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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65화 (65/80)

65.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띠었다

‘뭘까.’

정신은 깨어 있지만, 영혼은 몸을 이탈해서 무(無)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대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조금 심심하기까지 했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인데.’

‘내가 정말로 죽어버렸나?’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또 흩어져 갔다.

기억이 제멋대로 분해됐다가 다시 모이며 누덕누덕한 모자이크처럼 변했다.

‘어…, 내가 방금 뭘 생각하고 있었더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나를 온전히 붙잡아 두기란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해도 의식이 흐려져 무언가에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그것에 삼켜져 편안해지고 싶다가도, 심리적인 거부감이 억지로 존재를 곱씹게 만들었다.

그러다 아주 잠깐 정신이 몸과 연결되는 것이 느껴졌다.

‘지옥의 균열이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균열 영향권에 든 던전….’

‘멸망 급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활성….’

가장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소리였다.

뒤이어 감촉이 느껴지고, 이따금 강렬한 냄새가 스며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몸과 유리되어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부유하다가, 어딘가에 쿵 부딪혔다.

그 강렬한 감각과 함께 오감이 깨어나더니, 동시에 나는 무언가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 * *

오닉스는 한껏 삐친 체를 하더니, 지지 않겠다며 떠나 버렸다.

분명 연구는 핑계고 뒤로 무언가 꿍꿍이가 있겠지만, 거슬리는 놈이 사라진 건 하스칼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쿨럭, 쿨럭!”

다만, 태준이 놈이 떠난 직후부터 계속 발작했다.

오닉스의 말대로 태준은 눈을 뜨긴 했지만,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각혈하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었다.

이따금 체온 조절조차 어려운지 몸이 급작스럽게 차가워졌다 달아오르길 반복했다.

“다치지 말라고 하면 힘껏 다쳐 오고, 죽을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 죽어 가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

하스칼은 오닉스가 만지작대던 태준의 목빗근을 가만히 쥐었다.

이 아래 경동맥이 흐르고 있었다.

아주 약간만 힘을 줘도 태준은 절멸할 것이다.

그 정도로 죽음이란 건 간단한 일이었다.

“이대로 죽어서 편해지길 바라?”

그동안 하스칼에게 생명이라는 건 유기물이 에너지를 만들고 소모하는 현상, 그게 다였다.

생명체가 내뿜는 감정 역시 불타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으면 더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작용에 의한 반응일 뿐이었다.

돌덩이가 어딘가에 부딪혀 깨진들 슬픔을 느낄 리 없었고, 쓸모를 다한 것은 번잡하니 눈앞에서 치우면 될 뿐이었다.

그런 현상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 쓸 필요가 있을까.

삶이란 건 소모되는 과정일 뿐인데, 그 당연한 작용을 귀히 여길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이상하기도 하지.

하스칼은 어쩐지 작은 변덕 때문에 손에 쥔 인간이 못내 신경 쓰였다.

무언가 죽고 사는 것이 의미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하찮은 미물이 부서지는 게 자꾸만 마음 쓰였다.

“서태준.”

주인이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괘씸하게도, 태준은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한 죄였다.

벌을 받아 마땅한 잘못이고, 그 누구도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었다.

“서태준.”

재차 이름을 부르자, 태준의 목울대가 꿈틀댔다.

“커헉…!”

그러더니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양의 피를 줄줄 흘려 댔다.

“…….”

하스칼은 분명 허락한 적도 없는데도, 태준은 멋대로 죽어 가고 있었다.

실로 괘씸하고 방자한 짓이었다.

“넌 못 죽어.”

태준의 죽음을 떠올린 순간 하스칼은 웃음이라기엔 사납고, 분노라기엔 진득한 감정이 흘러넘치는 표정을 뒤집어썼다.

그와 동시에 공기가 일렁일렁 흔들렸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하스칼의 몸에서 스멀스멀 뿜어 나왔다.

“네 놈이 죽는 순간, 나는 세상을 멸망시킬 거니까.”

쿵!

하스칼이 말을 끝맺자, 지축이 쿠릉쿠릉 흔들리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네가 살던 곳. 보던 곳. 만지고 듣고 말했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질 거다. 인류 비슷한 존재가 발 디디고 살 수조차 없게 행성을 터트려 버릴 거야.”

그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한번 정해지면 결코 무를 수 없는, 신이 내린 예언이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아. 지구가 불시에 멸망한다면, 그 책임은 분명 네게 있을 테니.”

