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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7)화 (57/80)

57. 여러분께, 멋진 지옥을 선사해 드리죠

슐츠만을 데리고 헌터들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더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이런 광경이 낯설지 않다는 거였다.

‘내가 그렇게 수상쩍게 생겼나?’

하기는 눈도 짝짝이에, 우중충한 시커먼 옷을 입고 사교성 없이 삐딱하게 구는 남자는 나라도 좀 수상쩍긴 했을 테다.

‘그래도 다 돕자고 하는 일인데. 이걸 또 이렇게 의심받으니 나도 맘이 곱게 먹어지지는 않는데.’

내가 가진 정보라는 게 대부분, 회귀를 반복하며 얻은 것들이다.

거짓말도 어느 정도지.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빼고 껍데기로만 수상하지 않게 이어 붙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희망찬 미래에 대해서는 한없이들 막연하게 관대했고. 그 꿈, 빛, 희망을 부정하는 말은 오히려 반감을 사기 쉬웠다.

하수구 균열에서 인류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도 균열이 인류를 멸망시킬지 모른다는 걱정보단, 귀한 보물을 누군가 먼저 선점해 가는 게 더 불안했기 때문이었고.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렵사리 우선권을 따내 던전에 들어왔더니, 내가 무작정 나가라고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뭔갈 혼자 독차지하려나 의심이 될 테지.’

그런 심리를 이해하면서도, 이곳이 위험하다는 걸 말해줄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저들에게 내가 어떤 삶을 반복해 왔는지 이해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어딘가 오닉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변태는 끝까지 도움 되는 게 없어.’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말하는 순간, 어디선가 오닉스가 나타나 모든 걸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그 전에 한시라도 빨리 귀환시키고 싶었지만 무슨 헌터들이 쓸데없이 의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지 모르겠다.

‘인간미는 좀 없어도 고랭크 놈들이 차라리 편했는데….’

사실 높은 등급 헌터일수록 출처가 모호한 정보를 주워듣고 임무에 나서는 것이 익숙했다.

얼핏 듣기에 이상한 것 같지만 헌협에서 판매하는 S급 정보들이 대개 그랬다.

누구 입에서 나온 정보인지, 어떤 경로로 얻게 되었는지, 무슨 검증을 거쳤는지 그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물론 그 정보의 출처를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협회는 어떤 질문에도 무응답으로 응대했고, 정보는 실제로 높은 적중률을 보이며 신뢰를 굳혀 갔다.

돈값 하는 정보에 만족한 고랭크 헌터들은 점차 그런 관행을 당연하게 여겼다.

나중에는 그런 비밀스러움조차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포장돼, 프리미엄 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나 뭐라나.

‘협회 놈들 수완이 보통은 아니긴 해.’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정보의 출처를 제일 궁금해한 건 사실, 협회 쪽이었다.

왜냐하면 그 고급 정보는 늘 익명의 제보자가 일방적으로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공생관계인 거지.’

나는 망나니라는 이미지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정보를 쥐고 있은들, 그걸 믿게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협회가 가진 신용도를 이용했다.

놈들은 내게 정보를 얻고, 나는 놈들을 이용해 인류 멸망을 막고.

좋은 파트너였다.

물론 협회 놈들이 돈 놀음을 한답시고 중요한 정보를 애먼 곳에 팔 때는 조금 빡치기도 했다.

가끔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거액의 돈을 내놓을 때까지 떼를 부릴 땐 공생보단 기생에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뭐, 그래. 좋은 건 아니어도 적당한 파트너였지.’

그렇게 오래도록 중간다리를 끼고 정보를 제공하다 보니 내 입으로 뭘 설득하는 게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잠깐만. 내가 의미 없는 정보로 장난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뒤늦게 우윤혁이 했던 말뜻을 곱씹었다.

‘저놈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간 한 번도 내 이름으로 길드에 정보를 건넨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번 회차에선 그랬다.

그런데 우윤혁은 내 정보를 신용할 수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는 걸까.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

아니면, 협회에게서 뭔가 들은 것이 있는 걸까?

‘하지만 협회 놈들도 내 정체는 모를 텐데.’

뭔가를 놓치고 있나 싶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보다, 두 놈 다 안정된 것 같긴 한데.’

나는 문규빈과 우윤혁을 힐끔 살폈다.

안색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체에 드러나는 반응만으로도 진정된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악마가 만든 결계라 마력이 고여 있었을 테고, 내가 가진 하스칼의 마력도 두 놈이 발작하는 데 영향을 끼쳤겠지. 그사이 제어하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힌 것 같지만, 시간을 더 끌었다간 못 견딜 거야.’

그러면 더 골치가 아파질 테지.

저 두 놈이 기절이라도 하는 순간, 지채정과 허웅석이 나를 싹싹 발라먹을 게 분명했다.

벌써 귀가 시끄럽고 머리가 아팠다.

‘확 그냥 모두 기절시켜 지구로 보내 버려?’

잠시 무력 진압을 떠올렸지만 20이라는 하찮은 숫자가 찍혔던 근력 수치를 떠올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역으로 제압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차라리 뭔가 먹고 떨어지라고 줄 게 없나 싶었지만, 인벤토리 사정을 떠올려 보니 아마 여기서 내가 제일 개털일 터였다.

‘말로 설득하는 재주는 당연하게도 없고. 슐츠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나는 흘깃 거울 너머를 봤지만, 그는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놈이 대화를 권하고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내가 손님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애초에. 악마한테 거래 말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말이 되냐.’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러면 나더러 뭘 어쩌라고.’

또다.

또 익숙한 무기력증이 몰려왔다.

마음은 한없이 초조한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어졌다.

