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6)화 (56/80)

56. 태준이가 비치지 않아요

퉁퉁.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헌터들은 또다시 환각이 시작됐나 싶어, 거울을 보지도 않았다.

통통. 통통통.

하지만 이상하게도 연달아 울리는 작은 소리에 허웅석이 고개를 들었다.

“허미 시벌! 놀래 뿟네!”

그가 등지고 있던 거울 너머로 태준이 벽을 퉁퉁 두드리고 있었다.

“…?”

“……?”

“……?”

태준인 걸 확인했을 때는 새로운 환각인가 싶었지만, 가만 보니 이전과는 명확하게 달랐다.

방금까지는 영화를 상영하듯 태준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빴는데, 지금 저 거울 속 태준은 정확하게 자신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거울 너머를 보자, 태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검지로 헌터들을 한 번 가리키고, 엄지손가락으로 제 목 아래를 슥 그으며 ‘죽는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

“……!!”

“태준 헌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헌터들은 다급하게 일어나 거울로 다가갔다.

“태준 헌터! 제 말 들립니까?”

우윤혁의 물음에 태준이 입을 뻐끔대더니,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을 깨닫곤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들린다고 표시했다.

“태준 헌터가 나오려면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헌터들을 제치고 우윤혁이 태준을 꺼낼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태준이 무언가 손짓 발짓하며 설명하려 애썼다.

“하나?”

“열? 엑스? 열이 아니라고?”

“엑스가 아니라 곱하기 아닐까요?”

“아, 뭐라는 거야.”

태준이 아무리 설명한들, 몸으로만 의사를 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헌터들이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는 사이, 태준은 거울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글씨가 뒤집혀서 처음엔 헷갈렸지만 태준이 연거푸 같은 글씨를 써주자 그가 전하려던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거울을 한 개만 남기고 모두 부수라고요?”

“한 개만 남기고 아무거나 박살 내도 되는 건가?”

“그럼 지금 태준 헌터가 보이는 이 거울만 남기고 나머질 부술까요?”

“태준 헌터. 그러면 됩니까?”

“…아니라는데.”

태준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 번 두드리고는 다시금 글씨를 그리기 시작했다.

“상이….”

“상이 비치지 않는 거울을 부수래요.”

“그런 거울이 있었습니까?”

천 개가 넘는 거울을 일일이 살펴야 하나 싶던 때.

“저거요.”

한울은 태준이 두드리는 거울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 말에 모든 헌터의 시선이 그 거울을 향했지만, 애석하게도 거울은 헌터들을 모두 비추고 있었다.

“이거? 이건 내 모습이 보이는데?”

허웅석이 거울을 툭툭 두드리자, 거울에 비친 상도 그의 모습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한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태준이가 비치지 않아요.”

“응?”

“그간 나왔던 모든 영상은 맞은편 거울에 비쳤거든요. 그러면 바통터치를 하듯, 그다음 영상이 그 거울에서 시작했고요.”

“!!”

“그리고 이 거울은, 순서를 따져 봤을 때 가장 마지막이 됐을 거울이었네요.”

그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거울의 규칙성이 밝혀지자 헌터들의 얼굴 위로 유레카를 외치던 옛 현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문규빈이 일어나 스태프를 들었다.

우윤혁 역시 말없이 검을 꺼내 하나의 예외를 남겨 둔 채 신나게 거울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신이 난 건, 허웅석이었다.

이 사람 염병하게 만드는 거울 때문에 얼마나 피폐해졌던가.

거울을 부쉈다가 행여 안으로 빨려 들어간 저 헌터 놈이 잘못되면 분위기는 수습할 수도 없이 나락으로 갈 것이 빤했다.

그 탓에 어쩌지도 못하고 정신 공격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는데 화풀이할 좋은 기회가 왔으니 거침이 없었다.

와장창! 쩌정!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태준이 있는 거울을 깰 때는 모두가 망설였지만 결국 한 개만을 남기고 모든 거울이 부서졌다.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거울을 짚은 문규빈의 손이 쑥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다급하게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고 당기자 몇 년은 헤어져 있었던 것 같던 태준이 빠져나왔다.

“태준 헌터!”

“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사람 걱정되게!”

문규빈이 태준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 징그럽게 왜 이래. 떨어져.”

태준이 질색하며 문규빈을 떨쳐 내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때까지 그러고 있을 기세였다.

“거울에 빨려들어 갔다 온 건 난데. 너희는 왜 몰골이 그 모양이야?”

안면인식 저항 디버프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지만 차림새들이 어쩐지 조금 꼬질꼬질해져 있어 태준이 의아함을 내비쳤다.

“왜. 무슨 마물이라도 나왔어?”

“차라리 마물이 낫지. 염병할 거, 어휴. 진짜.”

허웅석이 불평을 토하자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평소라면 그 시선에 몇 마디 더 투덜거렸을 테지만 허웅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태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거울 밖에서 편하게 있던 우리 몰골은 이 모양인데 정작 안에 빨려 들어가서 뭘 했는지 모를 헌터님은 왤케 멀쩡하쇼?”

