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12)화 (12/80)

12. 태준아, 힘들면 타협하지 않을래? :D

“복숭아 줘. 그거 먹는다니까?”

모든 원흉은 하스칼이었지만, 결국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도 마왕뿐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삼 일간.

녀석이 내게 한 행동만 보면 죽이기보다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하니, 그쪽을 공략해 보려고 했다.

“복숭아?”

하지만 뜻밖에도 대답은 백작에게서 나왔다.

“그거면 열 개라도 먹을 테니까 이상한 짓거리 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되먹은 악마들이 음식에 관련해서는 이토록 지능이 떨어진다는 말인가.

이대로 제시어 게임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백작이 입을 열었다.

“아아. 향과를 말하는 거군.”

향과라니.

악마들은 복숭아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가 싶어 흘깃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어째 녀석의 미소가 더 음흉해 보이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뭐야. 왜 그렇게 웃는데.”

“그건 인간계 과일이 아니라서 말이지. 너도 종종 봤을 텐데, 던전에서. 슬라임 서식지에 자라는 나무를.”

“무슨 소리야. 맛이나 냄새가 누가 봐도 딱 복숭아였는데?”

“그게 그렇게 보였다고.”

백작의 불길한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자 나는 절로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혹시, 대공의 체액을 마셨나?”

“……뭐?”

백작의 말에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고,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오닉스의 체액에 고순도의 각성과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리던, 시스템의 농간질이 떠올랐다.

‘그게 환각이었다고?’

환각은 만화경처럼 어지럽게 빛이 산란하고 기이한 모양으로 번졌다가 합쳐지는 그런 게 아니었던가.

종종 환각에 걸린 헌터들이 허공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거나 무기를 휘두르는 걸 보긴 했지만, 나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유니크로 둘둘 싸맸던 방어 아이템이 그렇게 허접할 리도 없었고 S등급이라는 게 허투루 얻은 표식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아니야. 그건, 위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100m 밖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분명 완벽한 복숭아였다고!’

애써 부정하며 머리를 흔들었지만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었으면 이토록 평정심이 흔들리지는 않았을 테다.

시스템 창이 무언가를 하나씩 툭툭 뱉어 낼 때마다 몸의 변화가 적나라했던 까닭에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인지에 부조화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간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을 믿고 판단해 왔었다.

없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해 뚫고 가던 것도 나였고,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이들을 이끌고 맨땅에 헤딩하던 것도 나였다.

비록 모든 게 정답이 아니었을지언정, 이제는 그 판단조차 믿지 말라는 것 같아서 멘탈이 꽤 아팠다.

 ※정신이 크게 흔들립니다. 정신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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