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너네는, 사람 잘못 건드렸어
-태준아. 세상은 곧 무너지게 될 거란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말을 걸어왔다.
한 번쯤 생각해 보긴 했지만, 결코 바란 적 없던 끔찍한 미래와 함께.
“누구세요?”
-나는 라엘. 빛과 생명의 신이지.
“농담…, 이죠?”
이거, 게임 시작하기 전에 트레일러 영상이 딱 이렇던데.
순간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환청을 듣나 싶었지만,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농담 좋아하니? 원한다면 자주 해주도록 하마.
“…아니, 그. 음, 네. 왜 나타나셨는데요?”
-곧 세상이 멸망하리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란다.
그의 말에 나는 텍스트를 보여주고 있던 단말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소설처럼요?”
다소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허공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를 상대로 도무지 진지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 그 소설처럼.
하지만 신은 오히려 내 말이 맞았다며 긍정했다.
반쯤 뒷걸음질 치다 얻어걸린 상황이 얼떨떨했고, 뒤늦게 약간의 심각함이 내려앉았다.
내가 읽고 있던 건, 옴니버스식 피폐 판타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메인 주인공 없이 모든 에피소드가 제각기 다른 멸망으로 끝맺는 참신한 소설.
이런 걸 용케 출간해줬다 싶다가도,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가 멸망하다 보니 이 작가가 어디까지 가보나 싶어 읽었는데 이처럼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왜 망하는데요?”
-때가 도래했으니까.
“근데 왜 저한테 나타나신 거예요?”
-네가 세상을 구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지. 이제 곧 위기가 닥칠 텐데 아무런 방비 없이 그냥 둘 순 없었거든.
“친절하시네요.”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그래서 어렵사리 예외를 만들어 보았지. 원래는 안 되는 거란다.
“어, 네….”
신이 뻐기기도 하네.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더니, 신이 화제를 바꾸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 소설을 보면서 무얼 느꼈니?
“어… 작가가 뚝심 있다?”
-그리고 또?
“밑도 끝도 없이 절망스럽다? 이유라도 좀 설명하거나 멸망을 막는 방법이라도 나오면 모르겠는데, 그냥 무작정 멸망하니까 이게 뭔 내용인가 싶잖아요.”
-그건 시간축이 없어서 그런 거란다.
“그게 뭔데요.”
-그 안에 존재했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물이지.
“아, 주인공.”
쉬운 말을 놔두고 왜 어려운 말을 쓰나 싶었지만, 이해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이 없어서 계속 멸망했구나.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등장인물들이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당하기만 하더라니.’
“그러면 제가 그 시간축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건가요?”
-맞단다.
이걸 또 뒷걸음질로 맞추네.
나는 뺨을 긁적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게 되면 세계를 지킬 수 있는 거예요?”
-지킬 자격을 얻게 되는 거지.
그거랑 그건 뭔가 또 다른 건가?
나는 보험 약관의 깨알만 한 글씨를 읽는 기분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저한테 뭔가 능력이 생기 나요? 초능력이라거나, 마법 같은.”
-곧 지구에 각성자들이 생겨나 다양한 능력이 등장할 거란다. 그중에서 너는 미래를 알 수 있게 된단다.
“와! 예지력!”
듣기 만해도 좋은 능력이라 게슴츠레하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예지력과는 조금 달라. 미래를 한번 경험했다가 다시 돌아가는 거거든.
“그럼 미래시 같은 건가요?”
-정확하게는 회귀라고들 하지.
“오!”
갑자기 회귀라는 초능력이 생긴단다.
회귀를 할 수 있다면 복권을 사서 떼돈을 벌 수도 있었고, 누가 죽을지 알고 있으니 미리 가서 구해줄 수도 있었고, 위험에 처하기 전에 먼저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삶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득을 생각하며 주판알을 튕겨 보았다.
-결정했니? 그럼 세계의 새로운 시간축이 되어 세계 멸망을 막아 줄 수 있을까?
“어, 그건 싫어요.”
-……왜?
“무섭잖아요.”
갑자기 선택의 시간이 도래하자, 방금까지의 흥분과 설렘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고작해야 과제 걱정이나 하는 대학생인데 그런 평범한 사람 등 뒤에 세계 존속이 달려 있다니, 무거워서 짓눌릴 것 같은 책임이 아닌가.
-하지만, 네가 수락하지 않으면 세상은 곧 멸망할 텐데?
하지만 신님도 만만치 않았다.
“무조건 망해요?”
-무조건 망하지. 인류가 모두 사라질 거야.
“다른 사람은요? 저 말고 더 똑똑한 사람한테 지켜달라고 하면 안 돼요?”
-세상은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구할 수 있어.
이건 뭐지.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 이건가?
내가 지키지 않으면 그냥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이걸 거절할 수가 있을까?
다시금 내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 신님. 나와 봐요. 우리 얼굴 좀 보고 얘기해요. 이런 중요한 얘길 음성 통화로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미간을 모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허공에 빛무리가 휩싸이더니 점점 사람의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나오란다고 정말 나올 줄은 몰랐지만, 점점 얼굴 윤곽이 생기고 이곳저곳이 갈라지더니 마침내 완전한 모습으로 내 앞에 신이 서자, 나는 반쯤 홀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몹시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저도 그런 얼굴로 태어나게 해주시지. 그럼 살기 더 편했을 거 같은데.”
“하지만 너는 지금 네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리는걸.”
“음, 그러네요. 저도 거울을 보는데 매일 그런 얼굴이 보인다면 깜짝깜짝 놀랄 것 같긴 해요.”
