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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7화 (7/150)

7화

서진우가 간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금세 김 부장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과장되게 크흠, 헛기침을 하며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크흠, 하지만 서 대리. 이렇게 갑작스럽게…….”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닙니다.”

서진우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가 아차, 하고 황급히 눈을 내렸다. 반성하는 척 또 깜박했다.

“오래 고민했습니다. 제가 부서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인 건 아닌지. 부장님께서는 절 잘 대해 주시려 노력하셨는데 도저히 따라잡지도 못하고……. 술자리도 몇 번 권유해 주셨는데 안 가려고만 했던 것도 생각이 나고.”

그래, 그놈의 술자리. 서진우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서진우가 본격적으로 찍히게 됐던 계기가 그 술자리였다. 매춘을 겸하는 술집에서 모르는 여성이 달라붙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비위를 맞춰 줄 자신이 없어 도망쳤더니 어느 순간부터 혼자 고고한 척하는 아싸가 되었지.

서진우는 여전히 고민하는 척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김 부장을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괜히 붙잡는 척하지 말고 서로 쿨하게 헤어지자. 너도 나 싫잖아. 속으로 욕설을 뒤섞어 기도를 올리고 있노라니 마찬가지 결론을 내린 듯한 김 부장이 손에 든 사직서를 다시 원래 모양대로 접으며 헛기침을 했다.

“뭐,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우선 받아는 두겠네. 그럼 그, 프로젝트는…….”

서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지. 이제 서진우는 자신의 기획을 회사에서 얼마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 여기서 제 아이디어에 권리를 주장한다면 김 부장은 절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깟 아이디어, 포기하고 말지.

“제 아이디어가 시행된다면 기쁘겠지만 꼭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고……. 어차피 부장님께서 같이 고안해 주신 거나 마찬가지인 기획인데 꼭 제가 맡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진우가 준비해 두었던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그제야 김 부장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다.

“그렇지? 서 대리, 자네가 참 사고 하나는 바르단 말이야.”

그가 흐뭇하다는 듯 양껏 뺨을 끌어 올려 웃으며 몸을 돌렸다. 속이 뻔히 보인다, 게으른 돼지 새끼야. 서진우는 한심한 눈으로 부장을 응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퇴직 처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어, 나만 믿으라고.”

김 부장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 볼일이 없다는 듯 대놓고 등까지 돌린 채였다. 하지만 서진우에게도 김 부장 얼굴을 계속 대면하고 있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제 인사를 건성으로 받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진우는 남들이 볼 수 있도록 공손히 허리까지 숙여 인사한 후 룰루랄라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삼 주 뒤면 이 개 같은 회사와도 안녕이라고 생각하자 절로 콧노래까지 났다.

“흐흥, 흥.”

“기분 좋은 일 있으셨나 봐요, 선배.”

저도 모르게 진짜로 노래를 흥얼거렸나 보다. 옆자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진우의 얼굴에 서려 있던 미소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맞다, 이 새끼도 있었지…….’

서진우가 냉담하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언제 온 건지 금세 자리 세팅까지 끝내 놓고 뻔뻔하게 일하는 척하는 꼴이 같잖았다. 그래 봐야 지각한 거 사무실 사람들이 뻔히 다 봤는데.

“너라면 좋겠어? 기획을 통으로 빼앗길 뻔했는데.”

절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김 부장이야 자신의 인사를 관리한다지만 하성민은 아무것도 아닌데 굳이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서진우의 냉대에 하성민의 미소가 뻣뻣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진우는 화면 잠금을 풀고 워드를 켰다. 삼 주 안에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인수인계서까지 작성하려면 시간이 빠듯한 편이었다.

“오해, 오해가 있었어요.”

하성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 오해? 절로 코웃음이 샜다.

“그래, 알겠어. 일이나 하자.”

서진우가 무심하게 대꾸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심지어 하성민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서진우의 차가운 태도에 하성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직원들이 아닌 척 두 사람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하성민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서진우의 팔을 붙들었다.

“선배, 제발…….”

“!”

길쭉한 손가락이 손목을 휘감자 순간 불안하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쿵,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텀블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하성민을 뿌리친 서진우가 주먹을 쥔 채 하성민을 노려보았다.

“함부로 손대지 마.”

“……죄송해요.”

서진우의 예민한 반응에 놀란 하성민이 제 팔을 움츠리며 얼떨떨하게 사과했다. 서진우는 가빠지려는 호흡을 애써 억누르며 이성을 되살렸다.

“…….”

뒤늦게 사무실이 고요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팀 내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과 하성민을 향해 있었다. 서진우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와. 밖에서 얘기해.”

***

하성민은 흡사 주눅 든 강아지 같았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졸졸 서진우의 뒤만 따르는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두 사람에게로 집중됐다. 주변 시선을 의식한 행동인지, 정말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서진우는 그런 하성민이 불편했다. 누가 보면 자신이 후임 잡는 못된 선임처럼 보일 것이 뻔했으므로.

‘진짜 피해자가 누군데.’

서진우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옥상 정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계절 구분이 어려운 실내와는 다른 세상인 양, 뜨겁고 습한 공기가 서늘한 피부 위로 훅 끼쳐 왔다.

