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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8화 (8/150)

8화

무성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위로 그가 뱉어 낸 하얀 연기가 동그랗게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느슨한 넥타이 위로 사원증만 달랑 걸친 자신과는 달리 한여름에도 재킷 단추까지 완벽하게 잠근 모습이 꼭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우리 대화를 들었을까?

서진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금 전 대화를 빠르게 복기했지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하성민의 얼토당토않은 변명뿐이었다. ……별일 없겠지.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모른 척을 하려 막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선배?”

갑자기 멈춰 선 서진우가 의아했는지 목소리를 높여 부르던 하성민이 이내 백의현을 발견하고 짧은 탄성을 토했다. 아……. 서진우는 속으로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진심 짜증 나는 새끼가 아닐 수 없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백의현은 두 사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담배를 마저 태웠다. 서진우는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저쪽에서 먼저 무시해 줄 요량인 모양이었다. 그럼 어서 내려가야…….

“서진우 대리.”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백의현이 나긋하게 서진우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우는 슬쩍 마저 옮기려던 발걸음을 쭈뼛쭈뼛 되돌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의현이 서진우를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만나네.”

그가 장초를 부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진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왔다. 시원한 향에 묵직하고 씁쓸한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백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백의현의 미소에 놀라 서진우가 굳어 있는 사이, 등 뒤에 서 있던 하성민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와 깍듯하게 상체를 숙였다. 백의현이 그제야 눈을 돌렸다.

“아, 그쪽도 있었군요. 이름이…….”

“하성민입니다.”

“그래요, 하 대리.”

백의현의 목소리는 무심하고 냉정했다. 하성민이 서진우보다 키가 크니 안 보였을 리 없음에도 마치 지금 처음 본다는 듯한 태도였다.

“서 대리, 안 그래도 호출하려 했는데 잘됐네요.”

하성민이 기가 눌려 찌그러지거나 말거나 곧장 서진우에게로 시선을 돌린 백의현이 다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예? 저를 왜…….”

서진우는 어리벙벙해져 눈을 둥글게 떴다. 이사가 왜 일개 사원인 자신을 호출한단 말인가? 의문을 숨길 생각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낸 서진우를 마주하며 백 이사가 한 손을 느긋하게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긍정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어제 이야기했는데, 잊었습니까?”

그가 소리 내어 하하, 웃고는 서진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따 봅시다.”

단단하고 묵직한 손이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는 감각이 아찔했다. 감히 임원님께 격려를 받다니. 서진우는 부담감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갈 때까지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한 채, 등 뒤에서 무슨 일이냐고 닦달을 해 대는 하성민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긍정적인 이야기라니, 프로젝트 선정 여부에 관한 것 아니었던가?

그 결과를 전무이사가 사원에게 직접 알려 준다고?

왜?

***

만일 서진우가 승진에 야망이 있거나, 퇴사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백의현이 남긴 말은 제법 짜릿한 흥분을 선사해 주었을 것이다. 무려 ‘이사님’이 직접 프로젝트를 밀어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회사에 더는 미련이 없는 서진우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관심이었다.

‘부담스러워, 부담스럽다고.’

일하는 내내 호출하겠다는 백의현의 말이 머릿속에 감돌아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거 자칫했다가는 퇴사가 물 건너가는 건 물론이요, 임원이 주시하는 프로젝트의 팀장 타이틀까지 달게 될 판이었다.

‘망할 프로젝트라니까!’

서진우는 급기야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에 이르렀다. 기획서 자체는 과거와 동일한데 왜 뜬금없는 백 이사가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예전에는 한심하다는 듯 경멸했던 프로젝트에!

“서진우 대리님.”

등 뒤에서 들려온 무뚝뚝한 목소리가 서진우를 현실로 되돌렸다. 서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아, ……수정 씨.”

짧은 머리를 하나로 모아 질끈 묶은 마케팅부 여수정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핸드폰 떨어트리셨어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서진우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작은 체구 때문인지, 서진우가 한 손에 가볍게 그러쥘 수 있는 핸드폰이 여수정의 손 위에서는 유독 커 보였다.

“아, 감사해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네요.”

사무실 바닥이 부드러운 러그 재질로 되어 있는 탓에 떨어트린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미소 지었다.