인정할 건 해야 했다.
저런 얼굴로 살면 편하기보단 불편한 게 더 많으리라.
“그보다 궁금한 게요. 왜 세계가 멸망할 것 같은데 신님이 직접 안 지켜요?”
“나는 생명을 창조할 뿐이지, 그것을 지켜낼 자격은 없단다.”
“저는 세계를 구할 재능이 있어요?”
“내가 네게 찾아온 이유지.”
뭘까, 내가 선택된 이유.
무조건 착하고, 흠 없이 무결하게만 살았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어떤 점이 자격을 갖출 만했을까.
갑자기 심장이 조금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뭔가 굉장히 걱정되면서도, 조금 설레는 느낌이었다.
그 자격이 무엇인지 괜히 물어봤다가 별것 아니면 산통을 깰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질문을 삼킨 채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신이 홀리는, 아니 홀리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만 않는다면, 난 늘 네 편이 되어줄 거야. 그러니, 인류를 네 손으로 구원해주렴.”
* *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무조건 물었어야 했다.
나는 끝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막아내느냐고.
정말 내가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맞느냐고.
그렇지 않으면, 원할 때 죽을 수는 있냐고.
‘이걸 또 살아 버렸네.’
나는 꾸역꾸역 또다시 살아 버린 모양이었다.
참 질기고 성가신 목숨이 아닌가.
‘하스칼 놈은 뭘 하는 거야. 진작 죽였을 줄 알았는데.’
악마화가 되면서 몸이 조금 단단해지긴 했지만 짜증 나는 백작 놈이 곱게 갈려 우주 먼지가 되는 것을 보고는, 나는 하스칼에게 수수깡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깨달아 버렸다.
내가 지옥으로 쳐들어와 놈에게 달려들 때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해서 죽여준 것도, 하스칼 입장에선 꽤 많이 어울려준 거였다.
더욱이 나는 대놓고 놈의 뒤통수를 친 참이지 않은가.
진작 갈아 마셨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살아 있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지.’
시간이 생기니 나는 또 습관처럼 생각을 정리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
이전과는 달라진 결과를 내는 원인에 대해.
혹은 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모든 화살표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회귀를 포기하면서부터 달라졌다는 것.
무수히 많았던 지난 회차들과 달랐던 것은 고작해야 이것뿐이었다.
그래서 시스템도 맛이 가고 하스칼도 맛이 가고 헌터들도 맛이 가고 나도 맛이 가 버리는…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내가 무슨 버튼이라도 누른 거야?’
고민해봤지만 선택지라는 건 워낙 곁가지가 많았다.
하나를 선택하면 그 시작점에서 무수히 많은 거미줄이 뻗어나간다.
그걸 거슬러 올라가 명확한 조건을 추론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어떤 조건이 채워짐으로써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걸 테다.
그 까닭에 강제로 목숨을 연명 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건전지 좀 넣고 태엽만 감으면 움직이는 장난감이냐.’
미약한 두통과 짜증이 밀려왔다.
갑자기 라엘이 너무 보고 싶었다.
놈을 만나면 진하게 멱살을 잡고, 반갑다며 주먹을 날려 버릴 것이다.
그 뒤에 묻겠지.
왜 하필 나냐고.
이따위 사기 계약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분명 놈은 내가 세계를 구할 재능도, 자격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도무지 세상은 구해질 생각이 없잖은가.
매뉴얼조차 없다는 듯, 희망은 꽁무니도 보여주질 않는데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쩐지 신이 직접 안 뛰고 알바나 구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소설 원작이 밑도 끝도 없는 절망일 때부터 쎄함을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놈의 빛나는 외모와 후광에 홀려 계약서도 없이 덜컥 계약해버린 어린 시절의 내 잘못이지.
‘아니지! 이건 내가 자학할 일이 아니잖아! 갓 성인 된 놈이 알면 뭘 안다고 그런 계약을 들이밀어? 어리숙한 새끼 속여 먹은 라엘이 제일 나쁜 새끼야!’
솔직히 옥 장판 천 개를 팔아도 칭송받게 생긴 놈이 네가 아니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거절하면 나는 세계를 버린 천하의 몹쓸 놈이 되는 거였다.
선택지는 주지도 않고, 구할래 말래 하는 라엘이 더럽게 나쁜 놈이었던 거다.
라엘만 나쁜가?
‘시스템도 개새끼지!’
부려 먹을 땐 필요 할 거라며 힘을 줬다가 수틀리면 홀랑 빼앗아 가는 치사한 놈이었다.
어려울 때 돕지는 못할망정 열받게 옆에서 깐족대기나 하고.
자꾸 멋대로 속마음이나 읽고 혼자 판단해서 일을 더 꼬아놓지를 않나.
말이나 못 하면 얄밉지라도 않을 텐데, 놈은 일단 너무 시끄러웠다.
‘내 편이라는 놈들이 저 모양인데. 적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 것도 우습고….’
그냥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악마 따위에게 이해를 바라진 않을 거다.
그들에겐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시스템 따위의 도움 같은 거, 하나도 필요 없었다.
이제 뭔가를 믿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감정 소모처럼 느껴졌다.
힘껏 갈리고, 이제야 정년퇴직 좀 해 보겠다는데 편해지고 싶다는 사람을 꾸역꾸역 살려 놓고 저들 입맛대로 다루려는 모습이 눈꼴 시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참고, 협조하고, 희생하지 않았는가.
‘너네는, 사람 잘못 건드렸어.’
기왕 타락한 거, 아무래도 엿을 먹여야겠다.
그것도 아주 크고 더러운 그런 빅 엿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