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2)화 (52/80)

52.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천사 이름을 들었군

“맞다. 나는 슐츠만이다.”

놈이 순순히 인정하자 나는 반가움보다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녀석이 커도 너무 큰 까닭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슐츠만은 팔과 다리를 잃은 채였고, 뼈대가 굵긴 했지만 몸이 마르고 전체적으로 수척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전에는 새하얗게 바랜 흰머리였는데, 지금 만난 슐츠만은 새빨간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못해도 2미터는 넘겠는데. 도망쳐 나올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굴만 보면 내가 알던 그 악마가 맞는데.

체격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슐츠만을 바꿔치기 당한 기분이었다.

‘눈도 조금 더 새파란 것 같고.’

내가 녀석을 살피는 사이 슐츠만 역시 묘한 눈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그 눈은 내가 빠졌던 연못만치 새파래서, 어쩐지 서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너는 손님이 아니다.”

“손님?”

“정식 방문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러니 너는 손님이 아니다.”

“방문 절차라니?”

“그것은 네가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네가 나를 찾아온 것을 보면, 내가 기어코 성공한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내 의문은 정당했다.

나는 지난 회차에서 슐츠만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녀석은 나를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놈의 말만 들어 보면, 슐츠만이 내가 이곳으로 오도록 인도한 것 같지 않은가.

더욱이 방금 오닉스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온 참이라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흠.”

하지만 내 질문에도 슐츠만은 고개를 기울이며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적의는 없었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색에 몸이 움찔거렸다.

“너다.”

“나, 뭐.”

“너는 과거에 나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이 증거다.”

“……!!”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두 발 물러서며 녀석을 경계했다.

“…만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네가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을 리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성공한 것이다.”

‘이 녀석, 내가 회귀한 걸 알고 있어!’

내 경계심이 배로 치솟았다.

덩달아 의아함도 같이 널을 뛰었다.

내가 죽었다 깨어나며 새로운 회차를 반복하고 있다는 건 마왕 하스칼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이번 회차에서 내가 숨겨 놨던 아이템을 획득한 라엘의 신도, 남지헌 정도나 짐작하고 있을까.

그 정도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 왔던 정보였다.

그런 걸 일개 악마가 알고 있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위험한 놈인가?’

슐츠만이 악마를 배신했다고 해서 반드시 내 편이 되어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에, 나는 긴장의 끈을 더 강하게 조였다.

“그런 정보는 어떻게 얻었어?”

“묻기 전에 우선 방문 절차부터 밟아라. 손님이 아닌 자에게 더는 말해줄 수 없다.”

“나는 그런 절차 같은 거 모르는데.”

“아니. 절차 없이는 어떤 정보도 말해 줄 수 없다. 내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분명 찢어 죽일 것이라고 경고했을 것이다. 너는 기억한다.”

“…….”

맞는 말이었다.

슐츠만은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경고를 기억하고 있던 까닭에, 내가 직접 헌터들을 이끌고 슐츠만을 찾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방문 절차가 있다고는 안 했다고.’

나는 불만스레 젖은 소매의 물기를 짜내며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까먹어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지난 회차에서 녀석이 설명을 건너뛰었을지도.

‘지금 저놈은 자기가 무조건 말했을 거라고,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그럼 분명 그때 오간 대화 중에 뭔가 있을 거야.’

“내가 당장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말이야. 힌트라도 주지 그래?”

나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자 놈은 좀 전의 어색해하던 표정을 지우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흠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래, 너는 그렇게 웃는군.”

또다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상대가 자꾸 의문스럽게 구니 짜증스러웠다.

나만 아는 경우는 많았어도 이토록 일방적으로 모르는 상황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몹쓸 버릇이 들었었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간 회귀를 반복해 오면서 정보를 독식했던 것이 익숙해져 버렸다.

뭔가에 의존하면 사고가 편협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정보라는 건 너무 달콤하고 편안한 방향성을 제시해 자칫 맹신하기 쉬웠다.

‘그런 거에 의존하니까 자꾸 뒤통수를 맞는 거 아니야.’

이전에는 안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안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는데도.

정작 새로운 변수를 찾는다고 그 고생은 다 해 놓고, 막상 새로운 게 우당탕 쏟아지니 겁이 날 지경이었다.

“후우. 장난하지 말고 진지해져 보지?”

“조금, 앙칼진가?”

“…뭐?”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이봐, 악마 씨. 혼자만 알지 말고 나도 대화에 좀 끼워주지 않겠어?”

“나는 악마 씨가 아니고 슐츠만이다.”

“…그래 슐츠만.”

놈이 정정해주는 대로 이름을 불러주자 슐츠만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방금까지 사납고 대단한 위압감을 뿜었던 남자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짓궂고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름을 불린 게 너무 오래간만이라, 기분이 좀 들뜬다.”

“그래그래, 슐츠만. 많이 불러줄 테니 너도 내 질문에 답 좀 해주지?”

간만이라고 하니 안 불러주기도 조금 그래서, 재차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개구진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에 오히려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물론 내가 말하는 발음과 실제 놈의 진명은 다르겠지만, 계속 불리다 보면 그 이름에도 어떤 힘이 생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스칼도 내가 놈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특하다고 했던 건가?’

제법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아니, 가만. 이름?’

이름하니 번뜩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녀석은 내게 어떤 이름을 말해주며, 자신과 만났을 때 그것을 불러 달라고 했었다.

