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긴장하지 않으려 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가득한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직전, 하성민이 발표 자료로 활용했던 파일과 완전히 동일한 파일이 열렸다. 서진우는 마지막으로 레이저 포인터를 손에 쥔 후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감 있는 하성민의 발표 태도는 분명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남이 제작한 자료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숙지한 데에 불과한 발표자가, 글자 하나까지 직접 입력한 제작자의 발표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서진우는 일부러 각 페이지별로 자신이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 아이디어의 원천은 어디인지 등을 세세하게 언급해 가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상입니다.”
덕분에 발표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 기획안이 서진우의 것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툭, 화면이 마지막 장으로 넘어갔다. 서진우는 팔을 내렸다.
“발표 끝났습니다, 부장님. 질의응답을 시작해도 될까요?”
흥분 탓에 약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서진우가 마침내 김 부장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김 부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서진우의 질문에 이를 악물었다. 까득, 하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샜다.
“……지, 지, 질문 받겠습니다.”
간신히 입을 연 김 부장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푹 꺼진 목소리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간헐적으로 임원 몇 명이 불편한 듯 헛기침하는 소리만이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서진우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침묵을 느끼며 하성민을 응시했다. 하성민은 어둠 속에서도 희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서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완전히 얼어붙어 금붕어처럼 입술만 벙긋대는 꼴이 우스웠다. 그의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서진우는 참을 수 없는 우스움과 냉정한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씨발 놈아, 내가 아직도 등신 호구 새끼인 줄 알아?
“질문, 있습니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가 살얼음판 같은 정적을 깨트렸다. 서진우가 눈을 들어 올렸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을 들어 올린 백의현 전무이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칼날 같은 시선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아났다. 서진우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앞전 발표와 완전히 동일한 기획서인데, 우연……일 리는 없고.”
백의현이 서류철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들어 올렸다. 짙은 눈썹이 슬몃 일그러져 있었다.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표정한 서진우와 파랗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는 김 부장, 그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인 하성민을 순차적으로 훑었다. 그러나 백의현은 오롯이 서진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진우는 마른침을 삼키고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섰다. 드디어 스스로를 증명할 시간이었다.
“제가 이 기획서를 완성해서 김석환 부장님께 송부드린 일자는 지난주 수요일입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서진우는 자꾸만 미끄러지려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일부러 프로젝터 공유를 끄지 않고 메일함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벽에 확대되어 비친 마우스 커서를 따르는 게 보였다. 서진우는 보낸 메일함에 들어갔다.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획 관련 이메일은 첫 페이지 상단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미쳤나 봐, 진짜네. 다른 직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백의현이 천천히 내용을 소리 내어 읊었다.
“‘콘셉트 기획안 보고의 건.’ 4월 7일 (수) 21시 13분.”
백의현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회의실에 자리한 이들이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서 서진우와 하성민의 기획서를 집어 들었다.
“하성민 대리.”
백의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이름이 불린 하성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커다란 덩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하성민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서진우 대리의 아이디어를 훔쳤습니까?”
“아, 아닙니다!”
폐부를 직설적으로 찌르는 질문에 하성민이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서진우는 빛 아래에 드러난 하성민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성민의 대꾸에 백의현이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서진우 대리는 보고 메일을 지난주 수요일 밤에 발송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하성민 대리는 문서를 먼저 작성했다는 증빙 자료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게……저는.”
하성민은 당황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서진우는 그 시선에 어린 선명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모멸감, 황당함, 당혹스러움, 그리고 ‘기어오른 자’에 대한 분노.
과거의 서진우라면 ‘감히’ 저토록 위압적인 시선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성민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정말 과거의 그 등신이었다면 ‘감히’ 이런 짓은 저지르지도 못했으리란 것을.
“어딜 봅니까? 나는 하성민 대리에게 물었습니다.”
백의현의 싸늘하고 날카로운 질문이 하성민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하성민은 화들짝 놀라 임원석을 돌아보았다가, 이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그러니까 그게…….”
