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으름장 같던 마지막 말로 미루어 보아 김 부장은 돌아오면 제게 먼저 지랄하고 싶어 할 것이 자명했다. 서진우는 그 전에 먼저 사직 의사를 밝히고 퇴사할 작정이었다.
삶을 되찾고 정신을 차린 서진우는 이제 김 부장의 언어폭력에 일 분도 더는 노출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개소리를 한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뚝배기를 깨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서진우는 임원들 사이에 끼지 못한 채 몇 걸음 뒤에서 도축을 기다리는 가축처럼 선 김 부장을 흘끗 돌아보았다. 축 처진 어깨와 무거운 발걸음이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부디 엄청난 징계를 받고 부서 이직까지 했으면 좋겠다. 내심 소원을 빌며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려던 찰나였다.
“!”
고개를 돌린 서진우가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반대쪽 복도에서 백의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왜 다른 임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불현듯 백의현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딱히 백 이사를 훔쳐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사탕을 도둑질하려다 들킨 아이처럼 괜스레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눈이 마주쳤으니 이,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생각해 보면 오늘 벌써 두 번이나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생각하며 서진우가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아무래도 임원이라 그런지 반사적으로 거북했던 까닭에 눈인사를 마친 서진우가 곧장 시선을 돌리려는데,
별안간 백의현이 발을 돌려 성큼성큼 서진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기획개발부 서진우 대리. 맞습니까?”
우뚝, 서진우와 한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백의현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덮쳐 온 위용 있는 그림자에 짓눌린 서진우가 숨을 삼켰다.
“어, 네……. 맞습니다……?”
새삼스레 제 이름과 직책을 확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쩐지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어컨이 너무 센 탓일까? 팔뚝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났다. 포식자를 눈앞에 둔 초식 동물처럼 서진우의 입안이 긴장으로 메말라 빠듯해졌다. 설마 김 부장과의 면담 자리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무슨……일이신지…….”
“조금 전 발표, 인상 깊게 봤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긴장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부드럽게 덮어 주듯, 백의현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에 서진우가 저도 모르게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 미팅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기획안에 제대로 된 피드백을 주지 못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차피 앞 순서 발표 때 미리 다 들었겠지만.”
“아……. 네, 감사합니다.”
서진우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야 고마운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고작 이런 인사를 전하려고 전무이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발걸음을 돌려 가며 자신을 붙잡았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아마 별일 없으면 서 대리 기획이 선정될 겁니다.”
그런 서진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시원한 음성이 유쾌하게 다음을 알렸다. 서진우는 제 어깨에 툭, 닿는 커다란 손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군요.”
백의현의 웃는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날카롭고 매서워 보이던 얼굴이 미소를 짓자 전혀 다른 인상으로 뒤바뀌었다. 뾰족한 눈매가 가늘게 휘니 그는 꼭 장난거리를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백의현이 넋을 놓은 서진우의 어깨를 재차 두어 번 두드리고는 경쾌하게 걸음을 돌렸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서진우는 멀어지는 구둣발 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보자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획이 내 이름으로 선정된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서진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분명 사활을 걸고 열심히 기획한 콘셉트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하성민과 김 부장에게 맥없이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서진우는 감정에 휩쓸려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콘셉트 아이디어가 통과된다는 것은, 그 프로젝트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임을.
‘절대 안 돼.’
서진우가 황급히 걸음을 돌리며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프로젝트 팀장이 된다면 절대 퇴사할 수 없다. 회사에서 사직서를 받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잠수 퇴사라도 해 버릴까?’
극단적인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서진우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대리 직급을 걸고 그런 충동적인 짓을 저지른다면 앞으로 이직할 때 이쪽 업계로는 눈 돌릴 생각도 말아야 할 터였다.
그렇다고 프로젝트를 담당하자니…….
“진짜 싫어. 난 못 해.”
서진우가 진저리를 쳤다. 비록 팀원으로 참여하기는 했으나, 서진우는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지옥 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성분은 물론이고 십오 초짜리 광고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겨우겨우 출시는 했지만 노이즈 마케팅 소리를 들으며 비난받던 상품은 결국 반 분기도 팔리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게다가 그 과정은 또 어찌나 지저분했던가. 김 부장은 기획개발부 수장으로 자신도 참견할 권리가 있다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일에 자꾸 숟가락을 얹으려 들었다. 오죽하면 김 부장에게 설설 기어 대던 하성민조차도 종종 짜증을 낼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 엉망진창인 프로젝트의 운전대를 자신이 잡아야 한다고?
