 말이긴 한데……. 서진우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말이 맞지만, 그놈의 미래를 생각하다가 죽은 게 고작 이틀 전 일이었다. 서진우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경력 때문에 이 지옥을 더 버텨 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유혹에 흔들리지 말자. 다짐하며 서진우가 비장하게 미간을 구겼다.

“이사님, 저는.”

“천만 원.”

그러나 백의현은 이번에도 엄청난 단어로 서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

단단하게 다잡았던 마음이 황망하게 허물어졌다. 얼빠진 서진우를 마주하며 백의현이 우아하게 자세를 고쳤다.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나면 인센티브를 보장해 드리죠.”

김 부장이 턱을 바닥에 떨굴 기세로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백의현은 오직 서진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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