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죽여줘.”
죽이지 못할 걸 알면서도 흐릿하게 웃으며 말하자, 곁을 둘러싼 헌터들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반복되던 시뮬레이션과 한 치도 비껴가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아, 끝내준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내리꽂히는 희열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펌프질하고, 동공이 멋대로 확장했다 조여들며 난리를 피웠다.
마왕 하스칼의 저주가 혈관을 비집어 온몸을 잠식하려 들고 성력까지 갉아먹고 있지만, 위기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마도 머릿속에선 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따위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을 테다.
지금 이 상황은 그 어떤 마약보다 더 대단한 쾌감이었다.
마지막 회귀를 결심한 순간부터,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 저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천 편이 넘는 원작을 읽었던 때부터 반복해 온 것이나 다름없던, 길고 지루한 삶에 이제야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찰나보다는 길고, 영원보다는 짧았던 그 시간을 말이다.
“후우….”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한데, 몸은 한계까지 치달아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꺼풀이 감길 것처럼 혼몽했지만, 조금 더 녀석들의 속을 긁고 생채기 내고 싶었다.
“죽이라고.”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숨긴 채, 다시금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한계를 직감한 남자들의 얼굴이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너는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떻게…!”
“힘들다고 말 한마디만 해줬어도… 그래도 됐잖아요. 그게 동료잖아요!”
그간 눈치채지 못한 자신들의 무심함보다, 말하지 않은 나를 탓하는 게 너무나도 저들다웠다.
어떻게든 너덜너덜해진 내 몸을 끌어안고 싶어 떨어 대는 모습을 보니 비식 웃음이 샜다.
세계 최강자라 불리는 남자들이 보이기엔 퍽 가련한 모습이 아닌가.
나 같은 망나니를 상대로 보이는 저 처참한 표정이라니. 아랫배가 절로 욱신거렸다.
“됐으니까- 늦기 전에 빨리 죽여. 이제 더는, 견디기 힘드니까.”
“!!”
내 입에서 애원의 말이 나오자 남자들의 표정이 더 강하게 일그러졌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내가 잠결에라도 약한 소리를 내뱉은 적이 없던 까닭이었다.
그제야 정말 끝에 다다랐음을 인지했는지, 녀석들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더욱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분명,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방법 따윈 없어.”
“무슨 말을 그따위로…!”
“이대로 저주에 잠식당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뻔하잖아. 알아서 희생해주겠다는데, 이걸 그냥 허무하게 날릴 생각이야?”
“개소리 마! 망나니 새끼가 무슨 희생이냐고! 그냥 평소처럼 굴어. 죽여 달라 헛소리 말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까,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마.”
“우리를 조금만 더 믿어주세요! 태준 씨가 희생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을 봤어요! 열 가지도 넘게요!”
‘고작 열 몇.’
내가 답도 없는 회귀를 반복하며 가능성을 찾는 동안, 저들이 발견한 숫자는 열 몇이 전부였다.
그 깜찍한 숫자에 희망을 거는 남자들에게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을 겪었노라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강제로 천수를 누려야만 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정해진 생이 다하기 전까지 결코 죽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지독한 회귀를 포기하는 대가였고, 생명의 신 라엘과 맺은 불합리한 계약의 결과였다.
뒤늦게 자신들이 어떤 축복에 얽혔는지 알게 되면 절망할까.
아니면 나를 원망할까.
사실 무엇이든 좋았다.
그저 저들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어차피 이 모든 건 내가 사라진 뒤 밝혀질 터였다.
‘아. 아쉽다.’
살아서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우면서도.
이토록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니, 음습하고 지저분한 상상에 브레이크를 걸 수가 없었다.
‘기왕 죽을 거, 더 비참하게 죽고 싶다.’
어차피 통각 설정을 꺼 두어서 아픔도 느끼지 못하니까. 내 비틀린 열망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갔다.
평정심을 잃은 입매가 움칫 떨자, 그것을 무엇으로 착각했는지 애처로운 애원이 단박에 달려들었다.
“조금만 더 하면 해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버텨주세요. 버텨줘요, 태준 씨!”
신실한 신의 종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내가 버티도록 하려는 것이겠지만, 정작 저주에 걸린 당사자는 그걸 풀 생각이 없으니 소용없는 짓이었다.
“…….”
나는 이제 힘에 부쳐 말조차 이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등에서부터 심장을 관통해 바닥에 꽂힌 빛의 창과 내 사지를 억지로 옭아맨 영석 사슬이 처연한 꼴을 조금 더 극대화할 테다.
“…하아.”
뜨거운 한숨을 느른하게 뱉었다.
금빛 가루가 날숨에 섞여 파스스 사라졌다.
사실 부러 꾸미지 않아도, 몸속을 헤집어 놓고 있는 저주와 그 저주를 억제하는 성력이 부딪히며 내 생명력을 살라 먹고 있었다.
“아, 안 돼…!”
누군가는 절규하고.
“아아! 라엘이시여! 제발! 제발 곁에 계신다면! 저를 가엾이 여기신다면! 그럼 이럴 때만이라도 응답해주셔야 하는 거잖아요! 한 번만 더 돌릴 기회를 주세요!”
누군가는 회귀할 수 있게 해주는….
아니, 있게 해주던 아이템 ‘망가진 미래의 시계추’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다만 뜻밖이었던 건, 라엘의 신도가 자신의 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거였다.
