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서의우가 괴롭게 통곡을 삼켰다. 찢어진 상처가 보이는 듯했다.
권재진은 1회차 서의우를 기다리기는커녕 원망하게 되었고, 자신의 가족과 유년기 기억을 없앤 개새끼라고 배신감을 느꼈고, 1회차 서의우와는 제대로 연애할 수 없었노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앞머리를 넘겨 가며 1회차와 2회차를 구분 짓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도 않고.
2회차 서의우와 더…….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2회차 애새끼가, 20살짜리 어린애가, 권재진과 서의우가 어떤 시간을 함께했는지도 모르고 권재진에게 온갖 개짓을 해 댈 때마다 살심이 솟았다.
미친 자식이 감히 누구 눈알 점막을 핥아 대고, 당장에 무릎 꿇고 빌지는 못할망정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는 이능이나 뿜어 대고, 요령도 없는 놈이 배려 없이 결장까지 처박고, 씨발 새끼가, 개쓰레기 새끼가…….
보안 시스템을 망가트려서 권재진이 크리처에 물려 죽을 뻔했을 땐 폭주하든 뭐든 상관없이 되돌아가 다 뒤엎어 버리고 싶었다.
권재진을 혼자 두고 뭘 하다가 늦장을 부려서 다른 에스퍼 눈에 띄게 하는지. 개자식이. 정신 나간 머저리 자식이. 씨발 새끼가, 미친 씨발놈이, 개씨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이곳에 홀로 처박혀,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둘이 무슨 짓을 하든……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어서,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한시 빨리 불균형이 해소되기만을 바랄 뿐인데. 그러려면 권재진이 서의우를 더 가이딩 해 줘야 하고, 그러려면 둘이 더 몸을 맞대어야 하고, 상대가 과거의 자신임에도, 지난 4년간의 기억만 없을 뿐, 속알맹이는 분명한 동일인임에도 미칠 노릇이었다.
“재진 씨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재진 씨는…… 그렇게 내가 미운가요?>
<다시는 용서해 줄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해도 지금은 좀 참아요.>
“내가 돌아가더라도 배척할 것 같았죠.”
<대체 뭘……. 무엇을 기다리라는 겁니까.>
<그때가 되면 바로 알게 될 거예요. 참혹할 테니.>
“나 같은 건 지나간 과거고, 이젠 필요 없으니, 그냥 20살짜리 서의우나 되돌려놓으라고 할 것 같았다고요…….”
<재진 씨가 날 기다리는 건 처음이지 않나요. 우리도 처음 하는 게 있네요.>
<안달 내도 좋아요. 내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어떡해요. 난 돌아가고 싶은데.”
“…….”
“난 어떻게든, 재진 씨랑 같이 살고 싶은데.”
“…….”
“무슨 원망을 듣든, 어떤 미움을 받든, 날 다 잊었어도, 내가…… 내가 서의운데.”
“…….”
“내가 서의우라고요…….”
직접 하고 싶었다.
연애도. 사랑도. 혁명도.
돌연변이라 숨어 지내야 했던 권재진이 세상 밖에 떳떳이 나설 수 있도록. 이번 생은 아쉽지 않도록. 둘 앞의 장애물을 서의우가 해치워 주고 싶었다.
지난 4년간 개같이 어리석게 굴었던 것, 다 용서를 빌고 고해하고 싶었고.
자신이 앗아 간 권재진의 가족과 유년기 기억, 스스로 힘으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본디 서의우가 해야 할 일이었다.
권재진의 곁에서. 서의우가.
눈물이 맺히지도 않은 그의 회색 눈이 오열하는 것처럼 보였다.
담담한 목소리조차 절규로 들렸다.
권재진을 바라보는 무감한 눈빛이 애절한 기다림과 피범벅이 된 집착으로 아우성쳤다.
서의우는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권재진만을…….
서의우가 손을 붙든 팔뚝에 힘을 주었다. 아프도록 옥죄더니만 결국 억누르지 못하고 권재진을 세게 잡아당겼다. 품에 가두듯이 껴안고 허리와 등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힘을 조절하지 못한 그 때문에 갈비통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이젠 다 부질없는 일이죠. 내가 가기 전에 재진 씨는 벌써 죽어 버렸고, 그 어리석은 과거의 나는 재진 씨를 지키지도 못했어요.”
붙드는 손아귀 힘은 턱없이 강한데, 내뱉는 말뜻은 정반대였다.
“다…… 끝났다고요.”
체념한 서의우가 재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뺨은 뜨거웠고 또 메말라 있었다. 울지도 못하고 이러는 모습이 더욱 절망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재진 씨…….”
“…….”
“우리 그냥 같이 죽을래요……?”
아득하게 읊조린 그가 천천히 고개를 치들었다.
텅 빈 표정으로 권재진에게 얼굴을 가져 댔다. 항상 거침없던 그답지 않게 유령처럼 입술을 맞췄다. 아랫입술이 눌리고 잇새가 벌어졌다. 권재진이 눈꺼풀을 부르르 떨었다.
“읏…….”
입술을 겹친 것뿐인데, 이것만으로도 서의우의 끔찍스러운 숙원이 느껴져 가슴이 미어졌다. 그가 바란 것이 무엇인지 권재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바람은 권재진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가 기다려 온 미래가 무엇인지도 모를 수 없었다. 권재진이 손꼽아 기다렸던 바로 그 둘의 미래이니까.