프로젝터 불빛이 그의 떨리는 손등을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서진우는 하성민이 이토록 말을 더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모든 사원의 시선이 제게 꽂혔다는 압박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아까 남의 아이디어로 발표를 할 때는 천부적으로 시선을 즐기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지. 서진우는 속으로 빈정거리며 눈을 내렸다.
“저, 저는, 그러니까……. 서 대리님의 것인 줄은 모르고…….”
결국 진실을 토로한 하성민이 도움을 구하듯 반사적으로 김 부장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받은 김 부장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덜컹, 단상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회의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 부장에게로 돌아갔다.
“아, 그래요. 김석환 부장.”
싸늘한 목소리가 화살을 돌렸다. 백의현이 서류를 넘기자 팔락거리는 소리가 실제보다 크게 들렸다.
“김석환 부장이 직접 이 기획을 검수했으니 누가 누구 걸 훔쳤는지 잘 알겠군요.”
“…….”
김석환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구부리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게, 백 이사님.”
“물론 어느 쪽이 훔쳤든 간에 팀 내 기획 자료 보안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실책에 관해서는 책임을 지셔야겠지만.”
“책임, 이요?”
김 부장이 입을 떡 벌렸다. 임원들 중 일부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제 옆에 서서 중역석만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김 부장을 보고 있자니 서진우의 속이 흐뭇해졌다. 무감각한 백의현의 목소리를 듣는 김 부장의 얼굴색이 초 단위로 바뀌어 대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었다.
서진우가 내심 쾌재를 부르거나 말거나, 두 종의 기획서 비교를 마친 백 이사가 탁, 서류를 겹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남의 노력을 통째로 훔쳤으면서 아무 일도 없길 바랐습니까?”
***
지옥 같던 미팅 시간은 백 이사가 김 부장을 따로 호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서 대리, 너 미쳤어?”
회의실을 나가기 전, 김 부장이 거칠게 씩씩대며 서진우의 팔을 붙들었다. 서진우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부장님, 왜 이러세요!”
서진우의 비명 같은 소리에 회의실을 나가던 일부 임원들과 직원들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맞닥뜨린 김 부장이 황급히 서진우의 팔을 놓았다.
“너, 너 이러고도 회사 생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등 뒤를 흘끔거리며 이를 갈아 보였다. 서진우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 대신, 그들 옆에 놓인 회의용 책상을 곁눈질했다.
“아직 카메라 켜져 있습니다, 부장님.”
“……뭐?”
“부하 직원 기획서를 빼돌려 다른 직원에게 대신 넘겨주다 못해, 그 직원에게 화풀이하는 모습까지 찍히시면.”
“…….”
“부장님이야말로 회사 생활 잘하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서진우가 김 부장에게 붙들렸던 팔뚝을 문지르며 무덤덤하게 말을 맺었다. 김 부장은 이제야 카메라를 발견한 사람처럼 땀을 줄줄 흘리며 캠코더를 돌아보았다. 영상이 찍히지 않았더라도 음성은 충분히 녹음될 만한 거리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하, 무슨 말이야 서 대리……화풀이라니. 나는, 그저…….”
김 부장이 이를 악문 채 억지로 웃어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뺨을 보니 당장이라도 대거리를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빈 회의실을 녹화 중인 카메라 앞에서 사원에게 소리 지르는 모습을 기록할 수는 없겠지. 그것도 명백한 제 잘못으로 인해 생긴 사태를 사원에게 뒤집어씌우는 모습은 더더욱.
‘내가 퇴사해도 김 부장 너는 좆 되게 한다.’
생각하며 서진우가 냉정한 눈으로 김 부장을 내려다보았다. 김 부장은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 중인 모양이었다.
“……이따, 다녀와서 보지.”
결국 충동이 졌다. 김 부장은 여전히 두 사람을 흘긋거리는 뭇 직원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회의실에서 벗어났다. 서진우는 회의실 바깥으로 헐레벌떡 나가는 김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일단은, 예전처럼 기획안을 뺏기지 않았으니 됐어.’
서진우는 무리를 지어 수군거리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들 사이를 느긋하게 걸었다. 하성민은 미팅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남의 기획안을 뻔뻔하게 발표하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을 테니까.
‘그럼 사직서나 작성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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