그 이름이 아마도….

“오르…, 셀라?”

내 혀끝에 누군지도 모를 이의 이름이 맺힌 순간.

슐츠만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천사 이름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세가 제법 훈훈해졌다.

단순히 느낌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공기가 봄나무에 꽃이 돋아나듯 싱그럽고 포근해졌다.

더구나 슐츠만의 표정은 상큼한 오렌지 과즙이 터지듯 청량하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대단한 무언가를 내가 알아준 양, 뿌듯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그래, 뭐. 저 정도 체구 앞에선 누구든 작게 보일 법하긴 하다만. 악마치고 제법 낯간지러운 소릴 다 하네.’

나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삐딱한 자세를 취했다.

“설마, 이름을 말하는 게 방문 절차라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다. 오르셀라를 아는 이는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번거롭게 확인하는 이유가 뭔데.”

“증표 같은 걸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맞긴 해. 그런 건 회귀하면 사라지니까.’

나는 놈의 말에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슐츠만은 나머지 설명도 매끄럽게 이었다.

“행여 찢어 죽일 악마 놈들이 손님의 탈을 쓰고 찾아오면 곤란하다. 실제로 악마들이 나를 찾으려 몇 번 시도했다.”

“…….”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슐츠만이 악마들에게 품은 적대감은 상당히 강해 보였고, 또 오래돼 보였다.

“무엇보다, 그 이름을 나만 아는 것이 아까웠다.”

“그러면 더 확실하게 말해주지 그랬어. 그 이름이 방문 절차가 될 테니, 똑똑하게 기억해 두라고.”

“아니다. 그건 보험이다. 손님이 중요함을 인지하지 못해야 정보가 새지 않는다.”

나는 뜻밖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저 말인즉 내가 오르셀라의 이름을 중요한 키워드로 인식하지 않는 이상, 어디 가서 말할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정보는 빼앗길 수 있는 거니까.’

나조차 생각을 멋대로 읽어 버리는 시스템의 등장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행여 악마들이 내 뇌를 헤집기라도 했으면, 이런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빼앗겼을 테다.

“그래서 오르셀라 이름은 기억하되, 그게 방문 절차인 걸 몰랐어야 한다는 거네. 이해했어.”

슐츠만 녀석.

덩치는 산처럼 크고 생긴 건 야수 뺨치게 생겼으면서, 머리 굴리는 게 제법이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손님 취급을 받는 거야?”

“맞다. 너는 내 손님이다. 손님은 대접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슐츠만이 손짓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따위가 나타났다.

놈을 버티기엔 상당히 작아 보이는 의자였지만, 슐츠만은 몸을 구겨 앉고는 내게도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질 것 같으니. 거기에 앉으면 된다.”

나는 앉기 전,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행여 슐츠만이 마음을 바꿔 공격하거나 다른 수작을 부리면 빠져나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사방은 여전히 얼음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나마 익숙한 곳은 내가 빠졌다 건져진 연못뿐이었다.

‘오닉스는 어디 갔지?’

내가 어떤 힘으로 날려 버린 것 같긴 한데 모습조차 보이질 않는 게 이상했다. 악마를 싫어하는 슐츠만이 인지하지 못한 것도 의아했다.

더구나 나는 옷을 다 입은 상태였다.

내가 헤엄을 치면서 차림새를 단정히 한 것도 아닌데, 퍽 기이한 일이 아닌가.

물 때문인지, 기이한 현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을 뒤덮었던 체액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생긴 건 똑같은데, 오닉스와 있던 곳이 아닌 건가?’

어쩐지 시스템이 보내려던 곳이 원래는 여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네.’

알아야 할 게 많아지자 나는 떫은 혀끝을 약하게 깨물었다.

미약한 통증이 올라오는 게 아직은 제정신이 맞는 것 같았다.

“후우.”

내가 주춤주춤 자리에 앉자 허공에서 하얀 찻잔과 티팟이 나타났다.

나한텐 제법 커 보이는 티팟이, 녀석의 손에 들어가니 미니어처 장난감처럼 보였다.

손잡이도 손가락에 간신이 들어갈 만큼 앙증맞았다.

‘어째 따르는 모습이 불안불안한데.’

“…내가 따라줄까?”

“너는 손님이다. 손님은 대접받기만 하면 된다.”

놈은 내 제안도 물리고 투박한 손으로 찻잔이 넘칠 만큼 따랐다.

“마시면서 대화한다. 아마, 입맛에 맞을 것이다.”

“챙겨준 건 고마운데, 지금 내가 뭘 먹을 사정이 못 돼서.”

어렵사리 따라준 차가 고맙긴 하다만, 내게는 음식 자체가 독이었다.

“아쉽다.”

아쉽다고 말하긴 했지만, 놈은 내가 차를 마시지 않는 것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아 보였다.

독은 없으니 마셔 보라며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다.

‘와. 이런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놈이 얼마 만이냐.’

나는 어느덧 조금 감격해서, 그 덕에 녀석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켤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생겼다.

녀석은 차를 한번 본 후 향기를 맡고 입에 머금어 맛을 본 뒤, 천천히 잔을 내려놨다.

녀석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궁금했던 속내를 드러냈다.

“그럼 이제 말해 봐. 우리가 예전에 만난 걸, 너는 어떻게 알고 있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