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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2)화 (2/80)

2. 쉽게 죽으려거든, 넌 내 눈에 띄면 안 됐어

갑자기 정신이 반짝 깨어났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머리를 옥죄는 듯,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마음 편히 기절해 있을 수가 없었다.

“윽…!”

무심코 팔을 들어 올렸다가 어깨가 뻐근해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땅속에서 기어 올라왔던 검붉은 줄기가 내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 줄기를 떨쳐 내고자 무심코 성력을 끌어모았다.

대개 불길한 마력을 띤 종들은 라엘의 신성에 기겁하며 물러서는 성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력에 반응한 건, 줄기가 아니라 내 몸이었다.

금빛 기운이 아주 잠깐 피어오르는 듯하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예상치 못한 고통만이 들이닥쳤다.

“……!!”

상처 위로 유리 조각들이 쏟아져 내려 온몸이 난자당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아!”

단단하게 감겨 있는 줄기 탓에 나는 발버둥도 치지 못한 채 그 감각을 모조리 씹어 삼켜야 했다.

만약 몸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개처럼 기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분명 통각 설정 꺼 놨는데…!’

라엘의 창이 가슴을 꿰뚫고 저주가 내장을 자근자근 씹어 먹는 동안에도 참아 낼 수 있었던 건,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내려놓았던 덕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 설정이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시스템!’

황급히 시스템을 찾아 불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양, 반투명한 창은 눈앞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스템! 어이, 시스템! 인터페이스! 사용자 모드! 캐릭터 창! 야, 이 개새꺄!’

몇 번이고 불러 봤지만, 시스템 창이 나타나질 않으니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용사도 뭣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쫌스러운 천사 놈들아. 시스템까지 뺏어 가기 있냐! 어차피 죽을 놈이라 이거지?’

천사 놈들의 치사함에 욕이 나오면서도 사실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주에 잠식된 인간은 인류의 적인 데다가 신실한 헌터들이 제 입으로 라엘을 부정하게 한 탓에 미움받은 것일 테다.

‘완전히 버려졌네.’

어쩐지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오래 학습된 체념 탓에 안 되는 것엔 포기가 빠른 편이라는 거였다.

‘버려진 건 뭐,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사실 내 계획은 헌터들 앞에서 죽는 것까지였다.

갑작스레 어그러진 계획을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막막해졌다.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다.

‘역시, 죽을까?’

습관처럼 한심한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어리석기는.”

그러자 절묘한 타이밍에 타박이 날아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일렁이는 금빛 눈알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영원한 절망과 어둠의 마왕, 하스칼이었다.

“그 몸으로 성력을 사용하려 하다니, 죽고 싶은 거야?”

“!!”

반쯤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나는 속내를 들킨 것보다 놈의 얼굴에 더 놀라 버렸다.

어떻게 얼굴이 저럴 수가 있을까.

예술적인 감성이 조금도 없는 내가 보기에도 놈의 얼굴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얼굴선은 매끄러운 듯 날카롭고, 분위기는 거친 듯 우아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내 언어 구사 능력으로는 이 정도 묘사가 최선이었다.

눈이 번쩍 뜨인 심 봉사의 심정을 알 것 같달까.

전투 중에는 녀석의 위압감에 눌려 얼굴을 자세히 볼 틈이 없었는데, 그간은 몰랐던 애착까지 움트며 스스로의 취향을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천사는 악마를 벌하기 위해 무섭게 생겼고, 악마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아름답게 생겼다더니.

악마의 왕은 그중에서도 단연코 으뜸이었다.

“……하스칼.”

그간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게 억울해져서는, 괜히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마왕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네게 이름을 불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늘 찢어 죽일 놈이라든지, 빌어먹을 놈으로 불렸는데 말이지.”

“…….”

역시 마왕은 마왕.

고작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방금까지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뻐근한 두통이 밀려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호칭은 개좆 같은 새끼였고.”

“…….”

녀석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할 말이 없어졌다.

파편을 봉인시키면서 했던 막말을 다 들었나 보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입조심했을 텐데, 미리 스포라도 좀 해주지 그러셨어.’

망나니 컨셉에 영웅병까지 걸려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지난날의 과오와 마주하게 되니 조금 수치스러웠다.

녀석과 함께 지옥에 뛰어들 때만 해도 기분이 째졌는데, 지금은 다소 성급했던 설렘이 아니었나 싶었다.

‘음, 어쩐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패시브 스킬, 현실도피가 발동했다.

흔들리던 시선은 자연스레 내 사지를 묶고 있는 검붉은 줄기로 향했다.

겉보기엔 미끄덩해 보이지만, 조금만 움찔거려도 강하게 조여 대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더구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것은 무언가 예리한 것이 내 목덜미를 쿡쿡 찔러 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수상한 짓을 벌이면 당장 찔러넣을 것처럼 툭툭 살갗을 건드려 대니, 눈도 없는 하급 마물 따위가 도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미묘했다.

‘이건 뭐….’

성력도 뺏긴 데다 시스템의 가호까지 사라진 나는 흠씬 두들겨 패기 좋은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통각 설정이라도 남아 있으면 녀석을 도발해 깔끔하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수였겠지만….

