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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9화 (9/150)

9화

“이쪽입니다.”

“아, 네에…….”

이사실 소속 비서는 일개 대리인 제게도 친절했다. 서진우는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눈치 없이 자꾸 말을 거는 하성민에게서 벗어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막상 이사실로 향하는 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역시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겠지. 하지만 보통 그런 일을 이사가 사원에게 직접 지시하지는 않지 않나?

부담감에 점심이 얹힐 것 같았다. 서진우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굳게 닫힌 회색 문 위에 사무실 주인을 알리는 금빛 문패가 걸려 있었다.

[백의현 전무이사].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사님, 기획개발부 서진우 대리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인터폰 너머에서 그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비서를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와.”

서진우는 낮게 탄성을 토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처음 들어와 보는 이사실은 그야말로…… 살풍경했다. 기획개발부도 풀이라고는 커다란 조화 화분 몇 개가 다였지만, 이사실은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 그런지 유독 황량함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부서 내의 조악한 조화와는 달리 생화일 것이 분명한 커다란 화분이 유리 벽 앞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회색이었다. 단이 나누어진 대리석 바닥은 반들거리다 못해 얼굴까지 비출 기세였다. 서진우는 과장을 보태 기획개발부 사무실만 한 이사실을 둘러보며 기가 질렸다. 이런 곳을 혼자 쓰면 일이 되나?

“서 있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요.”

그때 낮은 목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서진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백의현은 커다란 원목 데스크 앞에 앉아 있었다. 많이 바쁜지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키보드 소리를 뒤로하고 소파로 걸음을 돌렸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육 인용 소파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자 차가운 가죽이 부드럽게 하체를 감쌌다. 차갑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과 어울리게 웅장한 가구였다. 서진우가 자리를 잡음과 거의 동시에 그를 안내했던 비서가 찻잔을 받쳐 들고 돌아왔다.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에……. 감사합……니다.”

비서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흠잡을 곳 없이 우아한 태도로 서진우의 앞에 금으로 장식된 흰 찻잔을 내려놓고 차를 채워 주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이사실에 와서 차까지 대접받고 있자니 부담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홍차 별로예요? 난 커피 잘 안 마셔서.”

비서가 나간 후에도 서진우가 한참을 굳은 자세로 앉아만 있노라니 백의현이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서진우는 황급히 고개를 내젓고 잔을 들어 올렸다.

“아, 아닙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물론 서진우는 좋다, 싫다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홍차를 잘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문외한도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이 비싸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깨뜨리면 물어내야 한다. 서진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흘긋 맞은편 유리 벽을 곁눈질했다. 워낙 고층인 탓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푸른 하늘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신이 된 기분이 들지 않을까?

문득 얼간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나이까진 모르지만, 백의현은 아마 엄청난 동안이 아닌 한은 서진우와 동년배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누구는 이런 커다란 사무실에서 하늘을 내려다보며 일하고 누구는 좁은 데스크 구석에 처박혀 따돌림이나 당하고 산다. 별안간 그 갭이 실체를 지니게 된 추상물처럼 서진우를 덮쳤다. 거대하고 까마득한, 열등감과 비슷한 감각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드르륵, 의자 바퀴가 대리석을 구르는 소리에 서진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한 일을 끝마친 모양인지 백의현이 가까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진우는 그가 제 재킷 단추를 매만지며 중앙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편안하게 앉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백의현의 앞에도 같은 모양의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무실 구경은 다 끝난 모양이군요.”

백의현이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능숙하고도 우아한 자태에 넋을 놓고 있던 서진우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제 잔을 내려놓았다.

“아, 그, 죄송합니다.”

“미안할 것까지야 없습니다. 마음에 드나요?”

“네, 네에.”

서진우가 양손을 공손히 제 무릎 위에 얹었다. 차마 백의현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손등을 노려보고 있노라니 뺨에 닿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

백의현이 차를 마시는 짧은 시간 동안 서진우에게는 영겁처럼 길고 무겁게 느껴지는 정적이 지나갔다.

“서진우 대리.”

이번에도 그 정적을 먼저 깨트린 이는 백의현 이사였다.

“나 모릅니까?”

백의현이 잔을 내려놓으며 심상하게 물었다. 서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질문이 영 이상했다.

“네?”

“나 몰라요?”

자신이 잘못 이해했나, 하고 되물은 서진우에게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서진우는 당황했다.

“……이사님을……모른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겠죠……?”

버벅거리며 내놓은 답변은 누가 들어도 멍청해 보였다. 서진우는 제 머리를 세게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흠.”

백의현이 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었던 모양이다. 서진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무 비꼬는 것처럼 들렸을까? 하지만 자신을 모르냐는 말에 대체 무슨 답변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자리가 백화점 VIP용 고객 서비스 센터도 아니고, 번듯이 그의 이름을 매단 이사실 안에서 대면 중인데.

“뭐, 좋습니다.”

서진우가 식은땀으로 등 뒤를 적시거나 말거나 아랑곳 않은 백의현이 상체를 등받이에 묻었다. 이윽고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어제 발표한 기획안이 마음에 들어서 불렀습니다.”

