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48)화 (48/80)

48. 똑똑 슬라임 씨, 계신가요?

지옥에서 시작된 마왕의 분노가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지구를 덮쳤다.

그러자 하스칼이 흩뿌려 놓은 마왕의 파편이 꿈틀대고, 역사상 전례 없던 재앙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띠링띠링-

【헌협본 – 09월22일11:44 대한민국 전지역 다발성 균열 발생주의. 던전발생행동요령에 따라 침착하게 대응해주시기 바랍니다.】

【해양던전안전부 – 해양던전사태위기경보 ‘위험’ 단계 발령. 마물 습격 취약지역 주민, 방문객 등 위험지역에 계신 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 바랍니다.】

각종 단말기가 동시에 재난 알림을 토해 내고,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방금까지 밝았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금빛 불빛이 번쩍대며 곳곳에 낙뢰가 떨어지고, 동시에 우박과 눈이 섞여 내렸다.

바람 한 점 없던 바다가 출렁대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도시, 산, 해안가 할 것 없이 던전이 생겨나고 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고 있던 때.

“??”

재난 징후가 갑자기 발발한 것처럼 이상 현상이 불시에 잠잠해졌다.

무언가 위험한 사건이 벌어질 징조인 걸까.

아니면 위기를 운 좋게 피해 간 것일까.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불안감에 각종 문의가 헌터 협회로 빗발쳤지만 속 시원히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마왕의 현신을 가까이서 목격했던 소수의 헌터들의 얼굴 위로 불안함이 내려앉았을 뿐이었다.

* * *

“또, 또. 욕은 안 된다니까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모를 오닉스가 상큼한 미소를 띠며 단숨에 다가왔다.

한 호흡 만에 거리가 좁혀지자,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걸음 물러서면 오닉스는 두 발 더 가까워졌다.

“애써 잡은 우리 대어, 얼굴 반쪽 된 거 봐. 0.5 용사님이 사라져 버렸네.”

“넌 또 왜 여기 있어?”

“얼굴 좀 봐 봐요. 얼마나 상했는지 보게.”

“왜 여기 있냐니까.”

“뺨도 홀쭉해지고, 몸도 뼈밖에 안 남았잖아요. 역시 집 나가면 고생이죠?”

오닉스는 몇 년 떨어져 지내다 재회한 것처럼 반기면서도 내 말은 가볍게 흘려넘겼다.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서 말해. 왜 여기 있냐고.”

한껏 경계 어린 표정으로 놈을 노려보자 점차 다가오던 오닉스의 발이 멎었다.

그러더니 새삼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놈의 대답을 듣자마자 입 속에 여러 가지 질문이 고여 들었다.

어떻게 알고 왔으며,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고 있었는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이 떠다녔지만 자꾸만 딴소리로 화제를 넘기려는 걸 보니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는 요원해 보였다.

“돌아가.”

“왜요?”

“…….”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했다.

내가 녀석의 상사도 아닌데, 시킨다고 순순히 들으리라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시스템은 뭘 어쩌자고 날 이놈 앞에 보낸 거지?’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 하스칼의 품에 밀어 넣은 것도 빡치는데, 산 넘어 산이라니.

이번에도 내가 고른 선택지 안에 오닉스가 있다고 하면 시스템과 절교를 선언할 생각이었다.

“저는 우리 용사님 보려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자는 주의라며.”

“그럼요. 저는 평화주의 악마예요.”

“그러니까 가라고. 돌아가지 않고 버티면, 나와 싸워야 할 테니까.”

“우리, 까망이. 지금 저한테 하악질 하는 건가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나는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러자 오닉스는 유해한 얼굴로 무해한 표정을 꾸며 냈다.

“그런 위험한 장난감은 가지고 놀면 안 돼요.”

“남이사.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든 말든.”

“우리가 남이에요?”

“…그럼 남이지 뭔데. 애초에 종족도 다르잖아.”

나는 인간.

너는 악마 새끼.

서로를 번갈아 손짓해주자 방금까지 유순한 낯을 하고 있던 오닉스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우리 용사님, 못 본 새 나쁜 소리나 하고. 말도 안 듣고. 자꾸 그러면 혼내줄 거야.”

“……협상은 결렬이라는 거네.”

나는 단검을 던져 역수로 고쳐 쥐었다.

그와 동시에 놈에게 달려들었다.

보통은 머리를 노리기 마련이지만, 면적이 좁아 유효타를 입히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내가 노린 곳은 놈의 가슴 한복판이었다.

날카롭게 벼린 검날이 바람을 베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공간을 벤 직후, 둔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기습공격에 실패했음을 깨닫고 몸을 물렸다.

“!?”

아니. 물리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발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기세는 좋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해서야 되겠어요? 늘 주변을 잘 살펴야죠.”

오닉스가 보란 듯 구두 앞코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제야 시선을 떨어뜨리니, 놈이 내게서 길게 이어진 검은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그림자?’

그림자를 본 순간, 눈밭에서 갑자기 달려들었던 조류형 마물이 떠올랐다.

“우리를 덮쳤던 그림자 새가 네놈 소행이었어?”

반쯤 확신해서 묻자, 오닉스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어쩐지.’

은신할 곳도 마땅찮은 눈밭에 그림자 마물이 나타난 것도 이상했고, 우윤혁조차 애먹던 마물을 헌터 자격을 잃은 내가 어떻게 쉽게 잡은 건지도 의문이었는데, 그조차 오닉스의 수작이었다.

‘아니. 그럼, 대체 언제부터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거야?’

설마 처음부터 미행당했나 싶어 소름이 돋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놈은 어디까지 들은 건데?’

애써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눈을 굴리자.

