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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76화 (76/80)

76. 나 정도면 꽤 친했는데

지구가 원래 이렇게 좁은 동네였던가.

아니면 내 얼굴에 이름표라도 붙어 있는 걸까.

평소 스스로를 드러내고 다니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지구로 오자마자 만난 사람들이 다 알은체를 해 온다.

‘얼굴 안 보이는 거… 생각보다 더 번거로운데.’

목소리는 알 듯 말 듯 익숙한 것 같은데 막상 얼굴과 매칭 해 보려면 머릿속이 둔중하게 느껴졌다.

지옥에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더니.

안면인식 저항 디버프의 부가적인 효과이거나, 가슴을 찌를 때 우르르 쏟아진 페널티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흠.’

혹시라도 차림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살펴보자, 남자의 팔뚝에 육각형 모양의 와펜이 박혀 있었다.

얼음 번개와 창이 교차 된 마크를 보자마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서리창.

겉보기엔 번드르르해도 속은 옴팡지게 썩어 버린 쭉정이 길드였다.

‘쭉정이란 표현도 귀여울 만큼 악질이지.’

한껏 부푼 거품이 꺼져버리듯 서리창은 곧 망할 것이다.

지금쯤 길드장이란 놈은 도박 때문에 길드 건물까지 담보 잡아 사채를 썼을 테고, 부길드장은 한술 더 떠서 공적 자금을 빼돌리는 중일 테니까 말이다.

나중엔 돈 나올 구석이 없자, 좋은 아이템을 제공하겠다며 고등급 헌터를 영입한 뒤 투자금을 끌어모아 해외로 튀었다고 들었다.

그때 제공된 아이템은 복제술사가 만든 모조품이었다나 뭐라나.

그 쓰레기 아이템 때문에 던전에서 어이없게 죽은 헌터만 스무 명이 넘었다.

세간에서는 무슨 헌터가 아이템을 감정해 보지도 않고 썼느냐 비난했지만, 설마 길드장이 직접 건넨 아이템이 가품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그 사건이 이맘때쯤 터진 거였어.’

나는 매 회차 서리창 길드장이 해외로 도망간 뒤 불귀의 객이 되었다더라는 얘기로만 사건을 접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하수구 균열 진입을 막기 위해 미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제천 던전을 막지 못하면 일직선 라인으로 원주, 홍천, 춘천에 보라색 던전이 연달아 발생했기에 이때쯤이면 항상 정신이 없었던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몸이 열두 개여도 부족할 판에 일개 길드의 횡령 사건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그 서리창의 길드원이 눈앞에 있다니.

‘제천 던전에 사람이 들어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설마, 사건이 은폐된 건?’

순간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나는 지금, 어떤 사건의 전조에 당도해 있었다.

동전의 뒷면처럼 이전 회차에도 존재했지만 나는 보지 못했던 사건에 말이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놓쳤던 나비의 날갯짓일까.

‘쯧.’

기분 좋은 고양감이 순식간에 불쾌감으로 변했다.

“서리창 길드에 아는 사람은 없는데.”

“엇!? 나 몰라?”

“몰라.”

“왜지. 나 정도면 꽤 친했는데.”

“내가 그쪽이랑 친했다고?”

친했다는 말에 의심은 배로 치솟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 왜! 인사할 때마다 꼬박꼬박 받아 줬으면서.”

“내가?”

“우리, 식당에서 같이 밥 먹은 적도 있는데?”

“…내가?”

“옆자리에 앉은 건 아니고 건너편 테이블에서 먹긴 했지만.”

“그건 그냥 어쩌다 같은 공간에 있었을 뿐이잖아.”

“에이. 그래도 너는 싫은 사람 있으면 아예 자리를 피했으니까.”

“…….”

“맞지? 기억나지?”

우기는 것도 정도껏이지.

언제부터 친함의 척도가 인사를 받아 주고,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으로 정해지게 된 것일까.

이 친분을 인정하면 오닉스도 내 불알친구였다.

‘씨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예시에 미간이 팍 찌그러졌다.

“몰라.”

“진짜 몰라?”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이놈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지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녀석의 정체를 묻기로 했다.

“모른다고. 너 누군데.”

“나? 나 백….”

“아니. 이름 빼고 설명해봐.”

“이름 빼고?”

이상한 자기소개를 시키니 녀석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뭘 말해야 하지? 나이? 나이는 스물아홉인데.”

“그리고.”

“어, 음. 운동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몸 쓰는 쪽으론 재능이 없어서 육탄전엔 약해. 그래도 반사 신경은 좋은 편이고.”

“…그리고.”

“아, 그리고 원래 연구원이 되고 싶었어. 흰 가운 입고 랩실에 박혀 있는 게 로망이었거든. 근데 면접 보러 가는 날 각성해 버려서 그대로 헌터 협회로 찾아갔지 뭐.”

“…….”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은 엊그제 맞춘 건데, 뿔테보다 가벼워서 편하네.”

“…….”

“나… 더 말할까?”

이대로 더 말하게 뒀다간 지금 내가 던전에 들어와 있는 건지, 소개팅을 하는 건지 헷갈릴 판이라 대강 손을 휘저었다.

‘내가 뭘 묻는지 모르진 않을 텐데.’