되게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쉽게 흔들렸다.

왜 이럴까 싶다가도 차라리 깔끔하게 죽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죽여 보시든가.”

“뭐?”

불쑥 튀어나온 말이지만, 반쯤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도 피곤해. 싫다는 사람 붙잡고 억지로 뭘 하고 싶지 않다고.”

중력이 새삼스러울 만치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땅에 붙은 것 같은 다리를 지익 끌며 허웅석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여기서 못 나가면 다 죽을 텐데. 그 꼴을 보느니 먼저 뒈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허웅석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뭐, 뭐여 시벌. 이 어린놈 눈깔이가 돌았네!”

“어차피 내가 죽으려던 거 쟤네도 다 알아. 그때 못 죽은 게 한이 됐는데, 오히려 잘됐어.”

문규빈은 행여 허웅석이 정말 날 공격하진 않을까, 다급히 밀어 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워서 녀석을 밀쳐 냈다.

“태준 헌터 진정하세요. 이제 고생도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

“네가 뭘 아는데.”

문규빈이 밀려나자 우윤혁도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그러자 우윤혁은 초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설득하려 애썼다.

“저는 태준 헌터 의견을 따를 겁니다. 그러니 뜻이 맞지 않은 사람들은 두고 저희끼리만이라도…!”

하지만 그 설득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슴 속 무언가가 쩌저적 갈라지는 걸 느꼈다.

“야. 너 나랑 뭐 약속했어.”

거기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불덩이가 목구멍에 쩍 하고 눌어붙는 기분이었다.

그 끔찍한 감정을 토해 내듯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뭔데 그렇게 사람을 포기하는 게 빠르냐고.”

“…….”

“리더가 그러면 안 되잖아.”

리더는 그러면 안 된다.

좋은 자질을 가져 놓고, 세상을 그렇게 삐뚤게 보면 곤란했다.

네놈들이 그러면 나도 속 편히 죽고 앞으로의 미래를 맡길 수가 없지 않은가.

“죽으면 여기서 다 같이 죽는 거고. 나갈 땐 모두 다 같이 나가야지. 왜 팀원을 버리는데.”

나도 아직 한 번도 안 버린 걸 왜 네 맘대로 버리려고 하는데.

내가 공격하면 우윤혁은 칼을 뽑아 들어서라도 나를 막아서야 옳았다.

그게 팀원을 책임져야 하는 팀장의 역할이었다.

“하.”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한 분노였다.

내가 조금 더 똑똑했으면, 거짓말로라도 잘 설득해서 내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수완이 없어서 결국 이 사달을 내고야 만 스스로가 못 견디게 한심했다.

‘이런 생각할 시간 없어. 자책할 시간에 머리를 굴리라고.’

‘근데 방법이 있나? 헌터 힘도 다 잃어버린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슐츠만까지 데려왔으니까. 지구까지 어떻게 내보내기만 하면….’

‘아니, 근데 씨발. 그 출구를 저놈들이 걸어 나가야겠다고 해야 뭘 하지!’

생각은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감정이 흐트러지자마자 손끝에서는 제어하지 못한 마력이 일순간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마력을 물끄러미 보다가 강하게 쥐었지만, 쉬이 통제되지 않았다.

‘이 마력으로 전부 기절시킬까?’

아주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불온한 마력이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그럼 너는?”

내게 밀쳐진 문규빈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왜 우릴 버리는데? 따라오라며. 출구까지 안내하겠다며. 그랬는데 우릴 내버려 두고 죽겠다는 게 말이나 돼?”

“…….”

“나 구했잖아. 거울로 빨려들어 가려는 거, 대신 밀쳐서 도와줬잖아! 나한테 생명을 빚지게 만들고 도망가려고?”

“…….”

“나, 망나니 놈이 뭘 숨기고 있는지. 왜 그러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

문규빈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팔뚝으로 얼굴을 훔쳐 냈다.

그러자 투명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후두두 튀어 나갔다.

“흐으, 안 궁금해.”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아니… 사실 나도 궁금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궁금한데, 그것보다 그냥 망나니 새끼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더 좋다고.”

천하의 문규빈이 질질 짜다니.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광경이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버리지 마.”

놈이 기어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자 한울이 손수건을 건네며 문규빈의 머리통을 툭툭 두드렸다.

사납게 따져 묻던 허웅석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뭐지.’

요란하던 상황이 문규빈의 눈물 하나로 잠잠해져 버렸다.

뭔가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류가 맴돌자, 시선이 절로 우윤혁을 향했다.

그러자 놈은 용기를 얻은 듯,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음. 사건이 있어서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아요. 그 탓에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나머진 제가 어떻게든 설득할 테니, 일단 진정하시고 출구까지 안내를 부탁….”

따끔!

“그건 곤란합니다.”

순간 화끈한 통증이 발목에 번졌다.

무심코 다리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뱀 한 마리가 내 아킬레스건을 물고 있었다.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는데, 멋대로 가출하면 곤란하거든요.”

눈앞이 이지러지고 순식간에 몸이 마비되며 휘청거리자, 근처에 있던 지채정이 내 몸을 받아 안았다.

“모처럼 이렇게 싱싱하고 팔딱거리는 인간들인데.”

분명 안면인식 방해 디버프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아래에서 올려다본 지채정의 얼굴이 낯익은 악마의 얼굴로 변했다.

검은 정장에 하얀 장갑.

신사다운 자세에 비틀린 미소.

“휴, …고.”

어눌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녀석의 이름을 말하자.

휴고 백작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팔을 열었다.

“여러분께, 멋진 지옥을 선사해 드리죠.”

상체를 수그리며 팔을 굽히자, 사방에서 뱀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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