회귀를 반복하는 동안,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역시 진정한 엔딩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나를 이 무한 굴레의 지옥에 밀어 넣고서, 희생을 강요하고 입막음까지 한 신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엘. 보고 있어? 네 의지라면 목숨도 내버릴 수 있다던 신실한 종이 결국은 너를 부정하고 있잖아.’
무슨 짓을 해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신념이 나 때문에 꺾여 나갔다.
녀석들을 이루는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가 고심해서 골랐을 헌터들의 변화를 보며 라엘도 절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또한 계획된 미래의 일부라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가 끼워 놓은 톱니가 올바르게 맞물렸는지 확인할 수단은 없지만, 이제는 속을 알 수 없는 신의 반응조차 궁금해졌다.
쿠르릉.
그러자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늘 위로 죽죽 선이 그어졌다.
막을 새도 없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던 실금이 허공을 온통 뒤덮었다.
“무슨…!”
누군가의 탄식이 새어 나옴과 동시에, 지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신성이 허공에서 잘게 부스러져 내렸다.
찬란하던 신성이 사라지자 황금빛으로 너울대던 하늘 끝이 새카맣게 번지기 시작했다.
깨끗한 물 위로 새카만 먹이라도 떨어뜨린 것처럼, 티끌 같던 어둠이 점점 하늘을 잡아먹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번져 나갔다.
쩌저, 쩌저적!
고막을 울리는 불유쾌한 소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땅울림이 계속되더니 괴물의 아가리가 벌어지듯 대지가 쩌억 갈라졌다.
한껏 벌어진 하늘의 균열 너머로 섬뜩한 번개 따위가 내리치고, 뱀의 혀처럼 넘실거리는 검붉은 줄기가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기어올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타락할 것만 같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와 저들끼리 어지럽게 엉겨들었다.
놈들이 몸집을 불릴수록 음울한 마력이 응집하고, 이내 어떤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마왕 하스칼의 팔이었다.
그 팔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전, 곁에 있던 누군가가 성력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카가각!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검붉은 팔에는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라엘의 축복과 신성한 성물로 인챈트한 검으로도 소용이 없자,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헌터들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파편이 보여주는 환상 따위가 아닌 건가? 진짜 마왕 하스칼의 팔이라고?’
거대한 힘에 짓눌린 몸이 후들후들 떨리는 중에도 머리가 팽팽 돌았다.
저 불길한 마력이 낯설지 않았다.
이건 꼭 내가 멋모르고 지옥으로 쳐들어갔다가 허무하게 죽었던 때와 비슷한 압박감이었다.
지옥에서 만난 마왕은.
거추장스러운 모기를 털어 내듯,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내 몸을 으스러뜨렸고.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처럼 괴롭게 했다.
그 정도로 광포한 힘의 차이를 느꼈다.
놈을 막지 않고서는 지구를 지킬 수 없는 까닭에 무의미한 도전이 계속되었지만 몇 번이나 허무한 회귀의 길을 걷고서야 알았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헌터여도 마왕을 어쩌진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불가능한 벽을 마주한 나는, 녀석이 지상을 넘보지 못하게 균열을 메꾸고 마왕의 파편을 봉인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바람에 저주를 품게 되었지만, 적어도 지옥에서 헛된 죽음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지옥에서 겪었던 원초적인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이건…, 분신 따위가 아니야. 놈은 지금 직접 현신하고 있는 거야…!’
지금은 손이지만 곧 얼굴을 내밀 테고, 다리까지 빠져나오면 세상은 그를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마왕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구는 짜부라지거나 거대한 블랙홀에 삼켜지는 꼴이 될 터였다.
그 정도로 검붉은 줄기에서는 미약한 행성이 견뎌 낼 수 없는 광폭한 격이 느껴졌다.
‘젠장…!’
어렵사리 지켜 온 지구가 허무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주를 억누르던 힘까지 끌어모았다.
고작 인간의 티끌 같은 힘으로 마왕의 손가락에 생채기나 낼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본래 미약한 발버둥이 더 선명하게 남는 법.
바르르 떨리는 팔을 들었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힘이 온몸을 휘감자, 영석 사슬이 투둥투둥 떨어져 나갔다.
자유를 되찾은 다리로 대지를 딛고, 빛의 창을 질질 끌어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두걸음.
점차 하스칼에게 가까워지자, 나는 성력을 폭발 시키며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
놈의 영역권으로 들어서자, 숨통이 조여 왔다.
하지만 성력이 제대로 적중했는지 검붉은 줄기 위로 금빛 스파크가 튀며 땅속까지 파고들었다.
쿠콰아아-!
녀석의 팔이 꿈틀대며 바닥을 강하게 그었다.
그 한 번의 손짓으로 지면에 깊은 구덩이가 패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녀석을 금빛 성력으로 옭아맨 채 균열의 틈으로 몸을 던졌다.
“…….”
발아래로 닿는 감각이 사라지며 거부할 수 없는 중력 탓에 힘을 잃은 몸이 한없이 추락했다.
“안 돼!”
“야, 이 빌어먹을 새끼가!”
몸을 비틀어 간신히 위를 올려다보자 헌터들이 닿지 못할 손을 뻗고 있었다.
그건 마치 라엘의 신전에 수놓아져 있던 그림처럼 보였다.
‘아. 이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전갠데.’
실로 황홀한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