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4)화 (54/80)

54. 그런 구역이 몇 곳 더 있을 거다

“아까부터 너만 아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좀 말해!”

결국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다시금 탕 내리쳤다.

그러자 발라당 넘어져 찻물이 줄줄 흐르는 잔을 보며 슐츠만이 씁쓸하게 말했다.

“손님은, 용사의 자질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런 거 알 게 뭐야.”

“맞다. 나도 방금까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놈의 말을 듣다 보니 내내 가슴에 걸려 왔던 가시가 건드려진 기분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 말고도 헌터가 그렇게 많았는데, 왜 하필 내가 과거와 미래를 바꿀 기회를 얻었을까.

나는 처음 라엘을 만나, 계약하던 날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라엘 놈이 시간축 어쩌고 하긴 했었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다 보니 잊고 있었네.’

당시엔 회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특정 패시브 스킬인가 보다 했었지만.

어쩌면 자질을 위해 필요한 게 저 시간축 어쩌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하자,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절대적인 명제가 있었다.”

“그게 뭔데.”

“세상이 최우선일 것.”

“뭐?”

“사랑 같은 것에 한눈팔지 않는다. 역시 그게 용사의 자질인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이야길 해주려나 싶더니만, 뻔한 이야기를 참 어렵게 말한다 싶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세상이 망하면 사랑이고 뭐고 알 게 뭔데. 상대가 남아 있어야 사랑도 하지.”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그게 왜 결과론적인 이야기야.”

“세상을 지키는 도중에도 사랑은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귀고. 취미도 즐기면서. 그렇게 세상을 지킬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놀 거 다 놀면 세상은 언제 지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어쩐지 가슴 한편이 파사삭 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뭐지.’

나는 울렁거리는 명치께를 꾹꾹 누르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서 네가 세상을 지킬 자격을 얻었을 거다. 자꾸만 무너져도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나 무작정 나아갔겠지.”

“…뭐야. 왜 갑자기 추켜세워 주는데.”

“추켜세워 준다고? 전혀.”

‘이 악마 놈이 아까부터 진짜!’

계속 산통을 깨는 슐츠만의 화법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무슨 소릴 하든 제멋대로 구는 하스칼이나 교묘하게 진실 속에 거짓을 섞어 사람 속여 먹을 줄 아는 시스템, 속에 시커먼 꿍꿍이를 숨기고 사람을 떠보기나 하는 헌터들보다 더 짜증 나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 짜증과는 별개로, 나는 녀석의 뒷말이 궁금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애써 온 내게 어떤 평가가 매겨질까 하는.

다소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녀석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놈이 떫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가련하고, 비통한 일이다.”

가련하고 비통하다니.

고작 그런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될 만큼 내 인생이 헛되이 소비된 것은 아닌데.

자존심이 팍 상하는 평가였다.

“난 내 뜻대로 잘 살았고 그게 동정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그 표정은 뭔데.”

“그냥. 보고 있자니 그리워서 그렇다.”

“뭐?”

“내가 사랑하던 사람도 평생 목숨 바쳐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

‘오르셀라…, 죽었어?’

방금까지 화가 났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오르셀라도 나를 사랑했기에 세상을 지키고 난 이후의 미래도 그려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안에 행복이 있었다.”

아까와 똑같은 팔불출의 자랑인데 갑자기 그 목소리에 짙은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가엽다. 자꾸만 무너져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애써 기워 붙였겠지만,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몸에 남은 것만큼이나 누덕누덕할 것이 분명하다.”

“뭔데. 남의 몸이나 훔쳐보다니, 변태냐?”

좀 전 연못에서 끄집어내졌을 때 슐츠만이 그 꼴을 봤나 싶어 눈을 세모꼴로 하고 노려봤다.

하지만 슐츠만은 다시금 하하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보지 않았다. 나는 순정마초다. 내 연인이 너와 꼭 같았으니 안다.”

“순….”

놈을 추궁하려던 내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누가 지어줬을지 너무 명확한 별명에 볼 안쪽을 깨물었다.

“그래서 네게 충고해주고 싶다.”

“무슨 충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아무것도 믿지 마라.”

“…그다지 뭘 믿고 있진 않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슐츠만은 내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네 곁엔, 무너졌을 때 버틸 수 있게 해줄 존재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 존재 별로 필요 없어.”

“너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으니 필요해 보인다.”

“아니거든!”

“그런 네게 선물을 주겠다.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갑자기 웬 선물?”

“그것 봐라. 금세 믿는다.”

“아니, 씨발!”

사람을 가지고 노나 싶어서 녀석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자 녀석이 내 손을 쥐더니 옷자락에서 툭 떼어 냈다.

“꼬시지 마라. 나는 순정마초다. 임자가 있는 악마에게 스킨십 하는 건 옳지 않다.”

“아니, 와…. 어이없네? 나도 눈 있어! 나도 취향 있거든?”

“흐음.”

“그 미심쩍은 눈깔 뭔데!”

“틀렸다. 너는 남녀노소 종족 불문, 모두를 좋아할 관상이다. 그러니 나를 좋아하면 안 된다.”

“안 좋아한다고!”

“갑자기 선물을 주는 것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오, 진짜!”

