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러네. 내가 널 과소평가했네
무작정 목숨을 걸고 지르는 와중에도, 이런 말이 통할까? 하는 의혹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먹힐 것 같단 말이지….’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촉이 되게 잘 맞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싫은데.”
하지만 그 확신은 몇 초도 안 돼서 개작살이 났다.
“……어?”
이 정도로 시원하게 헛발질을 한 건 또 처음이라 나는 표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갑자기 머릿속 용량이 꽉 차서 단단하게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남이 보면 멍청해 보일 게 분명한 얼굴로 하스칼의 팔을 잡고 물었다.
“…왜?”
그러자 놈은 예의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건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씨…!”
나는 무심코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겐 중요한 문제를 보잘것없는 것 취급하는 것 같아 열받긴 해도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멋대로 죽을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곤 해도, 사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녀석이 딱히 아쉬울 일은 없었으니까.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화낼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머리를 좀 더 굴려 보기로 했다.
‘부탁을 들어주면 무슨 이득을 보냐고 했지….’
행여 놈이 어디 도망갈세라 하스칼의 팔을 꽉 잡은 채, 인벤토리 상황을 대강 떠올려 봤다.
얼핏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제법 희귀한 재료나 아이템이 있기는 했지만 고위급 헌터들에게 그건 어디까지나 잡템이었다.
그나마 가장 고급이었던 내 옷은 녀석의 손에 무참히 찢겨 나갔고.
귀속형 아이템 성검 나르카스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부르면 나타나겠지만, 마왕에게 성검으로 거래를 하자는 것도 우습지. 후우…, 나란 놈 이렇게 빈곤했었나?’
그간 생각해 보지 않은 재정 상태를 인지하자 갑자기 조금 씁쓸해졌다.
물론 나한테도 희귀 등급 아이템이 넘쳐나던 시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쟁취할 능력도 되었기 때문에 늘 누구보다 빠르게 희귀 아이템을 선점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 아이템도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때에나 쓸모가 있었고.
이번엔 죽음을 각오하며 다른 헌터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적절한 곳에 안배해 둔 상태였다.
그 까닭에, 하스칼을 유혹해 볼 만한 아이템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먼저 제시하면 될 거 아니야.”
잘 모르겠으면, 괜히 빙빙 돌아 시간 끌 필요 없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녀석이 정말 내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면 나는 다른 방법을 떠올릴 생각이었다.
“나더러 제시하라고?”
하지만 하스칼은 대단히 웃긴 소리라도 들었다는 양, 피식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굉장히 못 할 말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잖아. 원하는 게 따로 있으니까 내 조건이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야?”
“글쎄.”
“정확하게 말해 보라니까. 원하는 게 뭔데?”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부탁이 급한 건 내가 아니잖아.”
“…….”
“그리고 굳이 얌전하게 지낼 필요 없어. 지금처럼 멋대로 굴어도 괜찮고. 건방지긴 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거든.”
녀석이 영문 모를 말을 하자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나더러 포기하라며.”
“그러는 편이 네게 좀 더 편해 보였을 뿐.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 어쩌라는 건데!”
짜증스럽게 말하며 녀석의 팔을 밀어 내자, 이번엔 녀석 쪽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압도적인 힘에 나는 훅하고 녀석에게 딸려 갔다.
녀석의 가슴팍에 부딪힌 머리를 대강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오묘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건,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일 뿐이야.”
“그건, 내가 적정한 조건을 제시하지 못하면 모두 무시하겠다는 뜻이야?”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
“인간은, 상대가 부탁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나? 그렇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악마가 인간을 상대로 대단한 사기꾼을 보듯 저러고 있으니 내 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실제로 인간들도 상대방의 말을 모두 들어주지는 않지만 악마는 거래하면 무조건 들어줘야 하지 않나? 그게 계약이잖아.
나는 자꾸만 대화가 헛도는 것 같아서 답답해졌다.
“아니, 애초에 나는 악마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대체 뭐가 부족한지 알아야 네놈이 이득인 걸 찾아줄 거 아니야.”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라! 네놈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 무슨 이득을 얻느냐며!”
“그냥 물어보는 것도 안 돼?”
