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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33)화 (33/80)

33. 대신에, 너-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서-”

“맷집이 좋아서 그런가, 한 대 얻어터져 놓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아….”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주먹을 들어 보이자, 우윤혁이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그렇게 말 같지 않으셨나 봐. 참 야무지게도 씹어 드셨네.”

“어떻…, 아니 당신이, 여긴 왜…?”

우윤혁은 어지간히 놀랐는지 평소답지 않게 허둥대며 말을 쉽사리 잇지 못했다.

“왜. 있으면 안 돼? 진작 죽었을 줄 알았는데 살아 있으니까 신기한가 보지?”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와, 이제는 주변 몬스터까지 다 불러 모을 기세네? 왜. 여기 있다고 폭죽이라도 터트리지.”

“…….”

늘 말 같지도 않은 꼬투리를 잡고 타박하며 대화를 잘라 내는 건 내 전문이었다.

놈 역시 비협조적인 내 모습을 보고는 의도를 깨달은 모양인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네가 물으면 내가 대답해 줘야 해?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는데?”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얼씨구?’

우윤혁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당황한 쪽은 나였다.

천하의 우윤혁이 누군가에게 사과할 일 자체가 잘 없는 데다가 꼭 사과해야 하는 일이 생겨도 그 상대가 나라면 없는 셈 치곤 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윤혁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비법을 연마라도 한 것처럼 내게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보다 손등이 빨갛게 부었는데…. 괜찮습니까?”

“뭐가.”

“설마, 고통도 못 느끼게 된 겁니까?”

놈의 말을 듣고 내 손을 내려다보니, 손등이 조금 부어 있었다.

아무리 예전보다 고통을 잘 느끼게 됐어도 정말 개의치 않을 정도로 하찮은 상처였다.

‘헌터가 고작 이 정도 타박상을 걱정한다고?’

정작 맞은 건 자신이면서 때린 놈을 걱정하는 이 상황이 맞는 건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내가 헛것을 보고 있거나, 지구가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이 흐른 게 아닐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뼈가 상한 건 아닌지 잠시만 보겠습니다.”

우윤혁의 속내를 가늠하듯 노려보고 있는데 오히려 놈은 머뭇대는 기색도 없이 내 손을 잡아 올렸다.

그 손길이 한없이 간지럽고 조심스러워서 살갗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치워.”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녀석의 팔을 쳐 내듯 밀어 내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우윤혁은 내게 맞은 손을 가만히 펼친 채 굳어 버렸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라서 무심코….”

놈은 재차 사과하더니 손안의 무언가를 잡듯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예?”

“대체가, 저런 오합지졸은 뭘까 싶고 그런다고. 이런 난장판은 처음 봐서 말이야. 혹시, 독특한 방법으로 죽어야 얻는 아이템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아니면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어.”

“뭔갈 얻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미공개 던전에 S급 헌터를 밀어 넣는 건,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야? 너라도 못 가겠다고 뻐겼어야 할 거 아니야?”

말하다 보니 조금씩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게 돌파할 수 있는 던전이라면 지도라도 그려 줬을 테다.

하지만 여긴 그저 그런 던전이 아니었다.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마왕의 구역이었다.

‘그래. 뭣도 모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방 새끼들 안전하게 귀가시키는 게 하루 이틀일은 아니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솔자 노릇을 또 해야겠느냐며 속으로 툴툴댔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윤혁은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누군가한테 등 떠밀려 온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그저, 당신을….”

“나를 뭐.”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고?’

순간 이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녀석의 의중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을 넘어서까지 떠보는 건 무의미한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좀 전에 우윤혁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으면 내 몸은 반으로 썰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놈은 팔꿈치가 모두 돌아간 그 찰나에도,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공격을 멈춘 채 뺨을 대 줬다.

녀석이 나를 알아보는 것까진 계산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순순히 맞아줄 줄은 몰랐던 데다가, 나를 향해 복수하고자 하는 의지 따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퍽 이상했다.

‘저놈이 마음 바꿔서 달려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을 텐데 말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윤혁은 그럴 맘이 없어 보였다.

내 무모한 행동을 뒤늦게 눈치챈 시스템은 잔뜩 열받아서 페널티랍시고 색기 레벨을 2로 올려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스템의 반항을 가볍게 무시하며 우윤혁에게 마저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당신을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뭘 찾아?”

무심코 되물었더니, 녀석은 또박또박 같은 내용을 재차 전했다.

“당신을 찾고, 함께 귀환하기 위해 온 겁니다. 그 외에 목적은 없어요.”

사람은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안면인식 저항 디버프 때문에 표정을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늘 믿음을 주는 진실과 신뢰의 아이콘.

불안에 떠는 국민을 다독이는 강인한 기사의 표본.

그런 모습이 연상되는 다부진 표정을 하고 있겠지.

‘그거 되게 꼴 받는 표정인데. 이제 못 봐서 오히려 좋은 건가?’

나는 뜻밖에도 디버프에게서 하나의 장점을 찾아냈다.

“사실,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막막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헤매게 될지. 그사이 당신이 어떻게 되진 않을지. 계속 불안했어요.”

“……”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된 건, 하늘이 도우신 덕이겠죠.”

녀석의 말이 길어지자, 나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꽁꽁 닫아 버리곤 신경 쓰지도 말아야 할 균열로 들어온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맞지 맞지. 태준이를 도운 내가 하늘이니, 맘껏 감사해하도록! 'ڡ'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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