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5)화 (55/80)

55. 다른 악마들도 사랑을 해?

뜻밖의 제안에 나는 멀거니 슐츠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녀석이 손바닥 위로 붉은 아지랑이 같은 걸 피워 냈다.

그 아지랑이가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싸자, 몸속에 있던 힘이 녀석의 힘에 상호작용하듯 꿈틀대기 시작했다.

“!!”

갑자기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게 느껴져 가슴께를 황급히 부여잡았다.

‘씨발! 발기할 뻔했어!’

나는 익숙한 감각에 당황하며 황급히 다리를 모았다.

아랫배가 움찔대며, 저릿한 전류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간 탓이었다.

“너 이 새끼! 방금 뭘 한 거야?”

“몸속에 있는 마력을 건드려 보았다.”

놈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이상하다. 마력이 두꺼운 벽에 숨어 있을 줄 알았는데, 줄줄 새고 있다.”

“…이상한 건 너지. 난 동의한 적도 없는데 남의 힘을 막 그렇게 납치하고 그래도 돼?”

“아.”

녀석이 짧게 탄성을 내지르자, 끌려갔던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윽!”

그러자 다시금 내 아랫배가 요동을 쳤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릿하게 몰려오는 쾌감에 나는 입술만을 짓씹어야 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슐츠만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처졌다.

“미안하다. 마음이 급해서 실수했다.”

“…허.”

깔끔한 사과에 도리어 할 말이 없어진 건 내 쪽이었다.

‘그래, 모처럼 이야기가 매끄럽게 진행되는데 괜한 걸로 흐름 끊지 말자.’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녀석이 하려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래서…, 내 마력은 건드려서 뭘 하려고.”

“손님은 이제 성력을 쓸 수 없다.”

“그걸 몇 번이나 강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맞아. 다 잃었어.”

“더구나 몸에서 저주의 냄새가 짙게 난다.”

“그것도 맞아.”

“처음 손님이 우리 집에 방문했을 때 내 반응이 조금 거칠었던 것은, 손님이 너무 악마 같았기 때문이다.”

“저주 때문에 신체 변이가 일어나고 있으니까.”

슐츠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었다.

“몸이 악마화되며 안에 마력을 품게 됐다. 그런데 그 힘이 줄줄 새고 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놈이 손짓하자 잔에서 빠작빠작 소리가 나며 옆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금 위로 찻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평범한 힘이었으면, 이렇게 새어 나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손님의 힘은 마왕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악마들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귀신 같은 놈.’

아니, 어차피 악마니 계열은 같긴 했다.

“그것도 맞아. 그래서 그게 문제가 돼?”

“된다.”

어느 순간 찻잔이 부르르 떨더니 파삭하고 터져 버렸다.

“손님의 육체는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터질 것이다.”

“……어, 그렇구나.”

나는 놀랐다는 제스처라도 취해줘야 하나 싶어 눈을 데구룩 굴렸다.

그러자 낌새를 눈치챈 슐츠만이 조금 시무룩하게 말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던 얘기인 것 같다.”

“아니, 그! 알고 있긴 했는데! 실제 예시를 보니까 더 이해가 잘되고 그러네!”

나는 뒤늦게 찔끔해서는 과장되게 녀석을 칭찬했다.

그러자 슐츠만은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몹시 심각한 얘기다.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이동할 뿐이다.”

“어어, 그렇겠지.”

“마력의 주인은 마왕이지만, 손님 몸에 깃들며 조금 변질했다. 그 때문에 손님의 육체가 터져도, 마력은 원래 주인에게는 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새로운 숙주를 찾아서 옮겨 간다.”

“어?”

졸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저주에 걸릴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것이 사람이 될지 사물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주는 대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곤 한다.”

“뭐야! 엄청 심각한 거였네!”

“그렇다. 심각하다.”

정신이 확 들었다.

이건 그냥 내가 죽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숙주를 옮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어?”

“있다. 조금씩 새는 건 응집력이 없기에, 결국 흩어져서 다른 자원이 된다.”

“오.”

“하지만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건 다르다. 핵 자체가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금씩 소모를 해줘야 한다는 거지?”

“맞다. 그러기 위해선 찻잔이 깨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한다.”

“오케이. 이해했어.”

“하나 더. 만약 깨진 그릇을 수리하지 않고 그냥 새게 놔두면, 몸이 점점 약해지고 서서히 죽게 될 거다.”

“그냥 죽기만?”

“아주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 전에 수리하고, 힘을 사용해서 잘 소모하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다.”

나는 어느새 말끔히 붙어 있는 녀석의 찻잔을 보고, 다시금 슐츠만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보니 슐츠만은 내게 귀인, 아니, 귀마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어떤가. 내 선물이.”

“선물?”

“받을 만한가?”

“완전.”

뭣 같은 슬라임 알 따위하곤 비교도 안 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 * *

“허억, 헉!”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 칭찬한다.”

“덕분이긴 한데…, 후우. 악마의 마력도 다뤄 보고. 좋은 경험 했네.”

“손님은 좋은 학생이었다. 덕분에 내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네 목적을 말해도 좋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나는 헉헉대며 바닥에 널브러진 채, 녀석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 슐츠만은 지난 회차에서 오르셀라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고, 그게 나를 만난 목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변수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 목적은 끝이 났다니.

‘설마, 나더러 자길 죽여 달라는 거야?’

갑자기 심장이 덜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안 죽여줄 거야.”

“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

“오르셀라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었잖아.”

“그래. 그랬을 거다.”

“그니까 안 죽여줄 거라고.”

“아.”

