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난 이제 10분이란 말이 싫어지려고 해
‘죽상을 하고 있겠네.’
백의건은 언제 꺼냈는지 모를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절뚝절뚝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새 나왔다.
명색이 A등급 헌턴데, 각성하지 못했을 때보다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녀석의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있을 게 뻔했다.
“나 참. 운도 지지리도 없지.”
“허억, 헉. 나?”
“됐어. 말하지 말고 걷기나 해.”
“……내가 먼저 말 건 거 아닌데.”
힘들어 죽겠다며 구시렁대는 녀석을 보며, 나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서걱-!
그러고는 슬금슬금 기어와 앞을 가로막는 수풀을 베어 내자, 놈들은 키익 소리를 내며 희뿌연 안개로 화했다.
어차피 숨을 막아도 피부로 흡수되는 연기라 백의건에게도 숨을 참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걷기 바쁜 와중에 숨까지 참으라고 하면 기절초풍할 게 분명했으므로, 마력으로 적당한 방어막을 만들어 몸에 둘러 줬을 뿐이다.
물론 내가 만든 쉴드에서 내뿜는 마력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겠지만.
최악보단 차악이 나았으므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필 들어와도 여길 들어왔어. 보라색 던전은 닫히기 전까지 나갈 수도 없는데.’
보라색 등급이 흔한 것도 아니고, 이 던전까지 합하면 이제 고작 지구에 세 개가 생겼을 뿐이었다.
그걸 고르고 골라서 들어온 불운에 어이가 없었다.
물론 저급 던전 특유의 파란색이 미끼를 던지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겠지만.
백의건은 그런 것에 쉬이 욕심내는 타입도 아니라 이상했다.
‘그래도 여기서 저놈이 살아서 나가면, 모든 회차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게 되는 건가?’
절차가 번거롭긴 하지만, 용사 자질이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긴 했다.
재능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없는 미랠 대비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백의건은 내가 아는 인물 중 가장 정도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성격은 유순하지만 고집이 있었고, 제법 성실한 데다가 정의로운 편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윤혁과는 반대되는 타입이지.’
우윤혁은 득실을 확실하게 따져서 최대한 손해가 적은 쪽으로 선택하고, 필요하다면 동료도 버릴 수 있는 또라이였다.
그에 반해 백의건은 눈앞에 놓인 불의를 피하지 않았다.
지킬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더 불타는 편이었다.
가끔은 그 인간미 때문에 큰 손해를 끼쳐 좋은 리더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 저런 인물이 성장하면 좋은 주인공이 되고는 했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도 컸다.
결정적으로 사람 뒤통수를 안 치기도 했고.
‘하지만 안목이 구리단 말이지.’
나는 다시금 녀석의 어깨에 매달린 길드 마크를 살폈다.
‘왜 멀쩡한 귀환을 두고 서리창 같은 길드에 의탁한 건데.’
감과 운, 그리고 생존력은 실력만큼 중요한 자질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매 회차 죽어 버릴 만큼 운이 없었다.
세상은커녕 자기 목숨도 보전하질 못하니, 녀석을 주인공감으로 점찍었던 내 안목에도 흠이 생겼다.
‘저거, 저, 저!’
편편한 평지 놔두고 자그맣게 튀어나온 돌부리를 굳이 밟아 휘청이는 저 모습을 보라.
“앞 좀 제대로 봐.”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안경을 깨 먹을 판이라, 나는 녀석을 거칠게 당겼다.
그러자 서리창 길드 마크가 대신 가지에 걸리며 실밥이 부욱 하고 뜯어졌다.
어째 덜렁덜렁 매달린 꼴이 사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 괜히 자존심 상하네.’
나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위기를 이겨내려면 결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 버는 법을 익힌 뒤 매 회차 귀환 길드를 설립한 거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으니, 여러 변수를 대처할 수 있게 다른 타입의 사람들끼리 엮어 임무를 내보냈고, 합이 잘 맞는 사람끼리 한데 묶어 손을 맞춰 볼 기회도 자주 제공했다.
물론 내로라하는 고등급 헌터들이기에 탐내는 곳도 많았지만, 헌터 대부분이 귀환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많은 돈을 줬거든.’
그러고도 흔들리면?
그러면 돈이 부족했거나 다른 결핍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러면 나는 부족한 부분은 찾아 채워 줬다.
명예를 바라면 그에 맞는 직급을 주고 일할 맛 나게 뺑이를 돌렸다.
아이템을 원하면 그보다 더 좋은 걸 구해다 주고,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길드 내 설비로 해결할 수 있게 했다.
그러고도 길드를 나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스스로 길드를 세우기 위해 독립할 때뿐이었다.
열에 아홉은 망해서 다시 돌아왔지만.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서리창을 갔냐고.’
귀환은 대우도 업계 최고인데다, 소속된 것만으로도 명예로운 길드였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을 탐내기 때문에 길드 이미지도 정말 많이 신경 썼다.
이후 나는 전문가에게 길드 경영을 맡긴 채, 귀환 소속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애매한 상태를 유지하며 자금 투자와 매뉴얼 제공만 했다.
그 선택은 늘 옳았고, 길드는 승승장구하며 세계급으로 덩치를 불렸다.
