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그건 내 기획이었어.’
회의가 끝난 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하성민을 비상계단으로 이끌었다. 절로 목소리가 벌벌 떨려 나와, 화를 내는데도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더랬다.
기억은 어쩐지 꿈처럼 흐릿했다. 비상계단은 어둡고 서늘했으며,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성민의 무릎 아래뿐이었다. 서진우가 제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시종일관 떨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전 몰랐어요, 선배.’
하성민의 목소리는 난처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차가웠다. 서진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성민의 이목구비가 누군가 파스텔을 뭉갠 것처럼 뿌옜다. 그는 여전히 아리송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시잖아요, 저 보고서 작성에 약한 거. 그래서 보다 못한 김 부장님께서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어요. 언뜻 보기엔 좋은 아이디어 같아서, 그래서……. 그게 선배 아이디어였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그건 내가 쓴 기획서 그대로 발표한 거잖아. 수정도 거치지 않고…….’
황망하고 답답했다. 목울대가 꽉 막힌 듯 숨을 쉬기가 어렵고 가슴이 조여 왔다.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는 서진우의 어깨를 희고 긴 손가락으로 감싸며, 하성민이 뭐라고 말했던가.
‘그래도 좋은 일이잖아요. 결국엔 선배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거니까요.’
‘…….’
‘어차피 이사님들도 다 봐 버린 마당에 돌이킬 수도 없어요. 괜히 분란 만들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회사 다닐 수나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 말하며 웃었던가? 아니면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던가.
‘이번 프로젝트, 통과되면 제가 팀장이 될 거래요. 저도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선배가 도와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저 도와주실 거잖아요. 이건 선배 기획이기도 하니까.’
머리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달콤함을 가장해 서진우를 파고들었다.
그래서 머저리 같은 서진우는 그러기로 했다. 잘리는 게 무서워서, 하성민의 말들이 모두 맞는 말 같아서.
“진짜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네…….”
탕비실에서 출력물을 들고 나오며 서진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배포용 기획서를 묶어 정리하는 동안 수천 개의 바늘이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것 같은 감각은 많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학생 시절 서진우는 나름대로 제 의견을 피력할 줄도, 피아 식별도 할 줄 아는 똑 부러진 청년이었다. 그저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후천적 머저리가 되었을 뿐.
‘진작 퇴사하면 좋았을 텐데.’
죽어 보니 알겠다. 대기업 타이틀도, 안정적인 월급도 나 자신보다 소중할 수는 없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만이 안타까웠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서진우는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다독이며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벽면에 걸린 벽시계가 어느새 아홉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김 부장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었고, 하성민은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서진우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서진우는 오늘 회의 보조를 맡은 막내 사원에게 서류를 넘긴 뒤 무표정을 가장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본 미팅까지는 삼십 분이 남았다. 가벼운 긴장 탓에 마우스를 쥔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김 부장이 사무실에 나타난 건 아홉 시 사십오 분,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서진우는 모니터 너머로 김 부장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최 상무 옆에 껌딱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손을 맹렬하게 비벼 대며 아첨을 떨어 대는 꼴을 보니, 간신배도 이런 간신배가 따로 없었다.
‘벌이면 꿀이라도 따지.’
속으로 조소하며 서진우는 제 몫의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김 부장 눈에는 안 띄는 편이 좋았다. 그가 임원진을 ‘모시’느라 자신을 괴롭힐 여력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만에 하나 기획서를 보겠다고 하면 곤란했다.
다행히 김 부장은 서진우를 견제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김 부장의 주변에는 최 상무 외에도 임원으로 보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모여 서 있었다. 서진우는 개중 홀로 훌쩍 키가 큰 백 이사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전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백의현 전무이사는 홀로 다른 세계 사람 같았다.
뒤에서 걷던 막내 사원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진짜 잘생겼다, 그쵸? 왜 회사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길거리 캐스팅됐으면 돈 같은 건 쓸어 모았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는 안 들리게 몰래 해야지.”
“그런가, 그치만 진짜 생긴 게 아깝지 않아요?”
곧장 제 사수에게 혼나고도 헤헤 웃는 목소리를 들으며 서진우가 쓰게 웃었다. 제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지만 남의 외모를 보고 시시덕댈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자신의 사감은 이 망할 회사가 모조리 죽여 놓았으므로.
회의실은 널찍했다. 평소에 기획개발부에서 쓰는 작은 회의실이 아닌, 중역용 좌석이 따로 마련된 데다 전면에는 단상까지 있는 대회의실이었다. 서진우는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중앙에는 회의를 녹화하기 위한 작은 캠코더가 놓여 있었다. 추후 회사 홍보 자료로 쓸 만한 샘플을 모으기 위해 각 부서별로 설치되었던 카메라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회의 영상은 절대 어디에도 내보일 수 없을 테니까.