모든 책임이 인간 용사에게 전가되는 순간.

절묘한 타이밍에 태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소리도 없이 열렸다.

“왜. 억울해? 억울해서 도저히 듣고만 있지 못 하겠던가?”

“…….”

“하지만 어쩌겠어. 네가 말한 대로 난 개좆같은 새끼인데.”

하스칼이 비틀린 미소를 띠자 느른하게 뜨인 눈동자가 초점을 잡으려는지 명멸하는 별처럼 희미하게 깜빡였다.

하지만 제대로 불씨를 살리지 못했는지, 이내 잿빛으로 변했다.

“하.”

일어나서도 저런 눈을 할 거라면, 그냥 감고 있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하스칼은 뒤틀린 심기를 숨기지 않고 태준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대로 귓가에 네가 아끼던 것을 어떻게 부술 계획인지 하나하나 읊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부연 태준의 눈이 다시금 새파랗게 타오를 테다.

“……?”

하지만 하스칼이 입술을 열기도 전, 태준이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상체를 맞붙여왔다.

늘 버둥대거나 짜증스레 밀쳐 내던 몸이 역으로 안겨들자 하스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하스칼은 그 순순한 행동이 하나도 기껍지 않았다.

이미 태준은 하스칼에게 입을 맞춘 채, 그가 선물한 검으로 스스로를 찌른 전적이 있지 않던가.

“두 번 속을 만큼 내가 만만해 보여?”

서늘한 손이 태준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밀어 내려 했더니, 오히려 태준 쪽에서 하스칼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흉터가 가득 박인 손이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양 바르르 떨어 대기까지 했다.

“하.”

끊임없이 퍼부어준 마력 덕에 근육이 빠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아 나약해진 탓일까.

아니면 크게 사고 친 탓에 겁을 집어먹은 것일까.

매달리는 힘은 실로 하찮고 볼품없었다.

하스칼이 그런 태준을 밀어 내는 건 일도 아니었으나, 근육이 덜덜 떨릴 정도로 애절하게 매달린 까닭에 자칫하면 팔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가슴의 상처가 메꿔지지 않고 있는데, 여기서 부상을 늘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하스칼은 잠자코 기다렸다.

조금만 버티면 태준은 참다못해 뒤집어쓴 꺼풀을 벗어내고 고약한 성질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간사한 세 치 혀를 놀리며, 제 잇속 하나 챙기지도 못하는 멍청한 거래를 제안하겠지.

거래 계약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그것이 서태준이 스스로 결정한 앞으로의 처우라면 제대로 옭아매 줄 생각이었다.

“…….”

하지만 태준은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비릿한 혈향을 머금은 입술은 아무런 말도 뱉지 않았다.

“아니면 내 인내를 시험해 보려는 건가?”

노란 눈빛 위로 조소가 스쳤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하스칼인데.

참으로 재미난 발상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지구가 낡고 닳아 흙먼지가 될 때까지 버텨야 할 텐데. 감당할 자신은 있고?”

하스칼에겐 찰나와 다를 바 없겠지만 아마 인간이라면 버틸 수 없는 긴긴 시간일 것이다.

“억겁의 시간 동안 내 옆에서 얌전하게 굴면, 죽을 수 있게 해주지.”

물론 지옥에서의 시간이었고, 때에 다다랐음을 결정하는 건 하스칼이겠지만.

그것이 태준이 하스칼과의 계약에서 결정할 수 있는 스스로의 처우였다.

“…….”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은 버티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어쩌면 지구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일지도 몰랐다.

내도록 얌전하던 태준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처음엔 자세를 고쳐잡으려는 셈인가 싶었던 하스칼이 태준의 허리를 받쳐주었지만, 제 허벅지에 사타구니를 뭉근하게 비비는 태준의 행동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흐….”

태준의 입에서 기침 소리가 아닌, 흐느끼며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응….”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뭉개진 소리가 재차 새어 나왔다.

그 소리 안에 미약하게 달아오른 열기가 느껴졌다.

“너….”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하스칼은 태준의 뒷덜미를 잡아 앞으로 당겼다.

새로운 발작 증상이라면 당장 오닉스를 불러내야 했다.

하지만 태준은 떨어져 나간 하스칼의 체온을 갈구하듯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휘적이더니.

제 목덜미에 닿아 있는 하스칼의 팔에 매달리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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