“네. 그럼 이만.”

서진우에게 핸드폰을 돌려준 여수정이 곧장 걸음을 돌렸다. 용건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멀어지는 그의 묶은 머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서진우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며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여수정 씨, 아직 퇴사하기 전이구나.

지옥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던 탓에, 서진우는 많은 걸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복권 같은 건 사러 갈 시간이 없었고 주식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누가 무슨 주식을 했는데 얼마가 올랐다거나 하는 잡담은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만일 과거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종목 하나 정도는 알아 두는 건데. 서진우가 내심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누구 아이가 아팠다느니, 옆 부서 모 사원이 모 사원과 비밀 연애를 한다느니 하는 회사 일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일들도 서진우는 잘 알지 못했다. 워낙 자질구레한 이야기에 본인이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회사에서 친한 사람이 없는 서진우에게 굳이 그런 소문을 전해 주는 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서진우가 기억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여수정의 퇴사였다.

‘생각해 보니 프로젝트 광고가 나간 이후였지.’

상품 개발이 거의 끝나 본격적인 마케팅에 착수했을 무렵 광고 시안 회의에서 일이 터졌다. 서진우는 조용하던 여수정이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입사 이래 처음 보았다.

‘지금 이런 시대에 여성을 상품화하는 콘셉트는 돌만 맞는다고요! 광고 하나로 브랜드 이미지 다 날아갑니다!’

‘어디서 상사한테 소리를 질러! 노이즈 마케팅 몰라?’

작은 목에 핏대까지 올려 가며 화를 내던 여수정과, 타 부서 직원의 건방진 반항에 잔뜩 노해 호통을 치던 김 부장. 두 사람의 싸움은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부서에까지 소문이 났을 정도로 제법 화제가 되었더랬다. 물론 여수정이 졌다. 결국에는 김 부장과 하성민의 뜻대로 여성을 대상화한 시대착오적인 광고가 방송을 탔고, 그 결과…….

‘김 부장 같은 사람이 버티고 있는 한 이 회사에는 미래가 없어요.’

여수정이 퇴사를 했다.

서진우는 여수정과 친한 편은 아니었다. 자신은 기획개발부 소속이었고, 여수정은 마케팅부에 소속되어 있어 애초에 프로젝트로 엮이기 전에는 서로 얼굴이나 겨우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퇴사 전 여수정은 서진우에게 조언한 바 있었다.

‘서 대리님도……. 더 무너지기 전에 벗어나셔야 해요.’

안경 너머 눈동자에 나름의 진심과 걱정을 담아서, 그렇게 말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구나. 아직 수정 씨가 회사에 있구나. 서진우는 어쩐지 그리운 기분으로 멀어지는 여수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위가 고여서 썩어 버린 집단에서 성실하면서도 신념을 잃지 않은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잊고 살았던 존재가 새삼 반가웠다.

“누구예요? 귀엽다.”

서진우가 느꼈던 찰나의 감회가 하성민의 말 한마디에 조각이 났다. 서진우는 짜증스러운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하성민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점심 맛있는 거 드셨어요?”

하성민이 슬쩍 서진우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몇 시간 전 옥상에서 자신에게 변명하던 일 따위는 없었다는 양 친근한 태도였다.

“이사실에는 언제 가세요?”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서진우가 냉담하게 대꾸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하성민은 끈질겼다.

“아까 그분은…….”

“내가 핸드폰 떨어트려서 주워 주신 거야. 신경 꺼.”

“그렇구나. 선배가 평소와는 달리 웃으면서 얘기하길래 궁금했어요. 그나저나 저분도 되게 신기하네요.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표정이 없지?”

하성민이 서글서글하게 잡담을 늘어놓았다. 농담인지 뒷담인지 모를 말이 불쾌했다. 서진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너보다야 인간적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남의 기안을 그대로 베끼고도 뻔뻔하게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냐는 뜻을 돌려 말해 보았다. 역시나 곧장 알아들은 하성민의 볼 근육이 뻣뻣해졌다.

“……역시 몰랐다는 제 말 안 믿으시는 거죠.”

“몰랐다고 해도 남의 기획안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데에는 변함없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새끼야. 서진우는 속으로 빈정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빤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하성민은 서진우에게 더 집적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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