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뭐야. 너도 날 알아?
얹혀살기 시작한 뒤 딱 5일째 되던 날.
나는 아저씨가 잠든 걸 확인하자마자, 베란다 창문으로 은밀히 빠져나왔다.
‘약속 어겨서 미안합니다.’
아저씨가 서른다섯 번쯤 강조했던 ‘혼자서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겨 버려서 양심이 조금 아팠다.
‘하지만, 나간 걸 안 들키면 어긴 건 아니지.’
괜히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무사히만 잘 다녀오고.
아저씨가 내 외출 사실만 모르게 한다면.
결국 마음 상하는 일 없이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태준이 씩씩하네. 역시 운동이 최고지? (ง˙∇˙)ว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시스템 창이 부르르 떨면서 말을 걸어 왔다.
이렇게까지 혼자서 일방적으로 말을 해 대고 있는데 전혀 질리지 않아 보였다.
이 정도면 집요한 걸 떠나서 은은한 광기까지 느껴졌다.
‘그래. 혼자서 어디 실컷 떠들어 보든가.’
나는 이제 시스템을 듣지도 않는 라디오를 틀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보다 구진산이 어디지?’
어쩐지 욕실에 방치된 지 한참 되어 보이는 나르카스를 찾아 쥔 채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단말기 없이 낯선 곳을 돌아다니려니 영, 감이 안 왔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여기가 충북 제천이라는 거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제천에는 하수구 균열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큰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다.
처음에는 F등급의 단일 던전으로 보였지만, 갑자기 폭주하듯 돌변하며 일대를 집어삼키는 최악의 던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토 절반이 날아갔다.
그때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헌터들이 제주도에서 국제회의 중이었던 터라, 이 던전 폭발에 휘말려 싸그리 죽고 말았다.
‘일전에는 이걸 어설프게 봉인하는 데 그쳐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없었어. 봉인해도 결국 파편은 남아 있는 거니까.’
어쩐지 이상하다 싶긴 했다.
내가 암만 지구에 흩뿌려진 하스칼의 파편을 봉인시키고 균열을 메꾼들, 세상은 반드시 멸망했기 때문이다.
분명 큰 문제 없이 잘 막아 내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이 멸망하니 얼마나 황망하던지.
그 이유를 몰라서 회귀를 포기하기 직전까지 헤매고 또 헤맸다.
그런데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니.
균열은 지구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고, 아무리 균열을 봉인해도 결국 지옥의 균열을 어쩌지 못하면 지구도 멸망하게 되는 거였다.
‘봉인은 결국 임시방편이었던 거야. 타들어 가는 심지만 끄고 폭탄은 그대로 둔 거라고. 지옥에서 원격 조종 할 수 있던 것도 모르고.’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쉬운 걸 몰라서 빙빙 돌고 있었다니.
결국, 지옥에 정답이 있었다.
마왕이 무서워 피할 게 아니라 정답을 찾을 때까지 지옥에 가야 했다.
그래서 파편을 흡수할 힘을 탈취하거나, 지옥의 균열부터 메꿔야 했던 거다.
그걸 포기하려는 순간 알게 되다니, 운명이란 게 참 얄궂었다.
‘그래서 오닉스한테 지옥이 지구의 일부냐고 물었을 때, 하스칼이 대답하지 못하도록 막은 거였어.’
아직도 지구와 지옥이 같은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둘은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멸망급 던전이라고 했지. 그걸 막으면 돼.’
솔직히 일개 사람이 감당하기엔 스케일이 너무나도 크지만.
왜 나는 이토록 기분이 좋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헤맬 때보다, 명확한 목표가 생기니 즐겁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로 내 손으로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스칼의 파편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던전으로 가는 길은 모르지만, 위치는 알 것 같았다.
마치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감각이 나를 이끄는 기분이었다.
그 감각을 느끼는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하스칼의 마력을 가지고 있고, 놈에게 종속됐기 때문에 파편을 흡수할 수 있을 거야. 굳이 지옥에 가지 않아도 지구에서 해결할 수 있어.’
마치 기름을 기름으로 녹이듯.
누군가 알려준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봉인이 아닌, 존재 자체를 지울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다만 걱정하는 건….’
나는 심장께를 만졌다.
이곳에 잠들어 있을 저주는 내가 던전을 봉인하면서 걸리게 된 것이다.
보라색 등급 이상의 거대 던전은 저마다 특성이 있는데, 그 특성 던전을 마지막으로 닫는 사람에게 반드시 저주가 씌었다.