“으, 더워. 꼭 여기서 이야기해야 해요?”

하성민이 제 목깃을 붙들고 펄럭이며 혀를 내밀었다.

“재킷 벗든가.”

서진우는 바지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하성민의 물음에 짧게 대꾸했다. 하성민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담배가 당기는 참이었다. 그의 편의를 봐주자고 단둘이 실내에서 대화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얘기해, 이제.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서진우의 말에 하성민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담배를 한 대 빼어 문 서진우가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담배를 태웠던 게 죽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절로 쓴웃음이 샜다.

“선배, 많이 화나셨죠…….”

하성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눈만 들어 서진우의 안색을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주눅 들고 눈치를 보는 건 서진우였지 하성민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서진우는 대답하는 대신 곁눈질로 하성민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하성민이 난처한 듯 헤프게 웃어 보였다.

“알아요, 배신감 느끼시는 거. 하지만 전 정말 몰랐어요! 부장님께서 제가 아이디어를 너무 못 내니까, 이런 거라도 한번 참고해 보라고 주신 게 하필…….”

“참고용으로 썼다기엔 발표 자료가 똑같던데.”

서진우의 지적에 하성민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는 하성민이 짜증스럽다는 듯 입매를 굳히고 미간을 슬몃 좁히는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러나 하성민은 이내 다시 비굴하게 눈썹을 휘며 표정을 바꾸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죽일 놈이죠. 하지만 정말 선배 거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서진우는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시야를 차단했다. 하얀 연기 너머로 희미해진 하성민의 얼굴은 정말로 무구해 보였다. 마치 자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일에 가담한 사람처럼.

‘하.’

기가 차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럴 리가 없다.

하성민은 알고서도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과거에 그가 직접 서진우에게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선배도 알죠? 선배 병신인 거.’

‘……뭐?’

‘기획서를 뺏겨도 몰라, 데이터를 털려도 몰라……. 아무리 내가 잘생겼어도 그렇지, 같은 남자한테 정신 팔려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고.’

‘무슨 얘기야, 하 대리…….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는지 아는 거야?’

‘그럼요, 알죠. ―선배 저 좋아하잖아요.’

광고로 인한 논란이 거세어지는 바람에 프로젝트 팀이 후폭풍에 시달리던 가을의 어느 날, 만취한 하성민이 내뱉었던 진심을 서진우는 잊지 않았다.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벌건 얼굴로 서진우의 어깨에 제 팔을 두른 채 눈썹을 찡그리며 웃던 하성민. 그 말에 얼어붙었던 자신과, 이어졌던 속삭임.

‘뭘 또 그런 눈으로 봐요? 기분 나쁘니까 눈 깔아요. 눈깔 뽑아 버리기 전에.’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이 진탕으로 짓밟혔던 그 순간을.

서진우는 쓰레기통에 맥없이 재를 떨어냈다.

“그래, 알겠어. 믿어 줄게.”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퇴사할 거니까.

서진우의 대답에 하성민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서 선배라면 내 진심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선배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냥 호구라고 해. 굳이 돌려 말하지 말고.”

서진우가 담배를 다시 입가로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 한 모금이었다. 서진우의 말에 하성민의 표정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예? 제가 어떻게 선배를 그렇게…….”

“그렇게 생각한 적, 정말 한 번도 없어?”

서진우가 고개를 돌려 하성민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일순 말문이 막힌 하성민이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그래, 그 짧은 침묵이 진실이었다.

서진우는 피식 웃으며 짧아진 꽁초를 쓰레기통 모서리에 비벼 껐다.

“걱정 마. 어디 가서 말 안 해. 어차피 나 곧 퇴사할 거거든.”

“예?”

놀라 반문한 하성민이 대답 없이 돌아서는 서진우의 뒤를 황급히 따라붙었다.

“퇴사를 한다고요? 하지만 그럼 프로젝트는…….”

“하고 싶으면 너 가져가든가. 어차피 발표는 둘 다 했으니까 네 이름으로 진행해도 뭐 어때.”

서진우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성민과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키가 조금 더 큰 하성민은 보폭도 서진우보다 컸다.

“선배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서진우의 앞을 가로막다시피 하고 멈춰 선 하성민이 긴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서진우는 제 앞에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를 무표정하게 올려다보았다.

“부장님께는 이미 퇴사한다고 이야기해 뒀고, 프로젝트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진심이군요.”

하성민의 눈이 빛났다. 서진우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내심 허탈해졌다. 어떻게 겉가죽만 보고 이딴 놈을 좋아했을까.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김 부장이나 하성민이나 똑같았다.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비켜.”

서진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하성민을 가볍게 밀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정말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하성민은 자신의 기획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그와 김 부장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말아 먹는지 반년여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하성민이 탐내는 자신의 기획은 결국 휴지 조각이 되는 게 나았을 정도로 망할 것이다.

희미하게 웃으며 유리문을 열려던 서진우가 흠칫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향이 담배 연기와 뒤섞인 채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번져 왔다. 서진우는 향이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의현 전무이사가 벽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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