차마 대놓고 오르셀라가 죽었다고 할 수 없어 말을 뱅뱅 돌리긴 했지만, 슐츠만은 금방 내 말뜻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실망한 표정을 지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놈은 당장 쏟아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다는 듯,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나는 손님에게 죽여 달라고 할 생각이 없다.”

“…어?”

“오르셀라는 잠시 떠났다. 그에게 가려면 너와 만났어야 했던 것뿐이지, 찾으러 가는 방법을 도와 달라는 의민 아니었다.”

“…어어, 그래. 하긴 천사니까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겠네.”

평생 목숨 바쳐 신념을 지켰다기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다시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스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 그저 나와 만나기만 하면 됐다는 게 다행이긴 하네.’

나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 아닌 간편한 조건으로 녀석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에 안심했다.

‘다만. 놈이 악마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하는데….’

악마들에게 부탁하거나 거래를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지만, 지금 내게 남은 선택지는 슐츠만뿐이었다.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간의 내 삽질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이미 마력 다루는 법까지 배웠는데, 여기서 뭘 또 빼고 앉았어.’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며 놈에게 내가 온 목적을 알렸다.

“여길 온 목적은 지구로 연결된 균열을 열어 달라는 거야.”

그러자 슐츠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들었다.

“좋아. 그러겠다.”

“아니, 잠깐만! 뭐가 그렇게 급해.”

지금 당장에라도 지구를 연결하려는 모양새라 나는 놈의 팔을 잡아 내렸다.

“지금 말고.”

“음?”

“지금 말고. 내 볼일이 끝나면 연결해 달라고.”

새파란 눈이 내 손을 내려다보자 등골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못마땅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짐승의 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놈의 동공이 한껏 조여든 까닭이었다.

녀석의 새파란 눈동자는 하스칼의 노란 눈과 결이 달랐지만, 그 위압감이나 날카로움이 어쩐지 모르게 놈을 연상하게 했다.

괜한 분위기에 쫀 것 같아서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슐츠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말했듯, 나는 힘을 많이 잃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잃어 가고 있다. 지금이어야만 손님이 균열의 방해를 최소한으로 받고 넘어갈 수 있다.”

“아는데, 어쨌든 조금 늦어도 지구로 연결은 해줄 수 있다는 거지?”

“여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손님을 보호해줄 수가 없다.”

“나?”

“너는 성력을 모두 잃었다. 라엘의 가호 없이 맨몸으로 균열을 뛰어넘는 건 위험한 일이다.”

“마력이 있잖아.”

“칭찬해줬다고 자만하면 안 된다. 손님은 그 마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없다. 무엇보다 힘의 근원인 마왕의 허가 없인 균열을 넘을 수 없다.”

슐츠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자격을 상실한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던전과 균열 속은 고농도 방사능이 휘몰아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공간이었고, 헌터에게 부여되는 가호로 몸을 보호해야만 버틸 수가 있는 곳이었다.

즉. 비각성자가 균열에 들어가는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런 나라도 지구로 갈 방법이 있긴 했다는 게 놀랍기는 하다만, 무능해진 내가 지구로 돌아가는 것보다 앞길이 창창한 헌터들을 무사히 살려 보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하스칼을 지척에서 막을 수 있는 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야.’

이대로 지옥을 영원히 걸어 잠근 채 하스칼의 관심을 지구로 향하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무수히 버렸던 지난 회차가 지금을 위한 발판이라고 해도 믿을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 마왕의 허가라고 했지.’

나는 잠시 눈을 굴려 보았다.

“그, 오르셀라 말이야.”

“음?”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천사라며.”

연인 이야기라면 싫은 티를 내던 내 쪽에서 먼저 이 화제를 꺼내자 슐츠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파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오르셀라가 먼저 꼬셨다.”

“오….”

얼굴도 모르는 천사가 제법 대담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 간의 장거리 연애 중인데도 저 악마가 정신도 못 차리고 빠져 있지.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악마잖아. 근데 어떻게 사랑을 했어?”

“나도 모른다. 그냥 정신 차려 보니 이미 난 사랑을 아는 순정마초가 되어 있었다.”

“그 전에 사랑은 해 봤고?”

“나한텐 처음도 끝도 모두 오르셀라뿐이다.”

“다른 악마들도 사랑을 해? 아니면 뭐 좋아한다거나. 그런 경우가 흔해?”

“모른다. 나는 다른 악마 따위 관심 없다.”

“어, 음. 그래. 대답 고마워?”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쓸어 올렸다.

슐츠만도 악만데 저렇게 찐한 사랑을 하는 걸 보면, 그리고 악마 주제에 제법 건실하고 대화까지 잘되는 걸 보면 하스칼도 어쩌면 그렇게까지 정신머리 나간 놈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상황만 이상야릇하지 않았다면 대화가 조금 잘 진행됐을지도 모를 상황이 몇 번 있었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어떻게 대화라는 걸 좀 시도해 볼까?’

대화가 잘되면 세계 멸망 같은 건 그만두자고 설득도 좀 하고, 잘하면 악마도 좀 이해해 보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슐츠만을 만나기 전까진 빨리 죽고만 싶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기대가 샘솟아 몸에 활력이 도는 기분이었다.

내 표정이 좋아지자 슐츠만도 덩달아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직도 지구로 갈 생각은 없나?”

“때 되면 열어 달라니까.”

“그때가 언젠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슬슬 위험하다.”

“나도 내 몸 챙길 줄은 알아.”

“흠.”

“맨몸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말 더럽게 안 듣는 뿔난 망아지들 수거하러 가야지.’

나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신뢰도가 샘솟을 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