하지만 그 던전을 닫지 않으면, 던전이 폭발하며 인근을 집어삼키고 전염병처럼 저주가 번져 나가게 되니 누군가는 희생해야만 했다.
‘새로운 저주가 더 생기는 건 문제없는데. 이러다 내가 죽으면 저주가 어디로 옮겨갈지가 문제네.’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파편을 흡수하고, 늦지 않게 지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가는 길은 하나뿐인데. 지금 걱정해서 뭘 하겠어.’
내가 던전을 닫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있을 상황을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목표부터 해치우는 게 맞았다.
‘아. 아저씨가 상처 만지지 말라고 그랬는데.’
무심코 가슴께의 상처를 만지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누군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주변을 살폈다.
‘어.’
언제 내가 산을 타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우연히도 청보랏빛으로 빛나고 있는 던전 입구가 보였다.
벌써 진화하기 시작했는지 색깔이 제법 보랏빛에 근접해 있었다.
이 정도면 라엘이 나를 인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솔직히 공짜 기회가 한 번 더 생긴 거 같아서 기분이 나쁘진 않네.’
살벌하게 일렁이는 입구에 당도하자 고요했던 심장이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던전만 막을 수 있다면 앞으로 2년간은 인류가 안전할 것이다.
내 행동 하나로 반드시 보장되는 안전이라니.
이 어찌 달콤하지 않을쏜가.
‘그래. 이런 보상을 원했던 거라고.’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라는 말?
그런 말은 다 개소리다.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에 공허함을 느낀다.
목적 없이 쳇바퀴를 끝없이 돌다 보면 결국 어딘가가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법이다.
그래서 눈앞에 명확히 보이는 목적 있는 이 길이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나는 빛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던전 입구를 향해 달렸다.
‘죽지 않길 잘했다.’
처음으로 예상치 못한 변수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백의건은 자신이 욕심부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뛰어다니는 자그마한 슬라임 따위에 시선도 주지 않고 무작정 아이템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덧 던전에 갇혀 버렸다.
더욱이 간간이 보이던 슬라임은 어느덧 사라져 있었고.
키이익-
멀리서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음산한 숲 모양으로 지형이 변해 버렸다.
왔던 길을 돌아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마치 한 번 걸으면 사방이 천 번 변하듯.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다가 이내 기괴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껴서 시야 확보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곳은 온통 미로였다.
까악까악- 푸드덕!
스오오오.
새는 보이지도 않는데,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서늘한 것이 백의건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지면서도, 닿은 곳에서부터 번지는 차가움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여긴 뭐 하는 던전이지.’
아까부터 소환마법이 전혀 들어먹질 않았다.
질척질척한 늪을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체력은 점점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결국 눈앞이 핑 돌면서 어지러워졌다.
두통에 이어 이명, 환각, 환촉을 느꼈다.
공포와 외로움, 무력함에 점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닌가. 허웅석 아저씨가 들어왔으면 오히려 더 위험했으려나.’
차라리 자신이 들어온 게 잘된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 아저씬 옛날부터 눈치가 빨랐다니까.’
엄마가 눈치 빠른 사람 옆에 딱 달라붙어서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안 들었더니 이 꼴이었다.
‘그냥 아저씨 따라갈걸.’
뒷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해드린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가서 위로라도 건넬 걸 그랬다.
‘하수구 던전…. 나도 갔었어야 했는데.’
백의건은 문득 귀환 길드가 그리워졌다.
모두가 강하고 유명했지만, 은근 알게 모르게 서로를 챙기고 사이도 제법 돈독했었다.
길드장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구 하나 소외되는 것 없이 모두가 자기 급에 맞는 던전에 배치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환 길드에선 파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게 필요 없기도 했고.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길드를 컨트롤 하는 것처럼, 참 안락하고 편안했었는데….
“…킁.”
백의건은 코를 훌쩍였다.
괜히 모든 게 서러웠다.
젊은 나이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비참히 죽어 가는 이 상황도 그냥 서럽고 슬펐다.
“뭐야. 누가 여기서 질질 짜.”
“?!”
그때, 선명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백의건은 설마 환청이 더 강해졌나 싶어 눈만 둥그렇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어떤 힘이 목덜미를 옷길을 확 하고 당겼다.
“으어어억!”
그 갑작스러운 힘에 백의건은 손을 휘적휘적하다가 퉁 하고 무언가에 부딪히자 반사적으로 잡았다.
따뜻한 온기를 무심코 더듬대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상대를 바라봤다.
“어어, 태준 헌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 길드원을 만나자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하자, 상대가 그 손가락을 잡아 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너도 날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