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권재진이 숨을 멈추고 서의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하얀 얼굴, 곧은 이마, 알맞게 팬 눈두덩이와 붓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눈매를 보니 속이 시끄럽게 아팠다. 세밀한 속눈썹 한 올 한 올마다 집약된 갈망이 권재진을 붙잡고 있었고, 한 줄기 빛 같은 콧날과 높다란 파도 같은 턱선이 용서를 빌고 있었다.
“너 싫잖아.”
권재진이 여태 2회차 서의우와 1회차 서의우를 나누어 갈라 생각해 오긴 했지만, 사실 둘은 같은 인물이다.
달라진 건 지나간 세월일 뿐, 서의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이었다.
어느 쪽도 권재진의 서의우가 아닐 수 없었다.
1회차도 2회차도 늘 같았다.
가르마를 반대로 타서 구분하려 했어도, 결국은 무용지물이었던 것처럼.
권재진이 서의우를 갈라 버리려 해도 그들은 항상 하나였다.
“너 나 보내기 싫잖아.”
“…….”
“나도 너 보내기 싫고.”
“……하지만.”
“같이 가자. 그냥 그러자.”
“말도 안 돼…… 이런 건 재진 씨답지 않아요.”
“알아.”
“그쪽은, 그 스무 살짜리 나는 어쩌게요.”
“그쪽에게도 돌아가야지.”
“네……?”
“그러니까 가자고. 같이.”
권재진이 서의우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반대로 걸었다. 서의우는 우두커니 발길을 멈추고 있다가, 권재진이 이끄는 대로 아주 느릿하게 따라갔다. 그의 표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깨어나지 않는 꿈을 꾸는 것처럼.
“갈림길 중 하나를 택하는 건 지긋지긋하고. 정답이라 생각했던 건 항상 정답이 아니었고. 너랑 나는, 늘 실패하고 후회하기만 했으니까. 이번엔 그냥,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 보고 싶다.”
“그래도…… 어떻게.”
“걱정하지 마. 내가 먼저 회귀해 봐서 아는데, 권재진은 처음부터 한 명이었어. 지난 4년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뿐, 본래 같은 사람이었다고.”
“…….”
“네가 가도, 서의우는 서의우야. 다른 사람으로 뒤바뀌는 게 아니라, 기억만 떠오르는 거니까. 고민하는 게 더 이상하지.”
1회차 서의우를 이곳에 버리고 권재진만 2회차 서의우에게 돌아가는 것도,
2회차 서의우를 저곳에 버리고 2회차 서의우와 이곳에 죽는 것도,
서의우와 서의우 중에 누구 하날 택하는 짓은 할 수 없다.
둘 다 서의우니까.
“하지만, 내가 가면, 폭주할 거예요.”
20살 서의우는 아직 불균형하다. 24살 서의우의 이능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겠지.”
권재진이 엉망으로 답했다.
“우리 둘이 온전히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어요!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둘은 너무…….”
“어, 되게 위험하겠다.”
원래 시간 이동 자체가 도박이었다.
성공할 거란 보장은 권재진이 처음 회귀할 때도 없었다.
그래도 서의우는 해냈고, 끝내 성공했다.
“왜…… 왜 그래요, 재진 씨. 자포자기하는 거예요?”
“아니…….”
권재진이 돌아온 길의 끝까지 서의우를 끌고 갔다.
서의우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권재진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회의와 불신으로 가득했다. 권재진은 손을 뻗어 서의우의 뺨을 짚었다가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차근히 쓸어 넘겼다.
손끝에 살살 걸리는 머리카락이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우리가 왜 하나를 택해야 해.”
“…….”
“너도 나랑 살고 싶고, 나도 너랑 살고 싶은데. 난 서의우를 사랑하는데.”
“…….”
“그럼 그걸로 됐잖아.”
“…….”
“저번에는 널 도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의우야.”
권재진이 가만히 집중했다.
신기하게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권재진의 핵은 두 번, 4년 후와 지금 두 차례에 이어 부서졌다. 바스러진 파편이 과거와 미래를 잇는 시간의 통로에서 맞붙었다. 작고 불완전한 핵이라도 두 개가 이어 붙으니 하나의 완전한 핵이나 다름없었다.
권재진은 커다랗게 자리 잡은 핵으로 서의우의 파동을 느꼈다.
그의 핵과 자신의 핵이 어떻게 감응하고 있는지 본능으로 알았다.
이제야, 공명할 수 있었다.
“네가 폭주하더라도, 내가 되돌려 놓을게”
“…….”
“죽었던 나를 네가 되살린 것처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폭주라는 건, 에스퍼가 불균형한 이능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니까. 혼탁해진 이능을 되돌리는 것뿐이면 가능할 것 같다. 정말이야.”
“…….”
“나 좀 믿어.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믿어요. 나는 늘 재진 씨 믿었어요.”
“내가 너 가이딩 할게.”
“……네.”
“꼭 돌려놓을게. 우리 같이 가자.”
“네……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나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그래…….”
“재진 씨랑 있고 싶어요. 같이 제발, 진짜 제발…… 딱 한 번만.”
“응…….”
“나, 정말, 재진 씨랑, 윽, 같이 있고 싶다고요……. 다른 건 이제 바라지도 않아. 재진 씨만. 나 그냥! 정말 그 하나만……!”
“그렇게 될 거야. 우리 다 괜찮을 거고. 같이 돌아갈 거야.”