어떤 클래스로 각성했는지, 무슨 등급인지만 말해줘도 정체는 쉽게 나올 테지만.

녀석이 순순히 말하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런 곳에 갑자기 나타난 내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백씨 성을 가진 비물리계 전투직이라는 건 건졌네.’

거기에 안경까지 썼다는 외모적 특징까지 더해지자,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몇몇 헌터들이 있었다.

그중 누구도 나와 친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도로 제자리였지만.

‘좆같은 헌터법.’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헌터 정보를 대놓고 묻는 건 위법이라 차라리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체력은.”

신발만 봐도 놈이 이곳을 꽤 오래 헤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라색 던전은 아이템 내구도를 떨어뜨리는 디버프가 있는 데다, 모조품을 입고 돌아다녔으니 상태가 멀쩡하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곧 쓰러질 짐 덩어리를 끌고 다니는 건 사양이었다.

“응? 체력?”

“체력은 어느 정도 남은 것 같냐고. 1부터 100중에 숫자로 표현해서 말해 봐.”

“아마도 삼십….”

녀석은 수치를 말하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잠시 머뭇대더니 더 작은 목소리로 ‘구?’하고 덧붙였다.

“삼십 남은 거면 개털이라는 거네.”

“삼십 구라니까. 그렇게까지 개털은 아니지.”

“그렇게까지 개털이 아니면 혼자서도 충분히 나갈 수 있겠네. 그럼 각자 다니는 걸로 해.”

“어어, 생각해 보니까 개털이 맞는 것 같아!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빗질 잘한 개털 정도?”

“…….”

“아닌…가?”

“…….”

“죄송합니다. 버리고 가지 마세요. 얌전히 있을게요.”

남자는 행여 내가 버리고 갈세라 냉큼 다가와서는 코트 자락을 잡았다.

그 손을 툭 쳐서 떨어뜨리며 물러서자 녀석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나 이래 봬도 은밀하게 걸을 자신 있어!”

“은밀한 건 필요 없어.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일 거니까.”

“아, 그건 좀.”

“방법이 안 맞으면 굳이 같이 다닐 필요 없지.”

“아니아니, 좀 좋은 생각 같다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서둘러야지.”

순식간에 말을 뒤집는 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안절부절못하더니 내게 내쳐진 손을 다시 꼼지락거렸다.

“…미안. 진짜 힘들어서 그러는데 10분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나 다리가 안 떨어져.”

“…….”

시무룩한 목소리만 들으면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나도 그렇게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긴 상성이 안 좋다니까.’

던전 안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축축하고 후텁지근했다.

몸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공기의 질감이 팔다리를 휘감아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온몸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거기서 더 버티면 늪에 잠기듯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다가 픽하고 죽어 버린다.

침식과 개화 던전을 닫아 놓고도 이 던전은 고작 봉인에 그쳤던 이유이기도 했다.

“안돼.”

“진짜 안돼? 정말? 딱 10분인데?”

잠시 고민하다 부정이 늦게 나온 탓일까.

녀석은 조금 더 밀어붙이면 내가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로 재차 물었다.

하지만 이럴수록 거절은 확실해야 한다.

“안되지는 않지. 그 10분이 살아 숨 쉬는 마지막 휴식이어도 괜찮다면.”

“…….”

“볼일 끝나도 시체 묻어 주러는 못 오니까, 유언 있으면 미리 남겨.”

“우와… 유언이래. 진짜 악마다.”

이제 정말 악마가 됐으니, 저건 딱히 욕도 아니었다.

“마지막 유언 잘 들었어. 악마는 갈 테니까 잘 쉬고.”

“쉬기는! 여태 쉬고 있었는데. 자, 그럼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힘들긴 한 건지, 녀석은 목덜미를 훔치며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걷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걸 보면 어디 기대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텐데.

삶에 대한 미련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보다 친구야.”

그대로 얌전히 걷는다 싶었던 녀석이 이상한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왜 친구야.”

“아, 그렇긴 하지? 따지고 보면 내가 형이네. 그럼, 앞으로 태준아 하고 불러도 돼?”

‘되겠냐.’

세는 걸 잊은 지 오래라 지금 내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갑게 이름을 부를 정도가 되려면 녀석이 천 번은 회귀하고 와야 급이 맞았다.

‘그나저나, 내 나이가 스물아홉보다는 적다고?’

뜻하지 않게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얻었다.

녀석이 내 나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어딘가의 기록을 봤다는 뜻일 터.

인사를 나누고, 식당을 같이 쓰고, 내 이름과 나이를 아는 정도라면 같은 집단에 소속된 적이 있다는 의미일 거다.

‘귀환?’

명확한 키워드가 떠오르자, 그간 모은 정보가 하나로 맞춰졌다.

‘아아, 그래. 그놈이 있었지.’

그간 봤던 사람 중 가장 유감이 없었던 사람.

내가 회귀를 포기하고 가장 먼저 다음 용사로 점찍었던 인재.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회차마다 일찍 죽거나 실종돼 버리는 바람에 포기했던 진성 개복치, 백의건.

‘매번 여기서 소리소문없이 혼자 죽어 버렸던 건가?’

어쩐지 구덩이에 빠져 비참하게 죽어 갔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바람에, 놈이 조금 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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