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78화 (78/80)

78. 너, 심연의 주인께 종속됐느냐?

다- 다다단- 다란-

체사레가 등장하자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주의! 악마후작 체사레의 권역, ‘광기의 성’에 들어섰습니다. 광기의 규율이 작용합니다.

※저주받은 광기가 제물을 인식했습니다.

※체사레의 권속들이 제물을 찾아 배회합니다.

바닥은 드라이아이스로 연출한 것처럼 스산한 안개가 피어올랐고, 내부는 주홍빛 불로 은은하게 밝혀졌다.

사지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목 위가 비어 있는 하인들이 끼긱 거리며 근처를 기웃대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한 광경을 목격하셨습니다. 해당 상태가 지속되면 정신력이 하락할 수 있습니다. 1/60m

※상태이상 ‘환각’이 강화됩니다.

※주의! 저주가 활성화되어 정신력이 흔들립니다. (이성을 잃고 쉽게 흥분합니다. 욕망에 취약해집니다.)

검은 창이 우르르 떠올랐다.

시스템이 오래간만에 시스템다운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윽!’

하지만 텍스트를 끝까지 읽기도 전, 왼쪽 눈에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저주가 활성화됐다는 것으로 보아,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이 다시 붉게 물들었겠구나 싶었다.

“이상하구나. 방문자는 한 명일진대 어찌 규율이 작동했을까?”

잠시 눈을 잡고 고통을 삭이는 사이, 체사레가 질문을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백의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일어나.

나는 왼쪽 눈을 가린 채 백의건에게 귀환 길드원들끼리만 사용하는 수신호를 보냈다.

-몸은 낮추고.

그 수신호를 본 백의건이 상체를 수그린 채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그런 백의건과 체사레를 바쁘게 살피며 긴장의 끈을 조였다.

“추한 것아. 입이 붙었느냐?”

‘그래. 저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체사레는 인간을 추한 것이라 부르는 버릇이 있었고, 자신의 심미안을 해치는 꼴은 못 보겠는지 늘 눈을 감고 다녔다.

회귀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녀석이 눈을 뜬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이상한 컨셉질이라고 생각했는데, 던전에서 백의건을 만난 순간 저 버릇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효과도 좀 있는 것 같고.’

규율에 매이는 바람에 손이 굳기 시작했지만, 하스칼의 마력을 불어 넣자 억제력이 약해지면서 빳빳해진 근육이 부드러워졌다.

그 틈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새로운 수신호를 보냈다.

-몸은 계속 낮춘 채, 안쪽으로 들어가. 아까 말했던 경고 잊지 말고.

순간 백의건이 주춤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지만, 망설이는 발걸음에서 어떤 설명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읽었다.

-뭐해? 지금 당장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숨어.

광기의 성은 시공간과 형상이 애매하게 비틀려 있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웠고.

괜한 것을 알아차렸다간, 체사레의 권속들에게 낙인찍혀 지옥까지 추격당하는 수가 있었다.

‘그럴 바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낫지.’

나는 자세한 설명은 일부러 생략한 채, 다음 행동을 지시했다.

-숨어 있다가 안개가 사라지면 더 안쪽으로 달려.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

-빨리 움직여!

재촉하듯 수신호를 보내자 지금은 도망가야 할 때라고 판단했는지, 백의건은 기척을 죽인 채 오른쪽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중간쯤 올랐을 즘, 잠시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려는 것 같았지만.

내 마지막 경고를 떠올렸는지 그대로 묵묵히 나아갔다.

그렇게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고.

백의건의 신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다시 시선을 체사레에게 던졌다.

“입이 붙은 것도 아닌데, 어찌 시간을 끄느냐.”

“……!”

잠시 백의건에게 한 눈이 팔린 사이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체사레가 장갑 낀 손으로 내 입술을 만졌다.

그러고는 정말로 입술이 붙었는지 아닌지 살피려는 듯, 잇새를 비집고는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설마 이놈도 오닉스와 같은 부류인가 싶어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체사레는 손끝에 혀가 닿자 그조차 불결하다는 듯 장갑을 벗어 던졌다.

“비명도 예쁘게 지르지 못하는 걸 제물로 바칠 수는 없지. 치워라.”

체사레는 제 권속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백의건이 도망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칫 따라잡힐 수도 있었기에 나는 황급히 내내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체사레. 악마후작씩이나 돼서 꼬리 말고 도망치려고?”

“음?”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체사레의 몸이 멈칫했다.