“…….”

이번에 입을 다문 건 태준 쪽이었다.

꼴이야 멀쩡해 보이겠지만 어디서 무슨 꼴을 당하고 왔는지, 단 한 마디도 설명해줄 수 없는 것투성이였던 까닭이다.

“…….”

“…….”

“…….”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조용한 분위기를 깬 것은, 지채정이었다.

“태준 헌터님 뒤에 계신 분은…?”

그의 물음에 헌터들의 시선이 태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향했다.

그는 아직 거울을 모두 빠져나오지 않았는데도 거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체격이 굉장했다.

“아. 출구까지 안내해줄 길잡이님.”

“아하?”

지채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듣기는 했지만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거울 너머에서 나타났을까요?”

지채정의 질문에 헌터들의 시선이 이번엔 태준을 향했다.

“마침 운 좋게 만나서 데리고 왔으니까.”

“그러니까, 태준 헌터는. 그 길잡이를 데리러 거울에 들어갔다 왔다는 거네요?”

출구를 알고 있으면서도 왜 탈출하지 않았냐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지채정은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헌터들은 그의 비난을 모두 알아들었다.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는 거지? 그게 사고라는 걸 모두가 본 걸로 아는데.”

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지채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죠. 방금까지는.”

“뭐?”

“하지만 단순 사고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아서요.”

지채정은 그렇게 말하며 위험한 인물에게서 멀어진다는 듯, 한 발짝 물러섰다.

“상황이 너무 절묘하잖아요. 두 분 헌터가 찾던 사람이 제 발로 나타나 준 것도. 사고로 들어간 거울에서 길잡이가 나타난 것도.”

지채정이 턱짓으로 슐츠만을 가리켰다.

그는 거울 너머로 넘어오지 않고 반대편에서 팔짱을 낀 채 대화의 흐름을 듣고 있었다.

“왜 먼저 귀환하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답을 듣지 못했죠. 대답하려던 헌터님이 사라지셨으니까요.”

“그건.”

“네. 사고였죠. 하지만 타이밍이 절묘하네요.”

“…….”

태준의 얼굴 위로 답답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 무어라 반박할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저으며 마저 말하라는 양 잠자코 기다렸다.

“그 설명. 지금 듣고 싶은데요. 가능한가요?”

얼핏 들으면 칼자루를 태준에게 넘기는 것 같지만 실상 지채정이 쥔 채 날로 겨눈 상황이었다.

“채정 헌터. 묻는 건 조금 나중에….”

우윤혁이 말리려 들었지만, 지채정은 그에게서도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솔직히 의심스럽지 않나요? 태준 헌터가 거울로 빨려들어 간 건 사고였는데, 어떻게 파훼법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 쓰벌. 그럼 여태 우리가 저짝 손에 농락당했다 이 말인 건가?”

지채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웅석이 날카로운 어투로 장단을 맞췄다.

“왜 말이 없어. 움켜쥔 정보가 그렇게 귀해?”

“귀하냐고?”

태준은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따위 게 귀해 봤자 목숨보다 귀하겠어.”

“거, 누가 들으면 성인군자 납신 줄 알겠는데.”

“애초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비꼬기만 하잖아.”

“그럼 싸가지 있게 잘 말해 봐. 나도 상냥하게 들어줄 테니까.”

“믿을 자신은 있고?”

“어떤 말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나도 머리란 게 있어서 앞뒤 맥락은 좀 따지거든.”

허웅석이 태준을 몰아붙이자, 우윤혁이 둘 사이를 막아서며 말했다.

“두 분 왜 이렇게 격앙되어 있습니까. 이제 막 돌아온 사람입니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고 난 뒤에 사건 경위를 물어도 늦지 않아요.”

그 반응에 허웅석이 더 화를 내며 발을 쿵 굴렀다.

“아니, 리더. 당신은 왜 뭐만 하면 자꾸 나서서 초를 쳐요.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데 나도 들을 권리 있잖아?”

“태준 헌터는 의미 없는 정보로 장난 칠 사람이 아니고, 결코 해되는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고?”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지만, 저를 믿고 따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야, 이젠 가족도 안 서주는 보증을 S급 헌터가 대신 서주겠다고 하네?”

“바란다면 그렇게 해 드리죠.”

우윤혁이 뜻밖의 선언을 하자 거세게 따져 묻던 허웅석도 움찔했지만, 이내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태준을 가리켰다.

“아니. 내가 바라는 건, 저 쪼꼬만 놈 입으로 뭔 상황인지 설명하는 건데요.”

“……후우. 던전 입구에서도 경고했을 텐데요. 자꾸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면, 임무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 해 보쇼! 어차피 방 빼게 생겼는데 혼자 다니는 게 뭐 어렵다고!”

뜻대로 되지 않자, 우윤혁도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는 허웅석과 우윤혁이 붙을 판이었다.

그런데도 말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대체 어떻게 되먹은 팀인지 모르겠다.

그러자 슐츠만이 작게 중얼거렸다.

“완전 개판이다.”

“…….”

태준은 그 감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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