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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2화 (2/150)

2화

8월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두개골이 아작 나는 감각에 절로 비명이 터졌다. 서진우는 숨을 삼키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술이 깬 것은 물론이요, 정신이 번쩍 들다 못해 다시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진저리를 치던 그가 문득 몸을 굳혔다. 두 손에 양껏 그러쥔 부드럽고 익숙한 이불의 감촉 때문이었다.

“……?”

서진우는 어리둥절해 눈을 내렸다. 여명이 드리운 맨 팔이 희고 창백해 보였다. 죽었으니 당연한가, 라고 생각했던 서진우가 이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넘어져 머리가 깨졌던 곳은 회사 근처 술집 뒷마당이었는데,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여긴……, 내 방이잖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분명 죽었는데. 잠시 멍청히 앉아 있던 서진우가 다급히 숨을 삼키며 양손을 제 뒤통수로 뻗었다. 그래, 분명 여기가 깨지는 소리가……. 어라……?

뒤통수가 멀쩡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얼빠진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만에 하나, 천운으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 뇌진탕이다. 머리에 붕대, 하다못해 반창고라도 붙어 있어야 정상 아닌가? 게다가 왜 병원이 아니라 제집이란 말인가? 무엇 하나 이해되는 상황이 없었다.

탈탈탈, 키 작은 선풍기가 발치에서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한겨울에 선풍기? 서진우는 당황해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쓰러져 있던 동안 누구라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상황 파악을 위해 전원 버튼을 누른 그는 이내 아연해졌다.

“……팔월……이라고?”

전신에 피가 단숨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좀 후텁지근하다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절한 이래 팔 개월이나 지났다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황급히 제 핸드폰을 뒤적이던 서진우는 그러나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핸드폰이 고장 난 건가?”

연도가 그대로였다. 송년회를 했던 날, 즉 서진우가 알고 있던 어제는 십이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이 같은 연도의 팔월이라면, 오늘은 팔 개월이 지난 게 아니라 오 개월을 거슬러 온 것이다.

말도 안 돼. 서진우의 입에서 너털웃음 같은 한숨이 터졌다. 서진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제 양 눈을 힘껏 문질렀다. 아무래도 머리를 다쳐서 난독증 같은 병이 온 것 같았다. 서진우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20××년 8월 2일 월요일

여전히 그대로였다.

“말도 안 돼…….”

서진우가 중얼거리며 인터넷을 켰다. 핸드폰은 고장 날 수 있을지언정, 네트워크는 거짓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전부 같은 날이잖아.”

십여 분 뒤, 서진우가 양팔을 늘어뜨리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인터넷 포털이 말하는 ‘오늘’도 핸드폰이 알려 준 날짜와 동일했다. 심지어는 언젠가 보았던 뉴스들이 포털 메인을 채우고 있기까지 했다!

“…….”

턱 밑에 고인 땀방울이 툭, 얇은 여름 이불 위로 떨어졌다. 서진우는 얌전히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마른세수를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 아닐까,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이런 조작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야.’

믿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로 서진우는 지금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밤, 뒤로 넘어지며 서진우가 선명히 느낀 것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 증거로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여전히 메아리처럼 귓가를 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심지어는 미미한 숙취조차 없었다.

날짜가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서진우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서진우는 손으로 가리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과 달리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둠을 직시했다. 서진우는 엎어 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입사 때부터 사용하던 스케줄 앱을 실행했다.

8월 2일. ‘아이디어 기획 회의’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면, 하필 잊을 수도 없는 이날로 돌아왔을 리 없다.

여명이 가시고 하늘이 푸른색으로 차오를 때까지, 서진우는 미동도 없이 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음에서 벗어난 것도 모자라 과거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서진우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머저리 거머리들 수발은 그만 들고,

‘퇴사하자.’

서진우가 비장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어떻게 퇴사는 못 하고 죽을 생각만 했을까?

기적처럼 삶을 되찾은 뒤,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야 당장 퇴사하면 쏟아질 문제들이 눈앞에 산재한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대출 연장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고, 외동아들인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부모님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퇴직금도 별 볼 일 없을 게 뻔했다. 그 외에도 머리에서 미뤄 두었던 돈과 미래에 대한 문제들…….

하지만 돈과 미래도 살아 있어야 있는 것이다.

‘회식 중 미끄러져 개죽음을 당했다고 좀팽이 같은 회사가 산재 처리를 해 줄 리도 없고.’