“이런 위험한 건, 손에서 놓고요.”

오닉스는 앞으로 뻗었던 내 팔을 가볍게 잡더니 단검을 빼내곤 툭 던져 버렸다.

물론 무기를 빼앗고도 풀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가까이 있으니까 용사님한테서 야한 냄새가 나네요. 이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걸까나-”

놈은 돌처럼 굳어 버린 몸을 수색하듯 양어깨를 두드리고 삼각근과 이두근을 주물렀다.

“여긴 아니고.”

팔뚝에서 미끄러져 온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대흉근의 감촉을 즐기듯 멋대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읏….”

“여기도 아닌 것 같네요.”

가슴을 한껏 만지작대던 놈의 손이 겨드랑이 사이로 내려와 잘게 쪼개진 광배근을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굴곡진 복근 아래 배꼽까지 손이 내려왔다.

가슴을 주물럭거렸던 것처럼 몇 번 만지다 말겠지 싶었건만, 오닉스는 허리를 숙여 배 근처에 얼굴을 들이밀고 노크하듯 하단전 부근을 두 번 두드렸다.

“똑똑. 슬라임 씨, 계신가요?”

“!!”

예상치 못했던 놈의 행동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멍청한 짓은 변태 악마가 하고 있는데, 왜 수치심은 내 몫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건데!”

“슬라임 씨가 모처럼 포식했는지 여기가 볼록해서요. 말랑말랑하니 만지는 맛이 있네.”

놈이 천 너머 복근을 어루만지자 붉어졌던 얼굴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이 새끼.

내가 하스칼 놈과 뭔 짓을 하다 왔는지 정확하게 눈치챈 게 분명했다.

“누르니까 냄새가 더 진해지는걸요? 여기, 수맥에서 나는 걸까요.”

“작작 해.”

“하지만 신선한 정기 냄새가 이렇게 풀풀 풍기는데. 나만 빼놓고 즐기다 온 것 같아서 서운해요.”

어느덧 녀석은 포옹하듯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검을 내지르느라 벌어진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우고,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배 속에 마왕님 씨물을 품은 채 동료들을 만나려고 했나요?”

오닉스는 내 엉덩이를 콱 움켜쥔 채, 구멍 주변을 뭉근하게 덧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며 질척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지나친 감각에 눈을 감아 버렸지만, 오닉스는 귓불에 입술을 문지르더니 은밀한 것을 알려주는 양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엉덩이 사이로 야한 물이나 줄줄 흘리면서?”

“…….”

“음란하기도 하지. 순진한 용사님인 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발랑 까졌네요.”

놈은 흘러나온 체액을 윤활유 삼아서는 엉덩이 살을 벌리고 구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

“너무해. 얼마나 즐겼는지, 퉁퉁 부은 것 좀 봐. 제 생각은 안 나던가요?”

쿨쩍이며 차진 액체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고, 배 속에 고여 있던 체액이 넘쳐흘러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시스템!’

이대로 있다간 헌터들이 얼음 결계에 갇혀 죽을 때까지 오닉스와 뒹굴 참이라, 황급히 시스템을 불렀다.

하지만 중요할 때마다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얄미운 이모티콘조차 떠오르지 않아서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그러자 제멋대로 희롱하던 오닉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슬쩍 물러섰다.

“이거 봐. 눈알 또 바쁘게 굴러가는 거. 마왕님이 너무 오냐오냐해주니까, 용사님 버릇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놈이 언제 날 오냐오냐했어.”

방금까지도 멋대로 다쳐 오면 뭘 부수네 마네 하던 놈이 잘도 오냐오냐해줬겠다 싶었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안다니까요.”

“그러니까, 네놈들이 언제 호의를 베풀었냐니까.”

“그것조차 모르면, 나 정말 속상해요.”

“내가 더 속상해. 내가!”

“저런, 우리 용사님이 속상하셨구나. 어쩐지 내장이 축축하게 젖어 있더라니.”

“그 속이 아니…, 하. 씨발.”

시스템은 반응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라 적당히 대꾸해주며 시간을 끌고 있긴 했지만, 점점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닉스는 건수라도 잡은 협회 놈들처럼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실실거렸다.

“그 속이 아니면요?”

“…….”

“또 입 다물긴가요? 궁금하면 나, 못 자는 타입인데.”

“…….”

“사실 제가 비밀을 캐낼 때 늘 사용하는 스킬이 있는데요. 조금 야릇하긴 하지만, 효과가 꽤 좋더라고요. 이건 우리 용사님께만 알려주는 비밀!”

“…으! 너 진짜 나한테 뭘 바라서 그러는데!”

“그냥 친해지고 싶은 거죠. 인간들은 친해지려면 대화를 나누잖아요. 특히 남자들은 홀딱 벗고 같이 씻으면서 친해진다면서요?”

오닉스가 연못을 가리키며 말하자, 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아니. 우린 그만 친해져도 될 것 같은데.”

“왜요?”

“충분히 알 만큼 아니까. 생각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알아.”

“하지만 저는 악마 새끼고, 용사님은 인간인데요?”

“하여튼 잘 안다고.”

농담이 아니었다.

저놈은 세계 제일의 변태 새끼고, 적당히 어울려주다간 홀딱 벗겨 영혼까지 털어 갈 악마 놈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너를 알 만큼 안다는 말에 떨어져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오닉스는 이미 답을 정해 놓은 듯 변태 새끼처럼 말했다.

“우리가 친한 거, 나만 몰랐나 보다. 용사님이 섭섭할 만했네요. 그럼 저도 분발해서 용사님이 속 깊은 곳까지 모두 터놓을 정도로 친해져 볼게요.”

“…….”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지구를 못 지켜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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