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3)화 (53/80)

53. 그건. 가련하고, 비통한 일이다

“말했다시피 네가 찾아온 것이 그 증거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증거가 되느냐고.”

조금 더 속 시원히 말해 보라며 재촉하자, 슐츠만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이곳은 시공간을 표류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찾아올 수 없다.”

“표류?”

“단 한 곳. 아마도 네가 갔을 거울 미로. 그곳만이 이곳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다.”

“아니, 잠깐만. 자꾸 얘기가 겉도는데.”

나는 지끈거려 오는 미간을 짚으며 녀석의 말꼬리에 따라붙었다.

“너 말이야. 내가 여길 찾아왔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이전에 만났다고 어떻게 확신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살짝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자, 슐츠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거울 미로에 설정한 특정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나만 알고, 믿음직하다. 그러니 다른 가능성은 없다.”

“…….”

“그보다 손님이 그렇게 뾰족하게 말하니 속상하다. 나는 혼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 내가 혼을 내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여러모로 의심병이 좀 생길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나는 괜히 애꿎은 악마를 잡나 싶어서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이해한다. 삶이란 게 원래 좀 팍팍하다.”

“…그 이해자가 악마라니 기분이 묘하긴 하네.”

“그 또한 이해한다. 종족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데는, 상당히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 녀석, 진짜 건실한 놈인데?’

나는 눈을 끔뻑이며 슐츠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지난 회차에서 만났을 때는 워낙 짧게 스쳐 갔던 데다가 악마라는 편견 때문에 놈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와서 대화하니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뭔데.”

“너는 몇 번째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도록 두루뭉술하던 대화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녀석이 회귀를 정확하게 꼬집으면서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라앉았던 경계심이 다시 뾰족하게 솟았다.

“그건 왜 묻는데.”

“그냥 사소한 궁금증이다.”

“내 대답이 중요해?”

“중요하다. 그리고 그냥….”

“그냥?”

“그냥 가여워서 그렇다.”

‘뭐라는 거야, 이 악마 놈이!’

슐츠만을 향했던 호감이 와장창 깨져 버렸다.

이제 고작 얼굴 두 번 본 악마에게 동정받은 게 어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회귀 덕에 녀석을 두 번이나 본 것이지, 저놈한테 우리는 초면인 사이였다.

“멋대로 동정하지 마!”

“왜? 값진 희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땠나. 수차례 죽고 살기를 반복할 만큼, 세상은 구할 가치가 있었나?”

녀석은 놀랍게도 내가 회귀한 목적까지 알고 있었다.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어쩌면 꽤 많은 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슐츠만. 나는 선문답이나 하자고 널 찾아온 게 아니야.”

“호오. 화가 나면 눈썹이 꿈틀하는군?”

‘이, 악마. 진짜 뭐 하자는 거지?!’

대화 도중 맥을 끊으며 다른 곳으로 화제가 새는 놈의 화법에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제대로 대화를 이끌어 가려면, 내가 먼저 물꼬를 터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거지?’

나는 슐츠만의 찻잔을 노려본 채,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미 상대가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떠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회귀는 악마에게 들키기에는 치명적인 정보긴 하지만, 어차피 앞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미 때 지난 정보가 아직 값어치를 하고 있을 때 팔아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 좋아. 떠보는 건 그만하고 대답해줄게. 네가 짐작했던 것처럼 난, 회귀했어.”

“몇 번이나?”

“글쎄. 천 번은 우습게 넘었지.”

“…….”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숫자였는지 슐츠만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녀석에게 지구로 갈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빠르게 협력을 구해야만 했다.

“회귀 도중, 지구로 도망쳐 온 너를 만났고 지옥의 북부에 숨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 정보를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고.”

“그게 몇 번째 회귀였나?”

“그런 건 기억나지 않아. 회귀한다고 해서 기억력까지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꽤 초기 회차였던 건 확실해.”

“그래. 초기였다고….”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슐츠만의 관심을 되찾아오기 위해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때 네가 그랬어. 누군가를 찾으러 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맞아. 내가 그랬을 거다. 회귀를 오래 반복했는데도, 잘 기억하고 있군.”

“그야….”

나는 벌어진 입술을 다물고 혀끝을 깨물었다.

‘당시 내 의도 없이 나타난 유일한 변수가 너뿐이었으니까.’

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진 패를 까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설마, 시스템과 한패인 건?’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애써 감춘 채, 녀석을 살폈다.

하지만 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고, 단박에 아니라고 우기리라 생각했던 시스템도 잠잠했다.

‘이러면 더 묘한데….’

도대체가 이번 회차는 명확한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녀석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맞는지, 그 도움이 옳은 방향으로 가게 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음.”

내가 입을 다물자 이번엔 자신 쪽에서 이야길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혹시, 연인이 있나?”

“뭐야. 작업 걸지 마.”

“뭐?”

이상한 질문을 하면서도, 이런 대답은 예상치 못했는지 놈이 멈칫 굳어 버렸다.

“어, 음.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나한텐 오르셀라라는 아주 어여쁜 연인이 있다.”

“애인도 있는 놈이 왜 구식 대사로 사람을 꼬시려 들어?”

“그냥 궁금해하는 것도 안 되나?”

“안 돼.”

“애석하군.”

