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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70화 (70/80)

70. 어디 한번 물고 빨고 맘대로 해 보든가

‘하스칼은 변태인 건가.’

진지한 의문이었다.

유혹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 꼭 내가 정신을 잃으면 미친 듯이 박아 대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쪽에 취향이 있는 거 같지?’

생각해 보면 놈이 내 몸을 가지고 놀다가 본격적으로 쑤셔 박기 시작한 것도, 내가 자각몽을 꾸던 때였다.

그 이후로도 의심할 만한 사건이 몇 번 더 있었으니 이건 무척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아니면 오닉스 놈이 하스칼을 물들인 건가?’

오닉스를 떠올리자 의심은 점점 더 타당성을 얻었다.

녀석은 이런 쪽으로 난놈이었고, 오닉스의 좆같은 기술을 배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스칼은 평소 나를 바싹 마른걸레 쥐어짜듯 질리도록 괴롭히긴 했지만, 그래도 꽤 평범하고 정석적인 체위를 고집했다.

그런 놈이 갑자기 뭐에 눈이 돌아서 사정하는 걸 막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 슬라임에 촉수라니. 이건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야.’

마왕이나 대공이나 쌍으로 또라이라니.

진심으로 지옥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행여 놈들의 미친 짓에 질린 악마들이 지구로 우르르 이주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음…?’

나는 침대에 잘 말린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다가, 문득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깨어나면 늘 붙어 있던 하스칼조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놈의 변태적인 성향을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놈에게 붙들려 흔들리고 있어야 할 텐데 모처럼 담백한 기상이 아닌가.

태준아 굿모닝! ✧╰(*´꒳`*)╯✧

잘 잤어?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자, 단박에 검은 창이 떠올랐다.

일어났으면 얼른 기지개를 켜주자. ε٩( ºωº )۶з

얼른 허리 펴고. 쭉쭉!

그거 알아? 지구는 어느덧 완연한 봄이 됐어. 날씨가 정말 좋아.

녀석도 일방적으로 쏟아 내는 방식에 익숙해진 모양인지, 이제는 정말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그 말을 가볍게 넘기려던 나는 녀석이 던진 아무 말 중에서 정보 하나를 주워들었다.

‘지구가 벌써 봄이 됐다고?’

계절만으로는 내가 쓰러진 사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하스칼을 따라 지옥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늦가을이었으니 최소 3개월은 지났을 것이다.

‘슐츠만이 균열은 제대로 열어줬으려나.’

뒤늦게 옆으로 밀쳐놨던 사건을 하나하나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가슴을 찌르고 쓰러져 있느라 마무리가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헌터 놈들도 머리가 있다면 그 상황에서까지 나를 의심하느라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쓰진 않았으리라.

‘나중에 만나면 뭐라도 보답해야겠네.’

집들이 선물까지 거절하는 성격을 보면 내가 뭘 주겠다 한들 쉽사리 받으려 들지 않겠지만, 애인에게 줄 선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테다.

나는 천사들이 환장하는 아이템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허웅석. 그 아저씨가 진짜 의외였는데.’

의심은 더럽게 많았지만, 연륜 덕인지 허웅석은 눈치가 정말 빨랐다.

상황이 돌아가는 기류를 읽는 판단력이며, 순발력까지 인생 1회차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잔머리였다.

그 돌발 사고 속에서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걸 돌려받다니.’

나는 시스템의 주의를 끌지 않는 선에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슬쩍 굴려보았다.

허웅석이 내게 꿀밤을 먹이고,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소유권을 이전시켜준 ‘여우 꼬리 반지’였다.

분신을 이용해 휴고 품에서 빠져나오라는 의미로 준 거겠지만, 이 반지는 더 그럴싸한 방법으로 쓰일 예정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딱 그 시기적절한 타이밍이었다.

“……?”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무심코 고개를 내리자, 가슴팍 한가운데에 메워지지 않은 상처가 보였다.

저주 때문에라도 진작 아물었어야 할 상처가 어쩐 일로 멀쩡했다.

나는 상처 주변을 슬쩍 쓸어 올렸다.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만, 틈새로 금빛 부스러기 같은 게 조금씩 흘러나왔다.

태준이 뭐 하려고?

손톱 끝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그러자 자그마한 구멍이 조금 더 갈라지며 금빛 빛 가루가 폭죽을 터트리듯 뿜어 나왔다.