권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의우의 표정이 그제야 허물어졌다.
담담하게, 무감하게. 흔들리지 않고 버티던 자신을 놓았다.
서의우는 잘 참아 왔다. 잘 해냈고. 잘 기다렸다.
기다려를 이렇게까지 잘하는 서의우는 보답받아 마땅했다.
“이제…… 가자.”
“네, 재진 씨……. 같이 가요.”
빛이 폭발하며 터졌다.
우주와 은하수, 토성이 무너지고 크리처 군단이 곤두박질쳤다.
시간 좌표와 시간 좌표를 잇는, 쭉 뻗은 통로가 저 끝에서부터 매서운 속도로 엎어지더니 4년의 세월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서의우와 권재진이 손을 맞잡았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아무도 포기할 필요 없었다.
후회할 것도 없었다.
기다리던 때는 바로 지금이었고, 서의우와 권재진은 이미 서로를 갖추고 있었다. 갈망할 필요 없을 정도로. 부족함 없이. 한껏.
여느 때보다도 밝은 빛 방울이 축포처럼 화사하게 퍼졌고,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권재진은 돌아왔다.
서의우에게로.
서의우와 함께.
***
차게 식은 동공에 이채가 돌았다.
쓰러진 권재진의 피부에 생기가 얹히고 굳은 근육이 느슨히 풀렸다. 첫 호흡이 폐부에 따스히 스며들었으며, 두 번째 호흡부터 손끝 발끝에 심지가 생겼다.
숨이 끊어졌던 시신이 부활하는 모습은 기적 그 자체였다.
시간을 되돌려 핵이 원상태로 접붙어 수복되어 있었고, 그것은 검은 공간에서 느꼈던 것처럼 완전한 형태였다. 태생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권재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핵을 다룰 수 있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눈으로 보고, 코로 숨을 쉬고, 입으로 소리를 낼 줄 아는 것처럼. 핵을 통해 맥을 짚을 수 있었다.
요동치는 근원지에 서의우가 있다.
찢어져라 공명하는 소란에 가슴이 둥둥 울렸다. 힐링 팩터를 쏟아부어 완벽히 회복한 몸이 절로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지친 기색 없는 두 다리가 믿음직했다.
저 앞에 거꾸로 치솟는 폭포가 보였다.
통제를 넘어선 검은 기운이 서의우에게서 폭발해 넘치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선 서의우는 얼굴의 절반이 칠흑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의 흰자까지 검다.
“긴급사태. 긴급사태. 서의우 대위가 폭주했다! 즉각 센터에 통신해라!”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막아야 합니다!”
“가이딩 대체 약물을 보급해라! 응전할 수 있는 대원 전원 동시에 핵을 부순다!”
크리처 웨이브에서 살아남은 각성자들이 서의우를 둘러싸고 교전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소비해 서의우를 쏘았지만, 그의 세찬 이능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모두 휘말려 먼지처럼 갈려 버렸다. 서의우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무립니다! 대응할 수 있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중령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대피 명령을……!”
“이대로면 개척지구뿐 아니라 일반거주지구까지 휘말립니다.”
정신없이 통신을 주고받는 특임부대원들 사이로 권재진이 걸어갔다. 폭주 근원지에 가까이 갈수록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세차게 공명했다. 서의우가 느껴졌다. 그의 존재가. 절실히.
“장 중령님.”
권재진이 전선 앞에 선 장태산 중령을 불렀다. 피투성이인 차림에 귀에서 핏줄기를 흘리던 그가 권재진을 돌아보고는, 귀신 본 듯한 눈을 했다.
하긴, 핵이 깨져 사망했던 가이드가 버젓이 일어나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렇지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권재진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장승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린 장 중령이 권재진과 그의 손을 보고 퍼뜩 깨달았다. 그가 다급히 장갑을 내던지고 권재진과 손을 맞잡았다.
“서의우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제가 그에게 닿을 수 있게.”
장 중령을 가이딩 하고 그렇게 말하자, 가이딩의 여파에 빠져 있던 그가 쉰 목소리로 반문했다.
“닿는다고? 무슨 소린가.”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그냥 가까이 닿도록 다가서게 도와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뭐……?”
“불가능합니까? 저 이능의 집약체를 뚫고 들어가는 건.”
장태산 중령의 표정이 볼만하게 어그러졌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이치를 따져 물을 때가 아닌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죽었던 권재진은 살아 있고 서의우는 지상 최대의 재앙이 되었다.
그의 손을 잡은 것만으로 고갈 상태였던 이능이 샘처럼 차올랐는데 무슨 망설임이 필요할까. 장 중령이 우선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래. 나 혼자서는 어렵다.”
“그렇다면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가이딩 할 테니까. 가능할 때까지.”
“에스퍼를?”
“네. 시간 없습니다. 서의우에게 접촉하기만 하면…….”
“……그를 가이딩 할 생각인가. 폭주 중인 에스퍼를?”
장 중령이 눈 사이를 좁혔다. 폭주 전이라면 모를까, 폭주하기 시작한 에스퍼를 가이딩 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 헛된 발버둥일 뿐.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되어 버릴지 몰랐다. 불확실한 짓에 매달릴 시간에 대원들을 전원 대피시키는 것이 나을 수 있었다.
“나 먼저 부탁하지. 방어계니 쓸모가 있을 거다.”
그때, 마태오가 끼어들어 손을 불쑥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