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60)화 (60/80)

60. 너의 안녕을 기원한다

쿠구궁-!

마왕의 격노가 지옥 전역으로 번졌다.

하스칼의 가슴속에서 튀어 오른 화마는 대지를 쇳물처럼 끓어오르도록 했다.

땅이 울렁대며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진동했다.

쩡! 쩌저저적!

얼음으로 된 벽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고, 이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공기는 까만 타르액처럼 질척질척하게 변해 떨어져 내렸다.

검은 물에 집어삼켜진 모든 것들이 색과 형체를 잃기 시작했다.

모든 마물이 절망하고 악마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지옥에 있는 어느 것도 사납지 않은 게 없었다.

‘마치, 세계가 멸망하는 모습 같다.’

슐츠만은 뻔하지만 이보다 더 걸맞은 표현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신의 힘인가.’

악마에게는 신이라는 단어가 없어 마왕이라 부를 뿐.

하스칼의 본질은 신이었다.

그런 존재의 노여움이었다.

세계가 으스러져도 마땅한.

“…….”

마왕의 분노에 휩쓸리고 있는 세계를 보는 동안, 슐츠만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향했다.

지익-, 직-.

모두가 정신을 잃고 실신한 틈에, 검을 쥔 남자만이 기고 있었다.

벌레처럼 하찮고.

미물보다 미력한 팔로.

남자는 벌벌 떨면서도 태준을 향해 바닥을 긁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마왕이 곁을 허락할 리도 없거니와 슐츠만이 그렇게 두지 않을 셈이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이들에게 결코 그런 편안한 만족을 줄 수 없었다.

저벅.

슐츠만은 마침내 거울 결계에서 벗어나 지옥으로 발을 디뎠다.

연인 오르셀라와 헤어진 뒤, 고향으로의 첫 귀환이었다.

꾸그그극-!

모든 몸이 빠져나오자 굉장한 압력이 그의 몸을 덮쳤다.

“큭!”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버겁다.”

육체가 터질 것 같았다.

정신이 무너지고 으스러져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스칼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 의의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의 오르셀라는 저런 절대자를 상대로 싸워 왔다.’

정말로 대단한 영웅이지 않은가.

그런 영웅이 남겨 놓고 간 세상이다.

더럽고 음습하며 원망스럽기까지 한 그런 세상이지만, 한때나마 소중하게 지켜졌던 작은 세상.

‘가슴이 울렁거린다.’

슐츠만은 1초가 천년 같던 고독을 홀로 기다렸고, 마침내 그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날이 되자 흥분과 슬픔이 교차했다.

이런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르셀라는 사랑은 알려주었지만, 이런 오묘한 감정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으으. 태, 준…!”

상념을 깨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는 파란 눈이, 본래 목표했던 인간 남자에게 닿았다.

남자는 기는 데 방해되었던 모양인지, 쥐고 있던 검까지 놓은 채 태준을 향하고 있었다.

그대로 마왕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갔다간 먼지처럼 사라질 나약한 인간 주제에.

집념은 인정해줄 만했다.

‘인간들은 모두 이렇게 가당찮은 일을 버티며 사는 것인가.’

땀에 푹 절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리운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체구로 세상의 모든 원망과 절규를 떠받치고 있던 고집스러운 등이었다.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 나는 미움받겠지.’

슐츠만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악마에게 있어 거래보다 절대적이자 유일한 것은 약속이었다.

“……후우.”

슐츠만은 망설임을 떨쳐 내고 시든 파김치처럼 널브러진 인간들을 하나둘씩 주워 어깨에 걸쳤다.

종잇장처럼 팔락거리는 가볍고 미약한 신체였다.

“죄인들은 모두 지구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단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이거, 놔!”

슐츠만의 목적을 들은 남자는, 저를 붙잡은 팔에서 벗어나고자 흐느적댔다.

간지럽지도 않은 힘이지만 마왕의 분노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슐츠만에겐 귀찮은 움직임이었다.

“놓을 수 없다. 너는 이대로 지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럴 수…, 그럴 수 없어! 태준 헌터를 놓고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마왕의 관심을 끄는 순간, 여기 있는 전부가 소멸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 모두가 함께 돌아가기로 분명 약속했다고!”

“그렇다. 그가 마왕의 품에 있는 동안, 네 동료는 모두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태준 헌터를…!”