그 순간 평온하게 말을 걸어오던 시스템이 미친 듯이 검은 창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위험! 생존에 치명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검은 창이 미친 듯이 중첩되는 바람에 어떤 페널티가 어떻게 쌓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이상한 디버프가 쌓인들, 내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나르카스는 귀속형 아이템이잖아.’

다만 궁금한 것은, 이 상처가 어떻게 생겨났느냐 하는 거였다.

귀속형 무기는 결코 소유자를 해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 뭣 같은 원칙의 강제성을 구덩이에서 몸소 겪은 뒤에는 무조건 보조 무기를 챙겨 다닐 정도였다.

‘나르카스.’

녀석을 부르자마자 눈앞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내가 쓰던 검이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나르카스는 완전히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안 돼, 태준아!

빨리 검 집어넣어!

위험한 짓 하면 싫어어! (˃̣̣̣̣⌓˂̣̣̣̣)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나르카스를 꺼내자 시스템 창이 더욱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하스칼의 손에 타락하면서 귀속형 패시브가 사라진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이템 정보 확인하고 싶은데.’

나는 나르카스를 쥔 채,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시스템이 눈치챌 테다.

그런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야! ( ˃̩̩⌂˂̩̩ )

울며불며 난리 난 검은 창을 보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어차피 이제 나는 정말 헌터도 인간도 아니잖아. 시스템한테 의지하는 건 그만두는 게 맞지.’

편리하게 이용하던 인벤토리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편의성을 위해 폭탄을 안고 가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무엇보다 필요한 아이템은 모두 꺼낸 상태였다.

‘후우, 어떻게 조건이 또 이렇게 절묘하게 맞네.’

나는 우선 옷부터 만들어 입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하나의 심상을 그렸다.

사람 하나 정도 빠져나갈 크기의 문이었다.

그 문을 만들기 위해 슐츠만에게 배웠던 대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그러자 하스칼의 방 안에 퍼져있던 고농도의 마력이 내 힘에 이끌려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치칙-!

순간 오른쪽 눈에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사지로 뻗은 마력 알갱이가 온 세포를 짓이기며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큿…!”

그 거센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입가에서 피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순간 정신이 어딘가에 휩쓸릴 만큼 울렁거리고, 시야가 이지러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숨통이 조여오고 온몸이 우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도를 멈춘다면, 내게 두 번 다시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다.

‘왜 핵폭탄급 무기로만 균열을 벌릴 수 있는지 이제야 알겠네.’

압축하고 압축하고 또 압축된 점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커헉!”

이내 다시금 피를 쏟았다.

내 힘으로는 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크기의 점을 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덜그럭.

손을 뻗자 주인을 닮아 타락해 버린 동반고철이 손바닥에 착 하고 감겼다.

확실히 쥐고 보니 알겠다.

나르카스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강한 힘이 부여되었으니, 성검조차 마검으로 타락할 만했다.

‘선물 고맙다. 주인 놈아.’

양손으로 나르카스를 쥐고 온 힘을 끌어모아 강하게 내리긋자, 유리 파편이 튀어 나가듯 공간이 쩌적 하고 벌어졌다.

딱 사람 하나가 건너기 좋은 정도의 균열이었다.

쿠쿠쿠-

나는 불안하게 일렁이는 균열을 보며, 여우 꼬리 반지를 엄지손가락을 세 번 굴렸다.

그러자 찰흙 같은 것이 꾸물꾸물 모여들더니, 이내 내 키만큼 자랐다.

그 무형의 덩어리에서 손이 뻗어 나오고, 다리가 만들어졌다.

공처럼 둥글었던 머리통 표면으로 콧대가 솟고 눈꺼풀이 생기고, 입술 새가 갈라졌다.

또 하나의 서태준이었다.

“…….”

놈이 눈을 뜨자 어딘지 먼 곳을 그리듯 몽롱하고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최근 일부러 저런 표정을 꾸며 내긴 했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니 조금 꼴불견이긴 했다.

‘보답으로 나도 선물 하나 남기고 간다, 새끼야. 어디 한번 물고 빨고 맘대로 해 보든가.’

나는 좆같은 주인님에게 작별 인사를 전한 채, 균열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지옥에서 지구로의 첫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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