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용사님. 저, 샘나려고 해요
“파편 전부가 균열화되고 있습니다요.”
“…….”
휴고 백작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남부를 관리하게 된 불의 악령이 꼬리를 만 채 고개를 조아렸다.
입천장에 얼음처럼 들러붙은 혀를 겨우 들썩이며 지구 상황을 보고했지만, 하스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마, 마왕님…?”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소멸할 수 있으니, 악령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심스레 하스칼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허헛….”
그 침묵이 너무 무거워서 몸체가 절로 쪼그라들었다.
짓눌려 터져 버릴 것 같은 압박감에 붉게 타오르던 불씨가 잿빛으로 변했다.
보고 따위 집어치우고 당장 도망가고 싶은 충동과 버텨야 한다는 인내 속에서 악령은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서 악령을 구원해준 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오닉스였다.
“가, 각하!”
불의 악령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마구마구 부풀렸다.
오닉스 대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악령은 두려움을 이겨 내고 마왕성에 남은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우, 우와…!’
과연 섬뜩하고 아름다운 뿔.
심장을 후벼팔 것같이 살벌한 손톱.
첨예하고 서늘한 검은 눈까지.
한낱 미물에서 저 자리까지 올라간 대공은 찬란한 어둠과 소금 그 자체였다.
‘오늘 집에 가서 꼭 일기 써야지.’
악령은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며 오닉스에게 자신을 어필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남부로 새로 부임한….”
“인사는 됐어. 폐하께 보고하고 있었잖아.”
“예, 예?”
“마저 이어서 하라고.”
“아, 넵!”
오닉스가 가볍게 손짓하자, 악령은 허둥지둥 나머지 정보를 읊었다.
“지옥에 균열이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요.”
“규모는?”
“전 지역인데요오.”
“흐응.”
오닉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악령은 제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정확하게는 균열 영향권에 든 던전 중 멸망급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활성화되었습니다요! 지상 것들이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이상 징후에 당황했습니다만….”
“다만?”
“어쩐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금방 안정을 찾았습니다요.”
“정보가 샜을 리도 없는데. 신기하다, 그치?”
“저, 정보가 새다니요!”
“그러니까. 샜을 리 없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덜덜 떨어.”
“그런 일은,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요!”
오닉스의 나긋나긋한 추궁에 악령의 불씨가 울렁대며 보랏빛으로 변했다.
도와주러 온 줄 알았더니 실은 제 멱을 따려는 셈인가 싶었다.
과연 비열하기 짝이 없는 악마대공다웠다.
그런 잔혹함까지 멋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덤터기를 쓰고 소멸당하게 될지 몰랐다.
“헌터들이 그 정도로…!”
악령은 어떻게든 보고를 쏟아 내고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놀렸다.
“쉬-”
그때 오닉스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손가락은 악령을 향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
악령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고, 오닉스가 살피는 방향으로 목을 길게 뺐다.
그러자 마왕님이 내도록 품에 안고 있던 하얀 천 안에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보였다.
둥근 귀. 아무런 치장 없는 매끈한 머리통과 밋밋한 몸. 가지런하고 무딘 손톱.
구석구석 살펴봐도 악마다운 구석이 없는 신체를 가진 인간 남자였다.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얼빠진 악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오닉스의 얼굴 위로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악령은 제가 보지 못한 새 무언가가 벌어진 건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제야 악령은 제가 살피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행여 실수로라도 마왕님과 눈이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만, 인간 남자를 흘깃거렸다.
현 상황에서 달라진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마왕님 품에 안겨 있는 인간 남자가 눈을 뜬 것밖에 없는데.
대공은 어찌하여 저런 광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이제 막 부임한 불의 악령의 머리 위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물음표가 두둥실 떠올랐다.
* * *
오닉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태준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이 꽤 초조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용사님, 잘 잤어요?”
오닉스는 상냥한 미소를 꾸며 내며 태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특하게 잘 깨어났으니, 어찌 스스로 찌르는 그런 참혹한 짓을 할 생각을 했냐고 구박하기보다는 무작정 칭찬해주고 싶었다.
“…….”
하지만 눈은 그저 뜨이기만 했을 뿐.
태준은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았다.
“까망아?”
오닉스는 태준이 평소 질색하는 애칭을 불러 보았다.
