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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30)화 (30/80)

30.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지 기대되네

“……!!

이름을 불리자 태준은 무언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경직하더니, 이내 고개가 뒤로 꺾여 버렸다.

창백한 손가락이 태준의 까맣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잔뜩 기진한 얼굴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름을 듣는 바람에 조금 몰아붙인 감이 있지만 하스칼이 태준을 집요하게 괴롭힌 건 비단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본디 종속된 자의 눈은 주인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야 옳았는데.

눈꺼풀에 감춰진 용사의 눈은 여전히 붉고 검었던 까닭이다.

마력이 담뿍 담긴 씨물도 양껏 먹였고 생명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마왕의 혈까지 먹인 데다가 종속이 이루어진 순간 마지막 남은 성력까지 모두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도 목격했다.

그런데 어째서 신체 밸런스가 여전히 불안정할까.

“소화불량이 맞는 거 같은데.”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어딘가 좀 모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태준이라는 사람 자체가 특이한 건지.

누군가와 계약해 본 적 없는 마왕은 문제의 원인을 알 방법이 없자, 가볍게 혀를 찼다.

하스칼은 피를 한 번 더 먹여야 하나 고심하며, 방금까지 성기를 씹고 있던 아랫배를 꾹 눌렀다.

그러자 반쯤 기절한 태준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헐벗은 등이 드러나자 하스칼은 툭 불거진 척추뼈에 시선을 빼앗겼다.

다쳤을 당시 제법 출혈이 있었을 법한 흉터가 광배근 위로 자잘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흉터를 보고 있자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준은 자신의 안온을 위해 충분히 부탁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것은 모른다는 양 입을 닫았다.

하스칼이 몇 번이고 기회를 주고서야 간신히 내뱉은 부탁 속에는 태준을 위한 것이 아닌, 누군가 어지럽게 발자국을 남긴 매캐한 잿더미만 가득했다.

그런 사람 몸에 새겨진 흔적 역시 어떤 연유로 새겨졌을지가 빤하게 보였다.

“츳.”

흉터를 쓸어 올리며 승모근을 기던 손가락이, 목덜미 위에서 멎었다.

직접 송곳니를 박아 넣었던 목덜미가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하스칼은 태준의 몸에 난 자국 중 가장 흡족한 모양새를 띤 치흔을 가볍게 갉작였다.

저주 덕분에 금방 사라지겠지만, 다시금 새겨주면 될 일이었다.

구구구-

그때. 지축을 울리는 기묘한 소음과 함께 불유쾌한 파장이 밀려왔다.

갑작스러운 파동에 느슨하게 풀려 있던 하스칼의 시선이 창문 너머를 향했다.

하늘 위로 무수히 많은 오큘러스가 생겨났다.

무섭도록 빛나는 금빛 눈알들이 곳곳을 살피더니, 어느 지점을 발견하곤 동공이 한껏 조여들었다.

지옥에서도 춥기로 소문난 북부의 산맥.

그 사이, 균열의 틈새가 짐승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지며 시커먼 공간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닉스.”

하스칼이 침대에서 벗어나 오닉스를 부르자 그 부르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허공에서 한껏 빼입은 악마가 스르륵 나타났다.

“부르셨나요?”

오닉스는 나긋나긋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침대 위를 눈으로 핥듯 기민하게 살폈다.

하지만 기대했던 태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스칼의 침대 위로 검붉은 줄기가 에워싼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피를 머금은 고치처럼 보였다.

“폐하께서 어쩐 일로 결계를 다….”

오닉스는 새삼스러운 것을 본다는 양,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수 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왕성에 결계가 쳐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실제로 지옥에서 가장 방어가 허술한 곳은, 뜻밖에도 마왕성이었다.

하급 마물은 마왕성 인근에 다다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힘에 짓눌려 터졌기에 굳이 결게를 칠 필요가 없었다.

마왕의 기운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어 하스칼의 부름 없이 귀족급 악마가 숨어들어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던 마왕성 한가운데에 없던 것이 생겨나니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스칼은 오닉스의 호기심에 어울려줄 마음이 없었다.

“균열 상황은.”

“우선 보고받은 바로는, 균열 입구가 생각보다 빠르게 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사님 친구들이 힘 좀 쓴 것 같더라고요.”

“생성 위치가 예상 범위에서 벗어났던데.”

“예에. 조금 위에 생성됐지요.”

“조금?”

조금이라는 말에 하스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균열은 서부의 유독가스 지대에 연결되어야 옳았다.

그곳으로 들이닥친 인간들은 수 초도 되지 않아 질식할 것이고 그 시체는 산성 늪에 가라앉아 흔적조차 남지 않아야 하건만.

예상에서 한참 비껴간 북쪽에 연결되었으니, 기획자였던 오닉스를 족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오닉스는 제 잘못이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타 차원과의 연결은 몹시 섬세한 작업인지라, 인간들이 균열을 억지로 잡아 벌리면서 좌표가 어그러진 모양입니다. 좀만 더 어긋났으면 시공간의 미아가 되었을 텐데 조금 아깝네요.”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말투가 건방지긴 했지만.