사람 속은 속대로 뒤집어 놓더니 슐츠만은 정말로 무언가를 건네려는 듯, 허공 위로 손을 그었다.

그러자 시선이 절로 놈의 손으로 고정됐다.

“어?”

생김새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렁이며 드러난 모양새가 어쩐지 낯이 익어 무심코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히는 그립감.

길쭉하게 뻗은 바디.

나의 오랜 동반 고철, 나르카스였다.

“아니, 이걸 왜…. 앗 따거!”

허공 위로 소환된 나르카스를 쥐려다가 손끝 위로 튀어 오른 정전기에 놀라 검을 떨어뜨렸다.

‘고작 정전기에 검을 놓치다니.’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괜스레 눈치를 살피며 나르카스를 쥐려고 하자, 슐츠만은 거대한 몸체를 일으켜 내 손을 밀어 냈다.

“쥐면 안 된다.”

“뭐? 왜!”

“지금의 네게는 위험할 것 같다.”

“아니, 방금은 그냥 손에 전기가 올라서…!”

“이건 성력으로 다루는 검이다.”

“나도 알아.”

“모른다.”

슐츠만은 방금 밀어 냈던 내 손을 잡아 뒤집었다.

반 박자 늦게 놀라며 몸을 물렸지만, 놈이 펼쳐 놓은 내 손바닥 꼴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거 왜 이래…?”

뒤늦은 아픔이 몰려왔다.

손바닥은 마치 뜨거운 물건이라도 잡았던 양, 붉게 부어 있었다.

‘젠장. 하스칼이 보면 또 난리 치겠는데.’

나는 바지춤에 손바닥을 슥슥 문지르며 상처를 가렸다.

“성검을 쥐었기 때문이다.”

“내 검을 내가 쥐는 게 왜 문제야.”

“이건 네 검이 아니다.”

“뭐?”

“이건 네가 쓰던 검과는 다른 성검이다. 주인과의 접속이 끊겨 귀속력을 잃긴 했지만.”

“무슨 소리야! 눈 감고 잡아도 이건 내 검인데!”

슐츠만은 다시 고개를 젓더니 바닥에 떨어진 검을 마력으로 감싸 들어 올렸다.

악마의 마력을 감지한 나르카스가 살벌한 불똥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선물이 독이 되면 곤란하다.”

“야, 야! 어디서 주웠는지 모르겠지만 그 검 원래부터 내 거라니까?”

“성검을 쥘 수 없으면 이건 줄 수 없다. 지금 네게는 성력이 없다.”

“방금은 정말로 정전기가…!”

“흠.”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데.”

“오르셀라가 말했다. 이 성검은 재앙을 베어 낼 유일한 무기라고. 필요한 때가 되면 알아서 나타날 것이다.”

‘그럼 그간 내 소환 요청에 불응한 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는 거야?’

여전히 불똥이 튀어 오르는 나르카스를 노려보자, 검은 도망치듯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나는 솜사탕을 씻어 버린 너구리의 허망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그거, 듣던 중 다행인 말이네.”

“시스템의 눈을 피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뭐?”

‘방금 뭘 피한다고…?’

내 표정이 달라지자 슐츠만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구역이 몇 곳 더 있을 거다.”

“구역이라니?”

“‘자격’을 가진 이들이 마련한 공간. 그런 곳은 시스템이 간섭할 수 없다. 이곳 또한 오롯이 내가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아니, 잠깐만. 여기로 보내려던 건 시스템이었어. 그놈이 이걸 몰랐다고?”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만만했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로 힘을 대부분 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다.”

점점 아리송해지는 말에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악마들이 지구를 침공하면서 헌터 시스템과 인벤토리를 인지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슐츠만은 괜한 말을 했다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당장 이해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제 네게 작은 변수가 되어주는 게 목적이니까.”

하지만 슐츠만의 의도와는 달리, 미간을 누르는 내 손이 조금 더 바빠졌다.

다른 변수는 다 우연의 산물이었는데, 이놈과 얽힌 건 모두 의도가 있는 변수였단다.

‘이걸 다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하지만 덮어 놓고 무시하기엔 이렇게 친절한 변수도 없기는 했다.

그런 내 고민의 기색을 읽었는지, 슐츠만이 테이블을 두 번 톡톡 두드려 내 관심을 끌어냈다.

“그보다 선물을 주지 못했으니, 다른 것이라도 주려고 한다.”

“…굳이 필요 없는데.”

“인간들은 손님이 방문하면 선물을 건넨다고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방문하는 손님도 집들이 선물을 주곤 해. 하지만 나도 준비한 게 없으니까, 서로 쌤쌤인 걸로 하자.”

“싫다. 이건 집주인 마음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상한 데서 고집을 피우는 슐츠만의 머리털을 잡아 뽑고 싶었다.

하지만 숱이 너무 많아 보여 금방 포기해 버렸다.

나는 안 될 것은 빠르게 포기할 줄 아는, 가성비 세대였으므로.

“하아…. 그래서 뭔데. 그 선물이란 거.”

“돕겠다. 손님이 악마의 힘을 다룰 수 있도록.”

“……뭐요? 뭘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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