프로젝트가 밝히는 발표용 흰 벽을 제외하고는 조명이 꺼져 있는 탓에 회의실은 어두웠다. 서진우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기자 긴장으로 초조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진우는 바지런하게 임원들을 자리에 앉히는 김 부장을 보며 낮게 조소했다.
‘멍청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기획서를 확인했어야지.’
아둔한 적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막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왜 갑자기 웃어요?”
머리 위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서진우는 흠칫 눈을 들어 올렸다. 하성민이 옆자리 빈 의자를 당겨 앉으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 새끼는 왜 여기 앉고 지랄이야. 서진우는 욕설을 삼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좀 웃겨서.”
“뭐가요? 아, 저 피티 이미지 말하는 건가?”
하성민이 궁서체로 쓰인 ‘환영합니다’라는 글씨를 돌아보며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서진우 앞에 뒤집힌 채 놓인 기획서를 보며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새로 준비한 기획서예요?”
“어.”
“선배 진짜 대단하다. 주말 출근해서 쓴 거죠? 저 봐도 돼요?”
하성민이 말하는 동시에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에 고여 있는 선명한 욕심이 보였다.
“아니, 안 돼.”
하성민의 손이 서류에 닿기 전 서진우가 잽싸게 기획서를 빼냈다. 하성민이 어색하게 손을 거두며 쩝,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발표 때 알게 될 텐데 미리 보면 어때서요.”
“비밀이야. 다들 놀라게 해 주고 싶거든.”
서진우가 기획서를 반으로 접어 품 안에 넣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하성민은 미간을 살풋 좁혔다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엄청 대단한 건가 보다. 기대할게요.”
그의 목소리에 은근한 비아냥거림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에 주눅 들던 서진우는 죽고 없었다.
‘그래, 아주 놀라 까무러칠 만큼 대단하지.’
서진우가 속으로 하성민을 비웃었다. 하성민은 곧 서진우의 기획서를 충분히 욕심 내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 억지로라도 서진우의 기획서를 빼앗아서 봤다면, 어떻게든 그가 발표하는 일을 막으려 들었을 테니까.
‘그러면 안 되지.’
서진우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도둑한테 모든 걸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쫓겨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YK푸드 식품사업부문 기획개발부의 사분기 제품 콘셉트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새 시간이 되었는지 단상에 오른 김 부장이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재킷을 정돈했다. 그가 양손을 단상에 거만하게 올린 후 회의장에 모인 사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첫 번째는…….”
사원 몇 명의 발표가 이어졌다. 하성민의 차례는 거의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다른 직원들에게는 피해를 안 줄 수 있을 것 같네.’
서진우는 한쪽 팔을 테이블에 기댄 채 삐딱하게 몸을 기울이고 하성민의 자신 있어 보이는 얼굴을 응시했다. 하성민은 제 아이디어도 아닌 기획안을 뻔뻔하게도 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반반한 면상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상입니다.”
“하 대리, 수고했어요. 그럼 질의응답 및 피드백 받겠습니다.”
하성민이 레이저 포인터를 노트북 위에 올려놓자,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김 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수고했다’고? 누가 봐도 편애하는 사원이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치하 멘트에 기가 찼다. 서진우는 냉랭한 얼굴을 어둠 속에 숨긴 채 임원들의 평가를 가만히 들었다. 대다수가 호의적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라는 말이 몇 번이고 들릴 때마다 하성민의 광대가 조금씩 위로 솟았다. 서진우는 그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더 없으시면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한껏 만족스러운 평가를 만끽한 김 부장이 콧대를 높이며 다시 마이크를 입가에 가까이했다. 서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은 얼굴로 앞에 서자, 하성민이 시선을 마주치며 입 모양으로 ‘화이팅’, 하고 속삭이며 웃었다.
‘개새끼가 어디서 끼를 부려.’
서진우는 무표정하게 하성민을 마주 보았다. 예상외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하성민이 찔끔한 듯 눈을 돌리고 자리로 되돌아갔다. 아주 철면피는 못 되는 모양이지. 서진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단상 앞에 섰다.
“시작하기 전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 사과드릴 일이 있습니다.”
나지막하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서진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지난주, 기획서를 일차적으로 반려당한 바 있습니다. 김석환 부장님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번 주 안에 새로 준비하라 하셨지만 도저히 불가능해서 부득이하게 반려된 기획서로 발표를 진행하려 합니다.”
“뭐, 뭐? 서 대리, 뭐 하는 겐가!”
김 부장이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서진우는 김 부장이 단상에서 내려와 자신을 방해하기 전 재빨리 제 발표 자료를 켰다.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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