“아니. 네 동료만이다. 그런 거래였다.”

“내 동료에는…!”

남자는 말하던 도중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모든 것이, 숭고한 희생 위에 존재한 기회였다는 것을.

“……동료는.”

검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돌처럼 굳었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당신이 말한 동료에…, 당신은 없었던 겁니까…?”

남자는 그제야 버둥거림을 멈춘 채, 충격이 서린 눈으로 태준이 있는 곳을 향했다.

마지막 남은 힘도 빠져 버린 듯했다.

그래, 고통스러울 것이다.

절망에 가슴이 저미는 기분이겠지.

슐츠만도 한때 겪어 봤던 슬픔이었다.

「맨몸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슐츠만은 표류하는 결계에서 태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건 도움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뒤에야 나올 수 있는, 그런 덤덤함이었다.

‘그런가. 너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거다.’

슐츠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익숙한 희생에 가슴이 쓰라렸다.

“흐…, 태준. 흐으으…, 스승, 스승님…!”

슐츠만의 어깻죽지가 뜨거운 절망으로 젖어 들었다.

인간은 너무도 쉽게 눈물을 흘렸다.

‘우습군.’

슐츠만은 한껏 비웃어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 눌러 담은 채,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공간에서 아주 작은 점이 생겼다.

그 점이 점점 벌어지더니 공간을 찢으며 몸집을 불려 가기 시작했다.

지구로 이어지는 소박한 균열이었다.

‘한때는 이 균열을 오르셀라의 손을 잡고 건너고 싶었는데.’

물론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지금이라도 오르셀라를 위해 열 수 있어 기뻤다.

‘오르셀라. 나는, 잘했나.’

「단 하나의 변수가 되어주겠다고 해서 고마워. 엄청 오래 기다리게 될 텐데, 섭섭하진 않겠어?」

작은 천사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들었던 소리지만 직전까지 들은 듯, 선명한 소리였다.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화답하듯 슐츠만은 짓궂게 웃었다.

오르셀라를 닮은.

오르셀라가 좋아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상냥한, 우리 순정마초. 내 앞에선 솔직해져도 돼. 정말 섭섭하지 않겠어?」

‘……아니다. 사실은 섭섭했다. 나는 네가 모든 걸 포기하고 나만을 사랑해주길 바랐다. 이따위 세상 어떻게 되더라도 너를 마지막까지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균열의 크기가 커질수록 타오를 정도로 붉던 슐츠만의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렸다.

거대하던 근육이 점차 푸석푸석하게 변해 버렸다.

손톱이 빠지고, 시력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이제는 소리까지 잘 들리지 않았다.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마지막 남은 힘까지, 빠르게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오르셀라가 사랑하던 모든 것이 사르르 풍화되고 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슐츠만. 당신은 그런 나까지 사랑하는 거잖아.」

‘그렇다. 나는 당신의 신념까지 사랑했다.’

하지만 이따위 세상은, 당신을 잃을 만큼 가치가 있었나?

나는 모른다.

나한텐 그저 너만 있으면 됐어.

「삶이란 게 원래 팍팍해.」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인내를 했다. 이제야 너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는데. 정작 너는 옆에 없다.’

「사랑해. 슐츠만. 너는 모르겠지만, 수백 번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배꽃 같은 오르셀라.

나도 너를 수백 번 사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헤어지자!」

“이제야 웃으면서 너를 만나러 간다.”

네가 흩뿌려진 세상을, 나 역시 보듬으러 간다.

그것을 위해 안배된 단 한 번의 변수였으므로.

「그럴 땐 안녕 하고 말하는 거야!」

나의 오르셀라.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천사.

슐츠만은 지구로 이어진 균열에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너의 안녕을 기원한다.”

나의, 태준….

* * *

복작복작했던 얼음 결계에는, 소란스러운 정적만이 남았다.

즈즈즈-

괴물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졌던 균열은, 그를 존재케 하는 힘이 사라지자마자 파스스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연결이 끊긴 것처럼 마지막 남았던 거울도 깨져 버렸다.

동시에 어딘가 먼 곳에 떠돌고 있었을, 누군가의 추억이 남은 보금자리도 온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지구에는 감히 닿지도 못할 만큼 아주 아주 먼 곳에서.

소리도 없이.

이런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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