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15)화 (15/80)

15. 새로운 방식의 반항이야?

‘아. 기절했었나….’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또 지독한 현실을 마주해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 속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이물감과 엉덩이 구멍 너머로 꿈틀거리는 기괴한 진동이 현실감을 떨쳐 낼 수가 없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글우글 들끓던 무언가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런 거에 다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내가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나는 습관처럼, 지금이 최악보다 조금 나은 차악이라는 몹쓸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그 짜증스러운 자기 세뇌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아직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숨소리조차 억누르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조용한데.’

아주 약간 팔을 움찔 떨어 보았다.

‘윽!’

그것만으로도 눈이 번쩍거리며 신음이 새 나올 만큼 성감이 훅 치고 올랐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지 않기 위해 나는 아주 긴긴 시간을 참아 내며 몸속 열기를 다스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참아 내며 주변의 기척을 살폈지만, 팔다리가 묶인 것 같지도, 누군가 근처에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옥에 온 첫날 이후 이렇게 무방비하게 놓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파란 달빛이었다.

뒤이어 영화 소품 같은 장식품과 천장의 문양이 보였다.

‘누구 취향인지 참 고전틱 하네.’

이런 걸 고딕 양식이라고 해야 하나, 바로크 양식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오래전에 배워 까먹은 지식을 뒤로하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이렇다 할 기척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섣부르게 움직이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머리 위로 뭔가가 툭 얹어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 갑작스러운 접촉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깼으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어나.”

평소보다 조금 더 깊고 느른한 하스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못 이기는 척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야 내가 베고 있던 게 베개가 아니라 녀석의 허벅다리고, 녀석 곁에서 발가벗겨진 채 웅크려 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놓고 지금 혼자서 기척이 없다며 조심하고 있던 것이고.

그 코미디 같은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비록 내가 악마 놈들 보기에 약해 빠진 인간이겠지만 그래도 엄연히 놈들의 적인데.

언제고 목을 칠지도 모르는 적을 제 침대 위에 올려놓고 같이 잠을 자다니.

악마 놈들의 대담함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 씨, 이건 또 뭔데….’

나는 아까부터 볼에 닿고 있던 녀석의 괴물 같은 좆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 누운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하스칼과 눈이 마주쳤다.

“…….”

이런 게 짐승의 눈이라는 걸까.

대체 눈 속에 뭘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홍채 너머로 노란 안개 같은 게 자꾸만 일렁였다.

녀석의 동공이 가늘게 조여드는 모습이 무슨 우주 사진을 보고 있는 양 신비롭게까지 느껴졌다.

더구나 그 눈동자 너머에 내 모습이 비치자, 좀 진부한 표현처럼 정말로 눈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서 자기 눈을 보고 멀쩡한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나?’

확실히.

저런 눈이면 계속 보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아마 녀석의 눈으로 아이템을 제작하면 무조건 고등급이 뜨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반쯤 홀린 듯 녀석의 눈 속 너머를 멀거니 보고 있자니 하스칼이 돌연 목줄을 잡아당겼다.

“큭!”

녀석의 거친 손속에 목이 졸려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컥, 컥, 쿨럭!”

뒤이어 잔기침이 툭툭 튀어나왔다.

갑자기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서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하지만 하스칼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내 눈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손톱 끝이 점막 바로 아래 여린 살에 닿자, 그 첨예한 끄트머리에 닿은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눈이 마음에 안 들어서 파내겠다는 건가.’

이미 박제니 뭐니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지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통각 수치를 내가 몇으로 해 놨지?’

살짝 아프긴 하겠지만, 언제고 벌어질 일이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지금 당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사용자 설정.’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통각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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