슐츠만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내가 연인이 있느냐고 물어본 건,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 전에 서두가 필요했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서두는 필요 없어. 길게 말할 생각 없으니까. 거래만 성사되면 바로 떠날 거야.”

“급할수록 돌아가라. 오르셀라가 말해준 인간계 명언이다.”

“아니 그건….”

“나에 대해 궁금하진 않나? 거래란 자고로 신용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법이다. 신용을 쌓기엔 대화가 최고다.”

“…….”

“더구나 나는 악마다. 종족이란 벽을 건너뛰고 거래를 이어 가려면, 그에 준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

“대화, 하지 않을 텐가?”

도발하듯 고개를 기울이는 놈의 모습에 머리 한쪽이 달궈지면서도 모처럼 흥미가 생겼다.

‘대체 뭘 감추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나는 녀석과의 대화를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하자, 해! 그놈의 대화. 얼마나 유익한지 좀 들어 보자고.”

* * *

“그래서 내가 오르셀라에게 말했다. 다른 생에서 만났더라도 나는 무조건 너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

“그때마다 오르셀라는 배꽃같이 웃었다. 배꽃 아나? 나무 위로 만개하면 아주 하얗고 작고 어여쁘다.”

“…….”

나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테이블에 턱을 괴고 슐츠만의 이야기를 반쯤 흘려들었다.

‘어후, 팔불출 냄새. 대화를 하자더니 주접을 떨고 앉았네.’

아까부터 줄줄 이어지는 오르셀라를 위한 오르셀라에 의한 오르셀라의 이야기라니.

애인 자랑을 대체 몇 시간이나 하려고 저러나 싶어 잠자코 듣고 있었더니 끝을 몰랐다.

“음? 재미없나?”

“그럼 재미가 있겠…, 아니 뭐. 없진 않네.”

여기서 재미 따위 못 느꼈다고 말했다간, 실컷 자랑한 애인을 모욕했다며 화를 낼까 싶어 대강 손만 휘적였다.

그 성의 없는 몸짓에도 슐츠만은 짓궂게 웃었다.

“아쉽다. 네게도 연인이 있었다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뭐 인마?”

내게 연인이 없다는 건 진작 눈치챈 모양이었고.

그 때문에 모쏠이라고 돌려 까나 싶어 발끈했다.

“이런, 화났나? 악마도 아는 사랑을 모른다는 게 딱해서 그만.”

“싸우자는 거냐?”

“그보다는 궁금하다. 그렇게 열심히 세상을 구하고 나면, 남은 생을 무얼 하고 싶은지.”

‘세상을 구하고 난 다음이라고?’

놈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나는 세상을 구한 뒤의 삶을 한 번도 가정해 본 적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보다 더한 개복치급 세상은 아무리 구해도 멸망하지 않는 법이 없었고, 사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전에 먼저 죽어 없어질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냥?”

“그냥 살겠지, 뭐.”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내 인생은 하스칼에게 저당 잡힌 상태였다.

방금도 놈과 오닉스가 베푸는 좆같은 호의로 배를 불린 참이다.

그런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는 게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구는 뭐….’

세계는 내가 살려 보낼 헌터 놈들이 마저 지킬 테다.

나는 거기에 숟가락이나 좀 얹어 세상을 지켰다는 타이틀을 가질 참이었다.

물론 나는 대단한 관심종자에 욕심도 많아서 내가 한 선행을 감출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 남김없이 흩뿌려 놓은 도움이고 안배였다.

‘그놈들도 고생을 좀 해 봐야 돼. 그래야 저 망나니 새끼가 뒤에서 진짜 더럽게 힘들게 열심히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지.’

그래야 눈물도 좀 줄줄 흘려주고, 이미 죽고 없을 나를 향해 기도도 좀 해주지 않겠는가.

거기서 아주 약간 더 도움을 주자면 마왕이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게만 하면 세계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생각도 들었고.

‘그래. 놈들이 세상을 구해 보기도 전에 멸망하면 그간의 내 고생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거지.’

“음.”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성질이 뻗쳤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가정을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야 한다는 게 불만스러웠다.

그 불만을 담아 놈을 노려보자 슐츠만은 다시금 하하 웃어 버렸다.

“그냥 살다가, 사랑도 하고?”

“안 해.”

“어째서?”

“아, 안 한다고!”

“그럼 무작정 세상만 지키다가 끝나는 건가?”

“왜 이렇게 사랑에 집착하는데! 사랑 안 하면 누가 잡아가냐!”

어느새 진솔한 대화는 다시 뒷전이었다.

성질을 부리며 테이블을 탕탕 내리치자, 슐츠만의 표정이 더욱 즐겁고 흥미롭게 변했다.

누가 봐도 나 혼자 놀아나는 꼴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살지는, 세상 다 지키고 난 뒤에 생각해 볼 테니까 그만 물어봐.”

“왜 네 일을 미루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니까!”

내게는 슐츠만에게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듣는 것, 또 동굴에서 헤매고 있을 헌터 놈들을 잡아다가 무사히 귀환시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후야 내가 하스칼 머리채를 잡고 푸닥거릴 하든 말든, 그건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줄 일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일로 벌써부터 골치 아프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군.”

하지만 슐츠만은 제법 슬픈 표정을 꾸며 내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그래서 네가 선택받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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