백의현이 돌아보지도 않고 등 뒤로 손을 내밀자,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철을 건넸다. 백의현이 까만색 서류철에 정리된 문서를 팔락, 소리 내어 넘겼다.

“확인해 보니 서진우 대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제출한 기획안이 상당히 많더군요. 특히 입사 초부터 대리로 승진했을 무렵까지 아주 활발한 아이디어 제시를 해 왔고요. 그중 실제로 상품화를 시도한 기획이 두 건이고.”

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백의현의 중얼거림에 서진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결과물을 눈으로 훑던 백의현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둘 다 충분히 성공하고도 남을 만한 기획이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결과가 좋지 않았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확인해 보니 상품 개발 단계에서 문제가 있었던 데다 마케팅에서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더군요.”

“……네에…….”

입이 바싹 말랐다. 서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백의현이 서류에서 눈을 들어 그런 서진우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지원을 해 주려 합니다.”

역시나.

백의현이 서류철을 탁, 소리 나게 덮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 두었다. 그가 양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얹으며 상체를 숙였다.

“이번 프로젝트에 성공하면 서진우 대리는 승진뿐 아니라, 앞으로 회사에서 주목하는 인재가 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요.”

“…….”

은근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서진우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내렸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일 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의현이 건네기에는.

“……저는…….”

혀끝이 단단하게 굳은 것처럼 뻣뻣했다. 서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유혹. 그러나 서진우는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전 프로젝트가 잘 되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상사의 방해.

기획개발부에서 김 부장이 원하지 않는 기획은 통과될 수 없었다.

서진우는 말아 쥔 주먹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역시 그 지옥을 다시 맞닥뜨리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이사님, 저는.”

퇴사할 겁니다. 그 사실을 직접 백의현에게 고하기 위해 결심을 다진 서진우가 비장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시선이 저를 응시하는 검고 매서운 눈과 마주쳤다.

“내친김에 김석환 부장도 불러서 못을 박죠.”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백의현이 엄지와 검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맥을 끊는 소음에 놀라 서진우의 말문이 막힌 사이 등 뒤에 서 있던 비서가 걸음을 돌렸다. 그 걸음이 김 부장을 호출하기 위함임을 깨달은 서진우가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사님! 저는 못 합니다. 차라리 하성민 대리를…….”

“남의 아이디어를 베끼기나 하는 놈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백의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진우는 아예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배, 백 이사님께서 언제부터 기획안을 직접 검수하셨다고 이러세요.”

“원래 이사진 업무 중에 실무진 감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관심 가질 만한 신규 프로젝트가 없었을 뿐이죠.”

백의현이 서진우의 항의를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서진우는 황당해서 제 가슴을 퍽퍽 때리고 싶어졌다. 분명 과거에 똑같은 프로젝트를 하성민이 맡았을 때는 관심은커녕 한 줄 피드백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변했단 말인가.

“제게는 과분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럼 아이디어를 잘 뽑지 말았어야죠.”

“이미 김 부장님이 한 번 되돌려 보낸 프로젝트인데, 부장님이 기분 상하시기라도 하면.”

“부하 직원 아이디어 빼돌리는 상사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백의현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얄미워 보인다면 자신이 너무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걸까? 서진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 표정을 마주하다 이내 한숨을 쉬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래, 결국 자신이 판을 엎어 버린 탓이었다. 그냥 얌전히 아이디어 내주고 퇴사할걸.

백의현은 어깨를 늘어뜨린 서진우를 관찰하며 즐거운 듯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지금 이 모습도 나쁘지 않군요.”

“상상하던 이미지가 뭔데요…….”

서진우가 맥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어들어 가다시피 한 그의 소극적인 반항에 백의현이 짧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예전엔 눈도 잘 못 마주치고, 말도 잘 못 해서 난 또 집안에 우환이라도 있나 했는데.”

“…….”

“그때보다 훨씬 말을 잘해서요. 그 방향성이 좀 의외이긴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에 서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의현은 손으로 제 입가를 문지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우는 웃을 수 없었다. 백의현이 기억하는 시절을 서진우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 또한.

‘서 대리에게는 실망했습니다.’

움츠러든 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속삭이고는 돌아섰던 젊은 전무이사. 고작 십여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으나 서진우는 그 뒷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했다. 완전히 윗선에까지 밉보여 절망했던 순간이었으니까.

서진우의 묘한 표정을 마주한 백의현의 입가에서도 점차 웃음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심각해진 얼굴로 그가 상체를 숙여 시선을 맞춰 왔다.

“정말로 무슨 일이…….”

“없었습니다.”

서진우가 단호하게 백의현의 말을 잘랐다. 그래, 이 사람도 똑같다.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제 라인을 만들기 위해 간을 보는 썩어 빠진 경영진 중 하나일 뿐이다.

“그냥, 이제 정신을 차렸을 뿐입니다. 뭐가 더 중요한지 제대로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의 사내를 더는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서진우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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