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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화 (3/150)

3화

“서 선배?”

너무 오래 서 있던 탓일까, 하성민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시선을 맞춰 왔다.

“아, 잠깐 잊어버린 게 생각나서.”

“뭔데요?”

“그게……, 집에 가스 밸브를 안 잠그고 나온 것 같아.”

서진우는 굳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애써 웃었다. 하성민이 뭐예요, 하고 따라 웃었다. 서진우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얼버무리며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전원을 켜며 자리를 둘러보니 모니터 아래에 포스트잇이 몇 장 붙어 있었다. 서진우는 그중 왼쪽에서 다섯 번째, 거의 중간에 매달려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기획안 수정

8/2 月 오전 9시까지

(미팅 10시, 부장님 검수)』

단정한 글씨체로 깨알같이 쓰인 글씨를 보자 기분이 상했다. 서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메모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미련한 서진우. 입 안에서 절로 욕설이 굴렀다.

‘이것밖에 못 해 와? 회사가 자선 단체인 줄 알아?’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야심 찬 기획안을 김 부장이 산산조각 낸 것은 미팅 전 주, 목요일 오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콘셉트 미팅 일정이 잡히자마자 밤을 새고 발로 뛰어가며 몇 주간 구상하고 제작했던 기획서가 눈앞에서 보란 듯이 구겨졌다. 김 부장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기획서를 두 번 나누어 찢은 후 종이 조각을 서진우의 머리 위로 집어 던졌다. 손바닥만 한 쓰레기가 되어 버린 네 장의 기획서가 서진우의 이마와 뺨, 어깨를 스치며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졌다.

‘코스트 계산할 줄 몰라? 대리는 기간 채우면 무조건 다는 거야? 직급값 못해? 대체 서 대리가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어? 일을 줬으면 똑바로 해 와야 할 거 아니야! 다른 직원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회사 꽁으로 다녀?’

벌써 반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한이 일 정도로 김 부장의 일그러진 표정, 어투, 단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서진우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지랄 맞은 김 부장이라도 이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잘못된 시장 조사에 시간을 허비하며, 어지간히도 형편없는 아이디어를 기획이랍시고, 아무리 콘셉트 회의라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상식적인 제안서를 준비했어야 했는데, 등등.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이번 기획은 정말 자신이 있었다. 트렌드 조사도, 타깃 분석도, 이에 따른 이점과 환경 분석도 충분히 했다. 그런데도 결국 자신이란 놈이 받을 수 있는 평가는 이런 것뿐이라는 게 비참했다.

등 뒤에 말없이 꽂히는 동료 직원들의 시선이 칼날 같기도, 송곳 같기도 했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올라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진우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넝마가 된 기획서를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주워 들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혹독한 평가를 받은 기획서는 차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버리고, 펄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옥상에서 십여 분 숨을 돌렸다. 그렇게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김 부장에게 업무 시간에 놀러 나가다니 잘하는 짓이라며 다시 한번 욕을 먹었더랬다.

“…….”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서진우는 제 아랫입술을 괴롭히는 일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탕화면에 있는 두 번째 기획서를 클릭했다. 당장 미팅을 빈손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주말 내내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만든 차선책이었다.

우습게도 김 부장은 두 번째 기획서를 검토조차 해 주지 않았다. 미팅 당일 바빠서 서진우 따위에게는 신경을 쓸 기력이 없다나 뭐라나 했다. 그리고 서진우는 그날 그 회의에서, 자신의 첫 번째 기획서를 자신 있게 발표하는 하성민을 맞닥뜨려야 했다.

“하……하하.”

떠올린 것만으로도 기가 차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진우는 냉담한 표정으로 과거의 자신이 주말 내내 차선으로 준비했을 기획안 파일을 미련 없이 휴지통으로 직행시켰다. 그리고 대신 지난 주 수요일, 김 부장에게 메일로 보낸 원 기획서와 발표용 파일을 찾아 다운로드했다.

“선배, 그……, 좀 괜찮으세요?”

막 인쇄 버튼을 누르고, 출력물을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에 서진우는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몸을 빼며 고개를 돌렸다.

“―뭐가?”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휜 채 제 안색을 살피는 하성민과 눈이 마주치자 절로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성민이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다가 안쓰럽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아무래도 지난주에 부장님이 좀 심하긴 했죠.”

하성민의 안쓰럽다는 듯한 속삭임이 역겨웠다. 서진우는 혀끝까지 치솟은 욕설을 애써 삼켰다.

“아냐, 내가 잘못한 거잖아.”

―라고 예전의 서진우라면 대답했겠지.

떨리는 손끝을 힘껏 부여잡았다. 다행히 적절한 거부 반응이 서진우를 과거의 겁쟁이로 보이게 도와주었다. 서진우는 하성민의 시선을 피하려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눈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요……. 사람이 실수 좀 한 걸로 그렇게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혼을 내시고. 부장님도 가끔 보면 좀 너무하세요. 그냥 따로 불러서 조용히 말씀하시지, 참.”