저 번들거리는 눈을 보자니 괜한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그냥 내가 다 잘못했다고 대가리라도 박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즈음, 녀석이 내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보다 말이지-”

턱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뺨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꺼 놨던 통증을 한꺼번에 몰아 받듯 고통이 밀려들어 왔다.

“왜 아직도 말을 하는 걸까?”

“……?”

‘마왕 앞에서 말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약속이라도 있나요?’

아프기도 아프지만 놈의 말이 어이없어 눈살을 찌푸리자, 턱을 쪼개 놓을 정도로 쥐고 있던 놈의 손가락이 내 눈가를 문질렀다.

저주에 잠식당하면서 붉게 변해 버린 왼쪽 눈이었다.

‘설마 파내려고?’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놈을 강하게 노려보았지만, 오히려 하스칼의 표정은 조금 더 느슨해졌다.

“저주가 심장 깊은 곳까지 뿌리내려 이성을 모두 태웠을 텐데, 어떻게 아직도 이지가 남아 있을 수 있지?”

하스칼의 시선이 내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지다가 빛의 창에 꿰뚫렸던 심장에서 멎었다.

갈비뼈 사이에 박혀 있던 빛의 창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저주가 가진 놀라운 회복력으로 상처는 흉터조차 남지 않고 깨끗하게 메워진 상태였다.

하스칼은 심부에 똬리 튼 저주를 느끼려는지, 가슴팍 한가운데를 두드렸다.

그러자 심장을 휘감아 누르던 저주가 술렁술렁 흔들리기 시작했다.

“읏….”

이대론 살가죽이 푸딩처럼 패이고, 갈비뼈가 막대 과자처럼 부스러질 것 같았다.

티끌만큼 남은 힘을 이용해 막아 보려 했지만, 저주가 심장을 콱 하고 물었다.

“허윽!”

몇 년 만에 느껴 보는 생것의 고통에, 표정을 꾸며 내지도 못하고 헐떡거렸다.

어떻게든 저주를 밀어 내려고 버둥댔지만, 그럴수록 검붉은 줄기가 내 사지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아직도 저주에 저항하고 있는 건가? 모든 걸 내맡기면 편해질 수 있는데, 자존심이 대단하네.”

녀석의 말에 나는 모멸감을 삼키는 척 입술을 앙다물고 고통을 견뎠다.

“음. 이상한 기분이야. 네놈이 반항하는 게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단 말이지.”

동공이 세로로 모여들더니, 하스칼은 곤란하다는 듯 입매를 문질렀다.

“원래라면 정신을 무너뜨린 후에 침실 뒤에 산 채로 박제해서 걸어 두려 했거든. 그 시건방진 눈알 대신 예쁜 보석을 박아서 말이야.”

‘아, 그거 좋을지도.’

순간 박제된 내 모습을 보며 울부짖을 헌터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아닌가. 엄청 아프려나.’

하지만 이내 생각을 휘휘 지워 냈다.

박제당하는 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롯이 나뿐인 까닭이다.

“그런데 막상 그 눈을 보니, 뽑기 아까워지네.”

녀석의 말에 그로테스크한 고문은 피할 수 있겠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찰나, 곧장 뒤따라오는 말에 진창에 처박혔다.

“지금도 봐. 내 말 하나하나에 모양이 달라지거든.”

“…….”

“특히 눈알 안쪽이 화나서 새파랗게 타오르면 그게 또 절경이란 말이야. 가장 빛났을 때 터트리면, 어떤 기분일 거 같아?”

‘이거, 순 얼굴만 예쁜 미친놈 아니야?’

소름이 돋아서 절로 몸서리를 쳤다.

“그래. 지금처럼.”

녀석이 자꾸만 눈 얘기를 하자 나 역시 녀석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흔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보석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감탄만 할 수 없었던 건.

놈의 눈이 솜털이 쭈뼛 설 만큼, 섬뜩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여 시선이라도 돌렸다간 산 채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내 눈을 보고도 멀쩡하게 버티는 놈은 처음이야.”

“…….”

“그래서 지금 막 그 프라이드가 어디까지 견디는지 궁금해졌거든. 생각해 보면, 넌 내 앞에서 비명 한번 뱉은 적 없었지.”

“……헛소리 말고 차라리 죽여. 차라리 죽여서 시체라도 전시하라고!”

이대로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거세게 버둥거렸다.

하지만 하스칼은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양, 느슨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사지를 옭아매고 있던 줄기가 수상쩍을 정도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림없는 소리 마. 쉽게 죽으려거든, 넌 내 눈에 띄면 안 됐어.”

점점 굵어지는 줄기 안에서 무언가가 꿀렁꿀렁 움직이고, 그 이질적인 맥동이 내게도 옮겨붙더니.

“잘 버텨 봐. 넌 쉽게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푹-!

불시에 목덜미를 찔렀다.

“헉!”

목을 찌른 바늘 끄트머리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혈관을 타고 사지로 뻗어 나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펄떡 튀어 올랐다.

손끝이 저릿저릿해지고, 눈앞이 까맣게 번지는 순간.

띠링-

사용자 서태준 님의 정보를 재탐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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