서의우가 갈급하게 재진의 턱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귓바퀴를 접어 누르고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재진 씨, 재진 씨…….”
서로의 입술이 맞대어지는 동안, 주먹으로 심장을 얻어맞는 것 같았다. 혀가 얽히면 등을 찔리는 것 같았다. 밟히고, 구르고, 떨어져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둘이 간절하게 갈망했던 무언가가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미안해……. 의우야, 미안해.”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요. 여기서 나랑 같이 죽으면…… 그러면, 나는 그걸로…….”
서의우가 쉬지 않고 재진을 탐했다. 그래 봐야 기다려 온 만큼의 백분지 일도 해소되지 못했다. 재진의 눈가에 입술을 누르고, 눈꺼풀을 핥고, 뺨과 귀에 키스했다. 귓바퀴를 이로 물고 질근대다가 목덜미에도 잇자국을 새겼다.
권재진이 서의우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나도 널 잊고 싶지 않았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런 건, 너무…….”
“재진 씨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것뿐이잖아요. 줄곧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알아요.”
“나한테 그냥 말하지 그랬어. 내가 잊은 거라고, 왜 아무것도…….”
“돌아가면. 내가 돌아가면 다 얘기하려고 했어요. 그게 원래 우리 약속이었으니까.”
“하…….”
권재진이 탁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서의우가 재진의 얼굴을 쫓아 뺨을 맞대었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관자놀이를 간질였다. 깃털같이 부드러운 촉감이었음에도 지금은 맹수 발톱에 헤집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형태를 자신에게 새겨 넣듯 몸을 만졌다. 등을 매만지고 허리를 쓸어내렸다. 아주 오래도록 이러고 싶었다는 듯이,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이럴 수 없다는 듯이.
“있죠. 재진 씨, 나한테도 말해 주면 안 돼요? 나도 듣고 싶어요.”
“뭐를……. 뭘…….”
“사랑한다고요…….”
“……사랑해.”
“의우야 사랑해, 해 줘요.”
“의우야 사랑해.”
“다음에는 날 기억할 거라고 말해 줘요.”
“기억할게……. 너 다 기억할게.”
“내 생각 많이 해 준다고 약속해요. 이번에 돌아가면, 날 절대 잊지 않고, 날 사랑하고, 내 생각 자주 하고……. 우리도 좋을 수 있었다고.”
“……왜, 왜 지금 그런 말을.”
“왜겠어요. 나밖에 없잖아요. 되돌릴 수 있는 건.”
“……뭐?”
그의 곧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거뭇한 눈동자는 격랑처럼 세차게 고뇌하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서의우가 한 손에 이능을 끌어모았다. 나선으로 소용돌이치는 힘이 그의 손아귀에 몰려들었다.
4년 후의 서의우는, 20살의 지금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강대한 이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조작의 숙련도나 응용력이 배로 뛰어났다. 노련하고 성숙했다.
“재진 씨가 선택해요. 나랑 여기서 같이 죽을지. 아니면…… 돌아갈지.”
잔인한 선택지가 주어졌다.
무슨 소리냐며 되묻고 싶었지만, 너무나 단번에 상황이 이해되었다. 벼락이 꽂힌 것처럼 깨달음이 머리를 찢었고 양자택일의 선택 앞에 놓였다는 불우한 사실이 권재진의 모가지를 졸랐다.
높다란 처형대 위에서 교수형당하는 기분이었다.
“재진 씨를 되살려 줄 수 있어요. 대신, 그러면…… 난 끝이에요. 이 이능까지 사용해 버리고 나면 통로가 닫힐 거예요. 재진 씨는 영영 스무 살짜리 서의우와 사는 거예요.”
“…….”
“아니면, 우리 둘이 그냥, 돌아가지 않고……. 이 통로에서……. 좌표에서 좌표로, 여길 망령처럼 떠돌면서 지내다가 막다른 시간에 다다르면 같이 죽어 사라지는 거예요…….”
“…….”
“어떡할래요……?”
캄캄하다.
절망이 눈을 흐리고 비수 같은 좌절이 가슴을 찔렀다. 죽음의 강 아래로 끌려 내려가면서, 서의우와 함께 심연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렀으면 이 괴로움을 겉으로 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흘러나오는 것 하나 없었다. 가슴이 찢기고 핵이 쪼개지는 순간보다도, 게이트에 휩쓸려 사지가 찢기던 순간보다도, 지금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짓눌리는 감정과 분출하는 감정 사이에서 권재진이 서의우의 손을 붙잡았다.
서의우는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내더니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러면 안 되죠.”
권재진이 손에 힘을 주었다.
“가자.”
“바보예요? 재진 씨는 날 두고 돌아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택해야지.”
“됐으니까, 나랑 가.”
“작별 인사 하고 끌어안고 입 맞추고, 그럴싸한 말 몇 마디 던져 준 뒤에 나랑 헤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새끼한테 돌아가서 둘이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당연한 정답이잖아. 안 그래요?”
“어. 안 그래.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그냥…….”
“왜요…… 왜 안 그러는데요. 어쩌려고……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데요.”