단박에 짜증스러운 욕설로 때려줄 줄 알았건만, 태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그 무방비함을 깨닫자마자 못된 손이 대범하게 태준의 귓불을 문질렀다.
이전 같았으면 질색하며 손을 쳐 냈을 텐데, 용사님은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낯으로 얌전하게 굴었다.
‘하….’
저 몽롱한 눈을 보고 있자니 흠뻑 취할 것만 같았다.
오닉스는 당장에라도 태준을 자빠트려서 들쩍지근한 체향을 한껏 들이켜고만 싶었다.
마왕이 죄 씹어 놓는 바람에 잇자국이 가득한 목덜미에 목걸이를 씌우고 자신의 발치 아래 꿇려 두고 싶었다.
‘이대로 대공저에 끌고 간다면…?’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용사님을 매어 두고 매일매일 사랑스러운 교성을 들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씨물이 마를 일 없게 한가득 먹여주고.
옷도 친히 벗겨주고.
구석구석 손닿지 않는 곳 없이 씻겨 줄 것이다.
매일같이 온몸의 흉터를 물고 빨고 핥아주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통제해야지.
용사님은 민감하니까, 쾌락에 뇌를 절이고 육체를 중독시키면 그의 바닥까지 모두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스러운 길들임 속에서 까망이는 어여쁘게 흐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허튼짓하는 팔 따위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 없겠지.”
오닉스의 숨기지 못한 사심이 드러나자마자 날카로운 경고가 날아와 꽂혔다.
“안 그래?”
“…….”
재차 확인하는 하스칼의 말에 어느덧 태준의 목빗근 인근까지 내려와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움찔 떨었다.
오닉스는 저가 여기서 조금만 더 꾸물대다간, 하스칼의 경고가 단순 경고만으로 그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허튼짓이라뇨. 지압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기에 잠시 마사지해줬을 뿐인걸요.”
오닉스는 아쉬움을 습관처럼 삼켰다.
“상태는.”
“여전히 엉망이네요.”
“깨어났잖아.”
깨어났으니 괜찮아진 것 아니냐는 뜻이 내포된 물음에 오닉스는 쏟아지려는 웃음을 감쳐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왕 하스칼의 힘은 너무나도 광활했기에 태준의 상태를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바다에 소금 알갱이 하나를 떨어뜨리건 두 개를 떨어뜨리건, 미미한 농도 변화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까닭에 하스칼이 오닉스를 곁에 두는 것이고.
오닉스는 그조차 기회로 잡았을 뿐이다.
‘후우.’
물론 이해관계가 일치했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오닉스는 현재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스칼은 태준에게 죄를 묻기 전까지 노여움을 모두 미룬 상태였다.
그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뿜어져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내지 못하면, 오닉스는 언제든지 휴고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멍청한 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편하게 소멸하다니.’
오닉스 과욕을 부려 일을 키운 휴고를, 속으로 열두 번쯤 죽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 점이 의아하던 참이랍니다. 좋아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용사님은 어떻게 깨어나게 된 걸까요?”
오닉스가 태준의 가슴을 콕 찌르자, 고농도의 마력이 꿀렁꿀렁 뿜어 나왔다.
“히익!”
그와 동시에 불의 악령은 황급히 꼬리를 말고 내빼 버렸다.
태준이 뿜어내는 마력을 하스칼의 것으로 오해한 것이 분명했다.
“앞선 사료가 없으니 답답하네요. 지구에서 인간이라도 잡아 와 연구라도 해 볼….”
그때, 방금까지 미동 없던 태준의 시선이 반응했다.
“연구라도?”
오닉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단어를 반복해 보았다.
하지만 태준에게서 반응이 없자 턱을 쓸어내며 고심했다.
“헌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헌터라는 단어를 뱉자, 태준의 시선이 오닉스의 입술에 따라붙었다.
‘이거….’
무언가를 짐작하자마자 오닉스는 재차 입을 열었다.
“지구.”
“…….”
“인간.”
“…….”
“던전.”
용사의 삶에 밀접하게 관계된 단어를 몇 개 더 언급하자, 태준의 입술이 자그마하게 트였다가 굳어 버렸다.
그 모습에 상냥한 낯을 띠고 있던 오닉스의 표정이 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아아….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까. 용사님. 저, 샘나려고 해요.”
태준은 분명, 지구의 것들에게 반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