여전히 금빛 눈을 일렁이며 아무렇지 않게 묻자, 나는 일견 섬뜩하기까지 했다.
“물어보는 게 안 되는 건 아닌데…, 이득의 범위를 알아야 내가 조건을 제시하건 말건 할 거 아니냐고!”
나는 그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녀석에게 쏟아지듯 달려들었다.
그러자 녀석은 마치 처음부터 준비라도 했다는 듯, 내 허리에 팔을 감싸서는 가볍게 안아 올렸다.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은 채, 놈의 허벅지 위로 올라탄 상태였다.
사타구니에 닿는 묵직함이 찜찜하긴 했지만 뒤늦게 쫄기에는 모양 빠졌다.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했고.
그런 내 곤란함을 알아차린 것인지 하스칼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군.”
놈은 나를 보고 있긴 하지만,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그래. 거래 계약을 하는 기분이야.”
“뭐라고? 그야 당연히…!”
“당연히?”
악마와 맺는 계약의 이름 따위 알 리 없지만 당연히 그것 아니겠냐고 따지려다가 내 입술이 동그랗게 굳었다.
‘거래 계약을 하는 기분이라고…?’
저 말은 마치 거래 계약을 당연하게 의도하고 물었던 질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다.
“…어?”
순간 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당혹스러움에 녀석의 옷자락을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정말로 그저 내 부탁을 듣고. 그게 어쩌다 성에 차면 들어주기만 할…, 뭐 그런 생각이었다고? 대가도 받지 않고?’
악마가 인간의 부탁을 그냥 들어준다고? 아무 대가 없이?
아니, 그 전에 악마의 부탁은 뭐든 사소해도 계약으로 다 엮이는 게 아니었던가.
마왕은 급이 높아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운 건지 아니면 그간의 악마들이 부탁을 들어주는 척 거래 계약으로 묶어 사기를 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굉장한 바보짓으로 좋은 기회를 날려 먹고 있었다는 것만큼을 알 수 있었다.
“…아니지. 거래 계약은 아니고.”
그래.
고작 애완동물이 마왕을 상대로 거래 운운하는 게 기분 나빴을 수도 있었다.
본래 거래라는 건 동등한 관계가 하는 거였으므로.
나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냥 네놈이 부탁을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지. 정보가 너무 없으니까 헤매게 되잖아.”
그래도 무언가 명확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서 뒷말이 술술 나왔다.
이제는 나야말로 마왕에게 사기를 치는 기분이 들었다.
“말했잖아. 지금 이대로여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그런데?”
녀석이 그래서 하고 물었던 것처럼, 나 역시 애가 달아 그런데?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하스칼은 다시금 즐거운 기색을 내보이며 입매를 슬쩍 느슨하게 풀었다.
“네 부탁을 들어줬을 때, 내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다면 들어줄 의향이 있지만. 여태까지 네가 하던 시도는 하나같이 다 꽝이어서 말이지.”
조금 더 생각해 보라는 듯한 말에, 나는 잔뜩 뒤엉킨 실타래를 차분하게 헤집었다.
그간 내가 했던 시도는 죽겠다고 하거나, 녀석에게 욕을 날리거나, 갑자기 발정해서 멋대로 올라타거나….
‘음.’
나 같아도 내 행동이 흡족할 만한 구석이 없기는 했다.
‘어쩐다.’
녀석은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 같은데.
또 순순히 당하고만 있어줄 것 같지 않아서 하스칼의 이상성욕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개좆같은 새끼가 가장 인상 깊었다는 걸 보면, 욕 듣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개좆이 그렇게 좋으냐며 또 내 엉덩이를 노릴 수도 있었다.
‘아니 호감도가 반이나 찼는데도 이렇게 철벽 칠 일이야?’
나는 막막한 눈으로 녀석의 머리께를 살피다가 벼락에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영 내키지는 않지만, 내게도 조언자 비슷한 게 있기는 했다.
‘…음. 시스템아?’
조심스럽게 시스템을 부르자 눈앞으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당신은 현재 시스템님의 도움이 무지무지 필요합니까?✧◝(´꒳`)◜✧
▶1. 예
2.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