‘실수’. 잇새로 실소가 샜다. 언뜻 들으면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른 문장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 교묘하게 자신을 깎아내려 왔구나.

서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하성민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의 잘난 후임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이토록 선한 얼굴을 하고 앞에서는 자신을 옹호하는 것처럼 굴면서, 동시에 뒤에서는 김 부장에게 달라붙어 제 몫을 챙겼으리라.

그러다가 서진우가 필요 없어졌을 때 완전히 버린 것이다.

“맞아, 내 ‘실수’. 그러니 네가 굳이 걱정해 줄 필요 없어.”

호구 같은 서진우를 연기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냉랭한 말을 내뱉은 후 서진우는 홱 몸을 돌려 버렸다. 등 뒤에서 당황해 어, 선배, 어디, 따위를 종알대는 하성민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탕비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가슴이 불안하게 쿵, 쿵 뛰고 있었다. 색색대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귀를 울렸다. 손바닥에 열이 올랐다.

오랫동안 하성민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바로 ‘오늘’까지도. 하성민의 진짜 모습을 아무리 몰랐다지만, 저런 말과 행동들을 그저 자신을 챙겨 주는 거라 믿었던 스스로가 머저리 등신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괜찮아, 그만두면 되잖아, 괜찮아…….

서진우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

“!”

미처 따라 돌지 못한 한쪽 다리가 벽에 걸렸다. 서진우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지난밤, 균형을 잃고 휘청일 때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넘어진다.

눈앞이 아찔, 흔들렸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거의 동시에 단단한 손아귀가 한쪽 팔을 빠르게 낚아챘다.

“―아, 고맙습…….”

간신히 균형을 잡은 서진우가 안도의 탄성을 토하며 고개를 돌렸다.

“……니다.”

서진우가 눈을 둥글게 뜨며 느리게 말을 맺었다. 커다란 덩치를 우아한 슈트로 감싼 사내가 서진우의 팔을 움켜쥔 채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다.’

고개를 치켜들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내였다. 서진우는 기이한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서늘하면서도 날카로운 향이 희미하게 코끝에 닿았다. 서진우가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슈트로도 숨기지 못한 다부진 상체가 시야를 꽉 채웠다. 그러나 서진우를 놀라게 한 것은 남자의 외양이 아니었다.

“뭐 합니까? 똑바로 안 서고.”

부드러우면서도 냉기가 서린 낮은 목소리가 얼빠진 서진우를 일깨웠다. 그제야 서진우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 섰다.

“아, 죄송합니다…….”

절로 주눅이 들게 하는 상대였다. 사내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인 서진우에게서 눈을 돌려 제 소매를 정돈했다. 재킷 소매 너머로 푸른 보석이 박힌 백금빛 커프스 클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진우는 반질반질한 사내의 구두코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백의현 전무이사가 왜 여기에…….

작년 하반기에 신규 발령을 받은 젊은 전무이사는 한동안 회사의 뜨거운 감자였다. 황 회장의 육촌 조카 손주다, 숨겨진 사생아다 하는 소문이 온 부서를 달구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낙하산이 아니라면 그는 전무이사로 임명되는 것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젊었다. 게다가 짙은 눈썹과 날 선 눈매, 반듯한 콧대와 칼로 깎아 둔 듯한 턱 선 등 방송가에서나 볼 법한 외모도 화제였다. 어떤 이들은 또 어디서 굴러 온 재벌 낙하산이 회사를 망친다며 투덜댔고, 어떤 이들은 YK푸드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얼굴 마담을 기용했다며 비아냥댔다.

그러나 백의현 전무이사는 단 일 년 만에 호사가들의 주둥이를 잠재웠다. 자신을 깎아 먹는 불필요한 수식어를 실적으로 찍어 누르며.

“아무리 급해도 앞은 똑바로 보고 다녀요. 다치면 본인만 손해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서진우에게 툭, 말을 던진 그가 미련 없이 멀어졌다. 뚜벅, 뚜벅. 복도를 울리는 무거운 굽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서진우는 자리에 멈추어 서 입을 벌렸다. 임원 사무실은 한참 위층에 있지 않던가? 그가 왜 팔 층에……. 그때 퍼뜩 한 가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맞아. 오늘 회의에는 임원진이 참석하지.’

갑자기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김 부장이 자신의 두 번째 기획서를 봐 주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았던가. 김 부장은 그날 반년에 한 번씩 행차하는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간만에 정말로 바빴다. 그리고 같은 날, 하성민은 서진우의 기획서로 상무 눈에 들어 대리 삼 개월 차에 프로젝트 팀의 팀장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지?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짓누르며 빠른 걸음으로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퇴사하더라도 그 꼴은 못 보지.’

한번 죽었던 몸인데 무엇이 더 두려우랴. 어차피 때려치울 회사, 깽판 한번 제대로 쳐 줄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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