그런 길드를 대체 왜 나간 것일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예외가 생기자, 자꾸 신경 쓰였다.
‘뭔가 약점이라도 잡혔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던전에서 나가면 서리창부터 조져야겠는데.’
캬아악-!
새로운 계획을 정리하는 동안, 거대 박쥐가 백의건의 뒤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박쥐의 날개를 검으로 꿴 채 백의건의 팔을 잡아당겼다.
“억!”
갑작스러운 힘 때문인지 녀석이 휘청대며 내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그러는 사이 나는 박쥐의 배에 마력을 불어 넣고 멀리 내던졌다.
콰쾅!
백의건의 얼굴께를 가려주고 나도 눈을 감았다.
질끈 감았는데도 눈꺼풀 너머로도 어마어마한 광원이 느껴졌다.
공격당하면 자폭하면서 눈을 실명시킬 만큼 강한 빛을 내뿜는 괴물 박쥐였다.
“방금 뭐야?”
“박쥐형 몬스터.”
“고작 박쥐가 저런 폭발력을 낸다고?”
“고작 박쥐가 아니니까.”
박쥐는 주술사가 알림용으로 배치한 패밀리어 중 하나였다.
그런 존재가 소멸했으니, 주술사도 지금쯤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 대체 이 던전은 어떻게 돼 먹은 거야.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슬라임 한두 마리만 잡으면 될 줄 알았다고.”
“읏…!”
슬라임이라는 말이 반가웠는지, 배 속에 있던 푸딩 새끼가 한번 들썩거렸다.
“미친….”
“왜 그래. 혹시 방금 일로 다친 거야?”
“…혀 깨물어서 그래.”
“아.”
“…….”
“……어어.”
“…….”
“아프겠다.”
할 말을 곱씹다 애써 던진 위로가 더 짜증 나서 허리춤에 매달린 녀석을 거칠게 밀어 버렸다.
“어휴.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체감상 여섯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다 왔잖아. 앞에 건물.”
“건물이 있다고? 던전인데?”
몬스터만 사는 던전에 건물이 웬 말이냐 하겠지만.
시야를 가리는 수풀을 베어 내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자, 백의건이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으스스하고 거대한 성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있네.”
백의건은 이토록 가까워질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이제부터 진짜 정신 바짝 차리고.”
“차렸어.”
“더 차려야 한다고.”
“여기서 더?”
칭얼대는 백의건에게 나는 피독주와 합성한 투명화 목걸이를 건넸다.
본래는 내가 쓰려고 집을 나서기 전에 준비해 둔 아이템이지만, 나는 마력이 있으니 뻐기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일단 이거 목에 걸고 입에 물어.”
“어어?”
아이템을 순순하게 넘기자 백의건은 머뭇거렸다.
의심스럽기도 할 테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다른 사람에게 선뜻 내미는 게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할 테다.
“각성제 같은 건가?”
“각성제겠냐?”
“실언이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구박하자, 백의건은 목걸이를 받아서는 제 목에 느릿하게 걸었다.
‘괜히 질질 끌지 않는 게 편하긴 하다만. 의심을 하다 마는 걸 보면, 앞으로 문제가 많아 보이네.’
나는 백의건 갱생 프로젝트의 견적을 내며 정보 몇 가지를 첨언했다.
“이제부터 저 안에 들어갈 건데, 뭘 봐도 그러려니 해.”
“응.”
“이건 독을 중화하고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이고. 대신 소리까지 가려주진 못하니까, 절대 말하지 말고 뱉지도 마.”
“알았어.”
“…괴담 같은 거 보면 꼭 말 안 듣고 뺐다가 당하는 멍청이가 나오던데.”
“괜히 플래그 세우지 마.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으니까.”
“농담 아니야. 들켰다간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거라고. 뱉어야 할 상황이 오면, 차라리 삼켜. 시간제한 있는 거니까 삼켜도 알아서 소화될 거야.”
“…음.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곳을 꼭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던전에서 평생 사는 게 좋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 평생이 10분이어도 괜찮겠어?”
“…난 이제 10분이란 말이 싫어지려고 해.”
백의건은 한숨을 내쉬며 잇새로 구슬을 물었다.
내 말을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었다.
“싫어도 하는 수 없지.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던전을 나갈 수 있으니까. 대신 조건이 좀 필요한데, 그것까진 그쪽이 알 필요 없고. 대충 눈치껏 입구 열어 주면 그쪽으로 튀어 나가.”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백의건을 한번 보았다.
“그동안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
“어디 가서 이름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고.”
“!!”
그 말을 끝으로 백의건을 건물 입구로 툭 밀었다.
예상치 못한 힘에 녀석이 반사적으로 앞을 짚자 문이 스르르 열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그 뒤를 따라 한 발 내딛자, 온몸을 옭아매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성의 주인이 설정한 규율이 작동된 것이다.
“흠? 폐하께서 오신 줄 알았더니 기이한 일이로다.”
몸이 결박되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허공에서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둘 이상의 사람이 성에 들어가면, 가장 나중에 들어선 쪽이 제물이 되어 제단으로 끌려가도록 설정한 변태 새끼.
“초대받지 못한 미천한 자야. 네 어찌 이곳을 방문했느냐?”
악마후작 체사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