악마들 또한 시공간에 갇혀 죽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 까닭에 하스칼은 그 일로 더는 문책하지 않았다.

“발칸이 죽고, 북부는 누구 관할로 들어갔지?”

“그놈의 보좌였던 슐츠만입니다. 본래는 하급 개체였습니다만, 발칸의 힘을 흡수하고 귀족급으로 올라온 놈이지요.”

북부의 지배자였던 대귀족 발칸이 태준에게 목이 따인 뒤 시일이 꽤 지난 상태였다.

새로운 악마가 다스리게 되었다면 진작 그 소식이 하스칼의 귀에 들어와야 했지만 수상쩍게도 기본적인 보고부터 생략된 상태였다.

“발칸이 죽은 것만으로 북부가 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산 놈들 기척이 없지?”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군요. 어찌 된 일일까요?”

“…사정은 직접 들을 테니, 놈을 불러.”

“지금요?”

“지금 당장.”

“음.”

여태껏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던 오닉스가 처음으로 곤란하다는 듯 눈매를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저도 몇 번 시도해 보긴 했는데 북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연락이 닿지 않더라고요.”

“그런 보고는 받은 적 없는데.”

“폐하께서 용사님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계시던 터라 저도 그만 까먹었지 뭡니까.”

꾸며 낸 머쓱함에 하스칼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저 말은 필시 거짓이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오닉스가 저런 정보를 몰랐을 리 없었다.

하스칼에게 하수구 균열을 보고하면서 북부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특히 인간 용사를 길들이는 방법 천 가지를 보고서랍시고 올릴 시간에 딱 한 장만 추가했어도 됐을 일이었다.

감히 마왕 자리를 놓고 하극상을 준비할 만큼 야욕이 대단찮지도 않으면서 최근 들어 자꾸만 신경을 건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모르면 알아 와.”

하스칼의 명령에도 오닉스는 특유의 웃음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파견 보내겠습니다.”

“아니. 네놈이 직접 가.”

“예?”

“왜 자꾸 두 번 말하게 하지? 네놈이 직접 가라고. 가서 슐츠만을 잡아 와.”

“너무하세요, 폐하. 저 같은 고급 노동력을 그런 데에 부리시다니요!”

“그러고 보니 동부에 대공 삼을 만한 새로운 개체가 없나 찾아본다는 걸 잊고 있었군.”

하스칼이 손을 뻗었다.

대체로 악마들은 게으르기 짝이 없어 오닉스만 한 대안을 구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의 시건방을 언제까지고 봐줄 마음은 없었다.

놈의 속내를 떠보기에는 수상쩍은 지역으로 직접 파견 보내는 것만큼 좋은 수는 없었으니.

만약 거부라도 한다면, 놈의 머리를 터트려 버릴 작정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북부에 파견되길 태어났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오닉스는 냉큼 고개를 조아리는 척 교활한 주둥이를 나불댔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북부에서 슐츠만을 데려와.”

“분부 받잡습니다.”

“그리고.”

“……? 무언가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걸리적거리는 벌레들은 알아서 처리해. 쓸데없이 눈에 띄지 않도록.”

“아하. 쓸데없이 눈에 띄지 않도록이요.”

오닉스는 검붉은 고치를 살피며 입매를 늘어뜨렸다.

마왕이 미물에 가까운 존잴 거슬려 할 리 없었음에도 따로 주문할 정도라면.

그렇다면 과연 누구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하라는 걸까.

“그렇다면 제 식대로, 잘 처리해 보겠습니다.”

오닉스는 입매를 비틀며 웃어 보였다.

역시 용사는 무료한 지옥에 나타난 재미난 변수임이 틀림이 없었다.

* * *

“……!”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어둠이었다.

그야말로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새카만 어둠.

그 어둠과 마주한 순간 심장이 발작하며 쿵쿵 뛰어 대기 시작했다.

밤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가시 범위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까만 건, 지난 생에서 겪었던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무심코 팔다리를 만져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단단한 뼈대가 만져지자, 곧바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손가락에 걸리는 천의 감촉에 아직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강한 적의 소굴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했지만 동료한테 배신당한 충격을 추스를 새도 없이 소리 하나, 빛 한점 들지 않는 구덩이에 홀로 남겨져 방치당했던 경험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회귀라는 게 만능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회귀의 조건은 목숨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했기 때문에 팔다리를 운신할 수 없는 곳에서 굶어 죽어 가는 것이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때의 충격이 너무 강해서, 직후의 회귀를 통째로 내다 버릴 만큼 방황하기도 했었는데….

“사람 간 떨어지게 진짜….”

나는 눈을 감은 채, 팔을 뻗어 주변을 더듬거렸다.

누가 보면 어차피 안 보이는데 멍청하게 왜 그러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보다, 차라리 의지대로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뭐야 이건 또.”