과연 악마들에게 이름만큼 관심을 끌기에 효과적인 건 없었다.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내 이름은 어디서 들었느냐?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로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는, 개뿔. 너는 날 본 게 처음이겠지만 나는 널 지겹도록 쫓아다녔다, 이 쫄보 새끼야.’

나는 이를 바득 갈며 녀석을 노려봤다.

행여 도망가려 하면 당장 녀석을 덮쳐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후작급이면서 발칸하고 어떻게 이렇게 다르냐고.’

발칸은 호전적이고 굉장히 다혈질인 놈이라, 걸려 온 싸움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요령만 알면 발칸을 잡는 건 생각보다 할 만했다.

하지만 저놈은 몸을 사려도 너무 사렸다.

자존심 따위 개나 준 양,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던전을 버리고 냉큼 내빼기 바빴다.

‘그냥 그렇게 지옥으로 꺼졌으면 서로 편했을 거 아냐.’

겁은 짜증 날 정도로 많은 주제에, 지구를 탐내는 집요함은 오닉스 저리가라여서 자꾸 던전 이곳저곳에 랜덤으로 나타나 쓸만한 인간을 낚아채 갔다.

꼴에 보는 눈이 있어서 재앙급 재능을 가진 놈들을 잘도 데려갔는데, 특히 어깨에 있는 벌레를 체사레가 떼 주기로 했다며 악마 편에 서 버린 네크로맨서 ‘리치왕’.

그놈이 누군지만 알면 뒤통수를 시원하게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리치왕이 좀비며 데스나이트 따위를 소환해 한국을 아주 시체 밭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라엘은 뭐하냐. 저 역병 같은 놈 안 잡아가고.’

농담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악마 중 가장 라엘의 교단에 피해를 많이 끼친 것도 저 체사레 놈이었다.

놈은 나와 라엘 교단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인간들 틈에 파고들어 악마 숭배 사상을 뿌렸다.

녀석이 뿌린 사상은 마치 전염병 같아서, 한번 물들면 뿌리를 뽑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녀석이 등장하고 2년 뒤.

그들은 제물 10만 명을 마왕에 바쳐야 한다며 대한민국에서 집단 대학살을 벌였다.

전국에서 홀딱 벗은 인간들이 사이좋게 서로의 멱을 따 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광기의 현장 그 자체였다.

‘생각해 보니 하스칼 놈…. 좀 억울했겠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간 내가 갖고 있었던 악랄하고 기괴했던 마왕의 이미지는, 사실 체사레 같은 변태 악마들 때문에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의혹 말이다.

‘그럴 만도 하잖아. 이번 생을 제외하면 하스칼은 내도록 지옥에만 있었는데.’

무엇보다 하스칼은 10만 명의 인간 제물 따위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준다고 해도 어수선하니 눈앞에서 치우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직접 겪어 본 하스칼은 주위에 관심이 없었다.

‘설마, 저 쫄보 놈의 일방적인 구애였던 거냐.’

체사레의 평가는 그냥 변태 새끼에서 악질 스토커 변태 새끼로 상향 조정됐다.

‘이딴 스토커 새끼한테 세계가 멸망 당하게 둘 수는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저놈 잡는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녀석의 심층부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저 겁쟁이 놈이 미심쩍은 것을 상대하기 위해 본체로 나타났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스칼이나 오닉스에 비하면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름 가지고 뭘 뻐기고 있어.”

“…….”

“!!”

도발이 과했던 것일까.

체사레는 대뜸 내 목을 잡아 강하게 쥐었다.

겉보기엔 호리호리하고 약해 보였지만, 과연 귀족급 악마답게 녀석의 팔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추하고 미천한 인간 따위가 어찌 존귀하신 이름을 입에 함부로 담느냐.”

“큭…!”

그대로 목을 꺾어 죽이려나 싶던 때.

체사레는 대뜸 비어 있던 손으로 내 가슴팍을 더듬었다.

가슴의 상처를 헤집는 손속이 거칠기 짝이 없어, 그 충격이 고스란히 몸에 축적됐다.

※위험! 치명적인 일격에 당했습니다. 상처를 방치할 시,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활성화된 저주와 부딪히며 몸의 밸런스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쿨럭!”

그간 얌전하다 싶었던 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고작 입술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겁했던 체사레였기에, 당장 더럽다며 손을 놓고 떨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놈은 생각에 잠긴 듯, 흘러내리는 핏물을 받아서는 손끝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왕님의 은혜가 아니냐.”

“쿨럭쿨럭!”

“미천한 자야. 너, 심연의 주인께 종속됐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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