‘무조건 이번 주 안에 퇴직원에 도장 찍는다.’
서진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결연했다.
***
“서 대리, 당장 내 자리로 와!”
다음 날 출근하기가 무섭게 김 부장의 호통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서진우는 자신을 향하는 긴장감 어린 직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섰다. 정규 출근 시간에서 십 분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도 옆 하성민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쪽팔려서 연차라도 당겨 쓴 모양이지.’
서진우는 전일 미리 작성하고 출력까지 해 두었던 사직서를 품 안에 밀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김 부장 음성에 노기가 잔뜩 서린 것을 보아하니 전일 어지간히도 깨진 모양이 분명했다. 하기야, 퇴근 시간까지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화가 아직도 나 있을 만했다. 서진우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으며 김 부장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김 부장은 검은 가죽 의자에 전신을 기대어 앉아 씩씩거리며 화를 참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안색이 볼만했다. 서진우는 자신을 향한 분노가 곧 쏟아지리라 각오하며 내심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앉지.”
그러나 의외로 김 부장은 자신을 다스리려 애쓰는 중인 모양이었다. 이를 악물고 있으면서도 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를 연출한 김 부장이 여전히 멀뚱히 선 서진우를 못마땅하게 올려다보았다.
“안 들려? 앉으라고!”
“……아, 넵.”
잘못 들은 줄 알았네. 서진우는 얼떨떨해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는 김 부장과 독대할 때 단 한 번도 앉아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서진우가 얌전히 자리에 앉자, 김 부장이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는 푸르르 떨리는 김 부장의 볼살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아직도 제게 잔뜩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한데, 이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평소라면 십 초도 못 참고 에이포 용지 뭉치가 날아들었을 텐데. 중역의 힘이라는 게 대단하긴 한가 보네. 속으로 조소하고 있노라니 김 부장이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다시 서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서 대리. 어제는 말이야.”
뜻밖에도 김 부장은 웃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뺨과 눈매는 웃음보다는 찡그림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어제, 어제 그 일은……,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거 맞, ……는데…….”
잠시 눈썹을 찡긋거리거나 입술을 실룩거리며 표정을 완성해 내려던 김 부장이 꾹 입을 다물었다. 잘못했다는 인정을 하는 게 정말 죽기보다 싫은 표정이었다. 서진우는 어쩐지 관객이 된 기분으로 김 부장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구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결국 웃는 것을 포기한 김 부장이 화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그렇지 임원 회의에서 그딴 짓을 하다니, 자네가 정신이 있는―.”
“그 건에 대해서 말씀입니다만.”
서진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김 부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김 부장이 움찔 입을 다물었다. 항상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서진우가 제 눈을 빤히 마주 보니 놀란 것 같았다. 서진우는 노여움 위로 혼란과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하는 김 부장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장님.”
“……어?”
뜻밖의 말에 김 부장이 거북이처럼 눈을 끔벅였다. 서진우는 무릎 위에 공손히 두 주먹을 올리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아무리 상황이 억울했어도 부장님의 뜻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어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더라도 임원분들이 모여 계신 자리에서, 그렇게 부장님을 공격하는 것처럼 굴다니. 부하 직원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했습니다.”
적절한 때에 시선을 떨어뜨리며 눈썹을 아래로 휘었다. 진심으로 송구스러워하는 모습을 연출하자 어리둥절해하던 김 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등받이에 양껏 등을 기대 호통을 쳤다.
“어험,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너는―.”
“그런 의미에서 받아 주십시오.”
“으응?”
서진우가 김 부장의 말을 다시금 막으며 품 안에서 사직서를 꺼냈다. 그는 오늘 김 부장의 화풀이를 조금도 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갑작스레 내민 서류를 의아하게 받아 든 김 부장의 눈이 내용을 훑어 내려가며 점차 커다래졌다. 서진우는 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직서를 읽고는 종이 너머로 제 기색을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흠흠, 하고 제 목을 가다듬은 김 부장이 은근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네, 맞습니다.”
서진우는 주눅 들어 보이려 최대한 어깨를 움츠렸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제 일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이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망할 회사에 자신은 너무 과분했다.
“이번 달까지만 근무하고 퇴사하고 싶습니다,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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