손끝에 뭔가 축축하고 따끈한 것이 닿았다.

살짝 꿀렁거리는 데다, 더듬거리며 만질 때마다 움츠러드는 것이 영 기분 좋지 않았다.

“나르카스.”

앞을 막는 게 있다면 부수면 된다는, 다소 1차원적인 생각을 하며 습관처럼 애검을 소환했다.

“……?”

하지만 부르면 즉각 손바닥에 닿아야 할 검의 감촉이 느껴지질 않았다.

행여 침대에 떨어졌나 더듬거리고 다녔지만, 아무것도 채이지 않았다.

귀속형 고철 주제에.

이제는 검도 주인의 부름을 당당하게 씹는 세상이었다.

퍽.

주먹을 말아 쥐고 벽으로 보이는 지점을 때리자, 쿵보다는 철퍽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힘을 잃은 손으로는 부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벤토리에 쓸 만한 다른 검이 없을까 떠올리며 다시 벽을 내려치려는 순간.

갑자기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상체가 앞으로 쏟아졌다.

“……읏!”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녀석에게 잡힌 채 죽 딸려갔다.

“야, 이! 사기꾼아! 자는 사람 가둬 놓고 뭘 하려고…!”

하스칼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흥분해서 녀석의 멱살을 잡아챘다.

“가둬? 내가?”

“이름 알려주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거 아니었냐고!”

“무슨 난리를 치나 했더니, 나가고 싶어서 앙탈 부리고 있었던 거라고.”

녀석은 자신의 멱살을 쥔 내 팔목을 잡더니 호떡 뒤집듯 가볍게 넘겨 버렸다.

“아윽! 악!”

그러더니 오른쪽 승모근 위로 날카로운 통증이 꽂혔다.

깜짝 놀라 목덜미를 문지르니 녀석의 턱이 걸렸다.

“누가 잘못했는데 꼬라지를 내! 짐승 새끼도 아니고 뭐만 하면 입질이야, 씨발!”

야무지게도 물어뜯었는지, 욕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아팠다.

하지만 짐승 새끼냐는 말에 버튼이 눌린 건지 뭔지 놈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씹어 뜯은 부위를 혀로 핥아 올렸다.

그 축축한 감촉에 기겁하며 몸을 물리고 침질을 닦아 내려 목덜미를 문지르자, 손가락에 놈이 물어뜯은 자국이 걸렸다.

그 자국 옆으로 또 자국이.

그 옆으로 또 움푹 팬 자국이.

손끝으로 더듬으며 자국을 따라가자, 놈이 씹은 자국이 무슨 목걸이처럼 목을 빙 둘러 있었다.

“와 씨, 이거 순 미친 새끼네.”

아무리 문질러도 자국이 사라지지 않자,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녀석을 노려봤다.

“…….”

“…….”

놈 역시 한참을 말없이 내려다보는데, 솔직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쫄렸다.

“…뭐. 왜. 한판 떠?”

이대로 엎어 놓고 좆을 쑤시려 들거나, 다시 침대에 묶으려 하면 얼굴이라도 들이받겠다며 각오했을 때였다.

“여기서 한판 더 뜨다간 울 기센데.”

“…….”

놈은 한마디 말로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더니 내가 문지르고 지나간 목덜미를 가볍게 훑었다.

표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만족스러워하는 기색 같아 열이 뻗치려는 찰나.

“목줄도 채웠겠다. 모처럼 기분이 좋으니, 네게도 기회를 주지.”

“뭔 기회.”

“앞으로의 처우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

놈이 내 가슴께를 꾹 누르자, 심장이 한 번 쿵 뛰더니.

아주 약간 뻐근하고 답답해졌다.

“…뭐야 이거. 나한테 뭐 했냐?”

“악마는 약속을 심장에 새기거든.”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을 보니 얼굴 위로 느슨한 미소가 떠 있었다.

마치 섬세한 설탕 세공처럼 살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아도 심미적으로 무언가를 자극하는 하얀 피부 위로. 까맣고 섬세한 속눈썹이 천천히 겹쳤다 떨어졌다.

그 아래로 섬뜩할 정도로 투명하고 선명한 눈이 내 어딘가를 꿰뚫었다.

솜털이 서고 무언가에 찔린 기분이 되어 몸이 절로 움찔 튀어 올랐다.

“…아.”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절로 신음이 튀어 나갈 것 같아서,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다.

“과연 너는 머리에 새길까.”

“…….”

“아니면 가슴에 새길까.”

녀석이 말을 맺음과 동시에 반쯤 홀려 있던 정신이 파드득 깨어났다.

갈비뼈 사이로 둥둥 울리는 심장 소리가 혈관을 타고 고막을 때렸다.

무심코 이마를 쓸어 올리자 하스칼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더니.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너 또한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할 거다, 서태준.”

놈은 약속을 잊지 말라는 듯, 내 이름을 한 번 부르고 돌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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