서진우는 냉정한 눈으로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며 푸른색 넥타이를 고쳐 맸다.

과거로 돌아온 게 확실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제 옷장의 상태였다. 바로 어제까지 잘만 입고 다녔던 감색 패딩을 포함한 겨울옷이 한 벌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리할 정신이 없어 발치에 대충 내려 두었던 상자가 옷장 위 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진우는 상자 겉면에 자신이 써 두었던 [겨울]이라는 글씨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백배, 아니 만 배 낫다.’

오래된 속담이 그저 관용어가 아님을 지금만큼 실감할 때가 없었다. 아직도 지난밤 머리가 으스러지던 감촉이 아귀처럼 목덜미를 붙들고 있었으니까. 지나치게 생생한 환촉(幻觸) 탓에, 출근을 준비하는 내내 등줄기에 화득화득 소름이 끼쳤다.

“다시 그런 꼴을 당하느니 무조건 도망친다.”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서진우가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이제 현관 전신 거울에 완벽한 여름철 직장인의 모습이 액자처럼 들어찼다. 서진우는 퀭하니 메마른 뺨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그래도 반년 정도 더 젊다고, 어제의 자신보다는 좀 상태가 나아 보였다.

이게 사람 몰골이냐. 서진우는 제 꼴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씩씩하게 오피스텔을 나섰다. 오늘부터는 무조건 워라밸, 워라밸부터 챙긴다. 일 때문에 끼니를 거르지도 않을 거고, 여섯 시 되면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할 것이다!

오 년이 조금 못 되는 기간 동안 회사 생활이 철저하게 몸에 밴 덕에,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믿기지 않는 일을 경험한 후에도 팔과 다리는 착실하게 출근을 이행했다. 서진우는 두 개의 계절을 뛰어넘은, 혹은 되감은 사람답지 않게 평온한 태도로 버스에 올라탔다.

오피스텔에서 도보 삼 분 거리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탑승, 다섯 정거장을 지나 다른 버스로 갈아탄 후 다시 네 정거장 이동. 도보 이동을 최소화한 최적의 출근 루트를 걸쳐 YK푸드 사옥 정문으로 들어가는 데까지 정확히 이십팔 분이 소요되었다. 서진우는 출입 게이트를 통과한 후 매끈한 엘리베이터 문을 쏘아보았다. 그가 사 년간 몸담고 있던 기획개발부는 건물 팔 층에 있었다.

“서 대리님 안녕하세요!”

“네……, 좋은 아침.”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막내 사원이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마주 건네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서진우가 주춤, 발을 멈추었다.

하마터면 익숙한 구석 자리로 향할 뻔했다.

팔월 초, 서진우의 자리는 아직 중앙 창가 쪽에 있었다. 그 말은 즉 서진우의 입지가 아직 바닥을 치지는 않았다는 뜻이자, ……하성민이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배, 왔어요?”

하성민이 낮은 파티션에 팔을 걸치며 서글서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이며 커다란 눈동자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사원들이 내심 흠모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티 없이 해맑은 미소를 그리며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서진우는 그 반반한 면상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성민.

기획개발부의 촉망받는 신예이자 서진우의 직속 후임.

그리고 오늘, 그의 콘셉트 기획서를 도용할 인간.

신입 시절 사수를 맡으며 서진우는 하성민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부사수로서 크게 흠잡을 데가 없는 후임이었고, 인사성도 밝았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기획안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서진우는 직접 사내 강의를 골라서 추천해 주거나 자신의 노하우를 문서로 정리해 공유해 가며 적극적으로 하성민을 가르쳤지만, 어째서인지 완벽한 그는 보고서만은 도통 제대로 작성할 줄을 몰랐다. 그래도 하성민은 그때마다 진심으로 송구스러워하며, 아직 일이 익숙지 않아 그런가 보다며 자신의 약한 점을 순순히 인정했었다. 그리고 순진한 서진우는 그런 하성민의 ‘솔직함’까지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제 겨우 삼십 줄에 들어선 자신이 말하기도 뭐하지만, 여러모로 요즘 젊은이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서진우는 처음부터 하성민에게 호감을 가졌고, 점점 여러 이유를 붙여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했었지.’

‘8월 2일 월요일’, 김 부장이 퇴짜를 놓았던 기획서를 보란 듯이 하성민이 발표했던 날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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